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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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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에 나누는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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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역 프렛홈에는 부산행 급행열차 「노조미」가 우렁찬 기적 소리와 함께 그 육중한 체구를 멈추었다.

내리는 사람, 오르는 사람, 배웅 나온 사람, 마중 나온 사람 ──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는 군중을 헤치며 백 영민은 트렁크를 들고 차에 올랐다.

기차는 초만원이다. 밤 열한 시 ── 말은 봄이건만 으스스한 밤공기가 아직 몸에 거칠다.

영민은 트렁크를 선반에 올려 놓고 자리를 잡지 못한채 들창을 열었다. 가벼운 흥분의 빛이 영민의 얼굴에 알알이 떠 올랐다. 그러한 영민은 전등 불을 따라 군중을 내다보았다.

「아, 벌써 탔는가?」

내다보는 방향과는 반대 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콘사이스가 신문지에 싼 무슨 꾸러미 같은 것을 들고 다가오지 않는가.

홍안미소년 콘사이쓰의 그 구슬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와 계집애처럼 새빨간 입술을 볼 때마다 영민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다사로워지던 과거 五[오] 년 동안의 중학시절을 다시금 회상한다.

그러나 소년시절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독특한 애정의 세계와도 이제는 완전히 작별의 인사를 해야만 될 때가 온 것이다.

「가면 곧 편질 하게.」

영민의 흥분된 얼굴을 창가에 쳐다보면서 콘사이스는 그렇게 다진다.

「하구 말구.」

「동경, 동경, 아아, 희망의 동경!」

콘사이스는 선망에 찬 얼굴에 어설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실상은 나 보다도 군이 더 동경을 그리워 했었는데……」

그러면서 영민은 손을 뻗쳐 콘사이스의 손을 잡았다. 콘사이스도 영민의 손을 힘차게 흔들며

「공부 많이 해 갖고 돌아 오게. 그리구 인생을 많이 배워 가지고 오게.

나에게 있어선 동경은 영원한 꿈나랄쎄!」

「고학을 해 보지?」

「그건 말이 쉽지, 옛날과는 사정이 다르다니까.」

「그럼 어떡헐 작정인가?」

서울루나 가서 무슨 「신문사 같은 데나 들어갈까 하지만……하여튼 나의 목적엔 변함이 없어. 위대한 소설가! 그렇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야 말테야!」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였다.

「음, 구태여 동경엘 안 가더라두 군의 그 불타는 정열과 굳세인 의지만 있으면……나는 군이 자중해 주길 바라네.」

「응, 서로서로 건강에 주의를 하세.」

두 젊은이의 손이 다시 한 번 힘있게 쥐어 졌다.

「이건 군이 좋아하는 군밤 ── 갖고 가다가 지나간 날이 그립거던 한 알씩 끄내 먹게.」

그러면서 콘사이스는 갖고 온 신문지 꾸러미를 들창안으로 들여 놓았다.

「고맙네!」

무슨 애인과 헤어지는 것 같은 애틋한 감정이 한줄기 영민의 가슴을 오주주 습격하였다. 그때 짜르랑하고 발차의 종이 울렸다.

「아차, 중대 뉴스를 잊어 먹을 뻔 했네! 저 야마모도 선생이 사직원을 냈다는 거야.」

「뭐, 야마모도 선생이?」

영민은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마모도 선생이 사직원을 냈다?……」

그것은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응.」

「사실인가?」

「사실이야.」

「언제?」

「저번 다과회가 있은 바루 그 댐 날이라는데, 정확한 뉴스야.」

「이유는?」

「이윤 자세히 몰라. 하여튼 그날 다과회 사건에 관계된 무슨 이윤 것만은 추측할 수 있는데……」

그때 일 분간 계속해 울리던 종이 딱 멎었다.

「하여튼 자세한 것은 서신으루 기별하마.」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 그리구 또 한 가지 ──」

콘사이스는 따라오며

「대통령은 상급학교에 갈 희망을 완전히 버리구…」

군중이 떠드는 소란한 소리에 콘사이스의 말이 잘 들리질 않는다. 영민은 상반신을 힘껏 내밀며

「그래 어떡헌대?」

「상해(上海)로 가겠다구……」

「어디루?……상해?……」

영민은 고함을 치듯 물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군중 속에 완전히 싸여버린 콘사이스였다. 사람들 머리 위로 모자를 벗어 내젔는 손만이 감실감실 작아져 간다.

이윽고 구내를 빠저 나온 기차는 대동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시가의 등불이 점점 작어진다. 달빛이 물 위에 고요히 내렸다.

철교를 건너면서 기차는 기적 소리를 두 번이나 뚜우뚜우 불었다. 그 기적 소리를 백영민은 잠 못 이루던 하숙방에서 그 얼마나 구슬프게 들었던고…… 그러나 백영민의 소년 시절의 기억이 어찌 그것에만 그치랴.

달빛 속에서 지금 고요히 잠들려 하는 금수강산 ── 五[오]년 동안 백 영민의 꿈과 고요한 사색을 길러주고 북돋우어 준 모란봉이며 능라도며 대동강이었다.

「패강(浿江)아, 길이 흐르라!」

영민은 그렇게 마음 속으로 부르짖으며 들창문을 닫았다. 사방을 돌아봐도 빈 좌석이 하나도 없다. 두 사람 앉은 데를 부비고 들어가면 못 앉을 배는 없었으나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으리 만큼 영민의 건강은 좋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상쾌하였다.

「대통령이 상핼 갔다?」

바람결에 사라져 버린 콘사이스의 마지막 한 마다가 무척 마음에 걸렸다.

그는 사람을 헤치며 창백한 달빛이 비낀 승강구로 나와 흥분된 이마를 바람에 쐬었다.

「으화, 으화, 으화……」

하고, 어깨를 들석거리며 웃어대던 대통령의 얼굴이 허공중에 나타난다. 정거장에 남겨 놓고 온 콘사이스의 서글픈 얼굴이 나타난다. 땅개의 얼굴이 나타난다. 야마모도 선생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부모의 얼굴, 운옥의 얼굴……

그 순간, 영민은 맨 마지막에 나타난 그 촌색시의 환상을 떨처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힘껏 흔들며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렇다 나에겐 미래가 있을 뿐, 과거는 없다! 어찌 어두움이 있으며 뉘우침이 있을 수 있으랴! 희망을 찾아서……광명을 찾아서……아아, 동경! 그리운 동경!」

커다란 부르짖음이었으나, 영민의 귀에는 통 들리지를 않는다. 희오리치는 밤 바람에 산산이 흩어져 연기처럼 허공중에 사라지는 음성이었다.

영민은 빈 좌석을 찾을 셈으로 다음 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다음 칸으로 들어 갔다. 그 칸도 만 원이다.

「대체 이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들을 가는고?」

하였다. 저이들도 자기처럼 뚜렷한 목적과 희망을 품고 집을 떠난 길손들일까?……

중화(中和)를 지나고 황주(黃州)를 지날 무렵쯤해서야 몇 사람씩 내리는 손님이 있었으나 그런 좌석은 좀처럼 영민의 차례에 돌아올질 않았다.

또 다음 칸으로 들어 가고 또 다음 칸으로 들어가고, 영민은 마침내 二 [이]등 침대차가 달린 데까지 걸어가 보았다.

영민의 여행의 경험은 침대차를 모르고 식당을 몰랐다. 수학여행으로 여순(旅順)까지 가 본 것이 제일 긴 여행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유로 들락날락 하는 것을 보니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 영민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앞이 탁 막히면서 길은 바른편 들창 옆으로 꺾어져서 길게 뻗었다. 그 길게 뻗은 길을 걸어가니

「아, 여기가 소위 식당이란 데로구나.」

휘황하니 밝은 전등, 하얀 상보를 덮은 테이블, 테이블 위의 꽃병, 분주스레 돌아다니는 「웨이트리스」 ── 그처럼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기차 안에 이처럼 찬란하고 황홀한 안식처가 아담스레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영민에게는 하나의 기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먹고 마시고 쉬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와는 별천지의 인간들 같아서 영민은 당황히 발머리를 돌렸다.

발머리를 돌리자 영민은 바로 자기 코 앞에서 화환(花環)처럼 화려한 하나의 흰 얼굴과 똑 마주 쳤다.

「아, 실례하였읍니다.」

영민은 모자에 손을 대면서 길을 비꼈다. 그러나 활짝 피어난 한 포기 달리아처럼 화려한 그 얼굴은 아니 살 눈섭이 유달리 긴 그 새까만 두 눈동자가 서너 번 깜박깜박 하더니만

「아니, 저 탑골동 백 초시 댁?……」

하고 영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예? ──」

「영민씨 아니세요?」

「예, ── 저 백 영민인데요.」

「아이, 어쩌믄! 이게 웬 일얘요? …… 아니, 날 몰라 보세요?」

웃으면 움푹 우물이 파지는 양쪽 볼이 꽃이 피는 것처럼 반가워 한다.

「아, 저 ──」

그때야 영민은 비로소 완전히 망각해 버렸던 낡은 기억을 새롭힐 수 있었다.

「알아 보시겠어요?……분이, 박 분이야요.」

「아……분이가? ──」

영민은 놀래어 분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무엇인지 아지 못할 하나의 흐뭇한 감정이 소박한 영민의 마음을 다채(多彩)롭게 장식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이 좋아! 역시 알아 보시네! 난 몰라 보실줄 알구 맘을 조렸는데……」

분이는 그러면서 영민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정말 이렇게 똑 마주 치지 않으믄 몰라 보겠어요. 아이 퍽두 크셨네! 그땐 요만 했었는데……」

분이가 손으로 영민의 열세 살 때의 키를 재어 보인다.

「나만 컸나요? 분인 안 크구 ──」

영민이는 비로소 자기의 감정과 어울리는 웃음을 지었다.

「호, 호, 호…… 나도 크긴 컸지만, ── 아이 정말 이젠 어른이 되셨네!」

어른이 되었을 영민을 하두 여러 번 꿈길에서 만나본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