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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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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은장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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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실 안에는 원장인 서 목사와 윤 선생 이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그래 그러한 위험한 노래를 어째서 불렀소?」

이 야학원의 책임자인 서 목사는 이 뜻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될런지를 모르는 듯이, 그러한 한편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윤 선생의 품안에서 흐늑흐늑 느껴 울던 운옥은 원장 선생님의 그 부드러운 물음에 비로소 머리를 들고 한없이 흘러 나오는 눈물을 거두어 조용히 대답하였다.

「돌아가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그 노래를 알으켜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일평생 가장 기쁜 날과 가장 슬픈 날 그 노래를 부르라고……」

서 목사도 운옥의 아버지 허 상진이란 사람이 어떠한 인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음 ──」

하고, 서 목사는 한 번 깊은 신음을 하고 나서

「잘 알겠소. 오늘 이 야학원을 졸업하는 것이 기빼서 그만 그 노래를 불렀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운옥은 대답이 없이 서 목사의 그 인자스런 얼굴을 얼마동안 묵묵히 바라보다가 그만 머리를 다시 윤 선생의 품안에 파묻으며 한층 더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알겠소. 잘 알겠소!」

하고, 서 목사는 머리를 끄떡끄떡 하다가

「그러나 아버지의 그 고귀하신 말씀을 그처럼 경솔히 생각해서는 아니되오. 좀더 기쁜 날과 좀더 슬픈 날이 따로이 있을 것이요. 음, 하여튼 오늘 밤 경찰관계에 있는 사람이 참석하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소. 빨리 집으로 돌아 가시요. 날이 밝으면 나도 백 초시를 찾아 보겠소.」

이리하여 야학원 졸업식은 한 토막의 비장한 「에필로 . 그」와 함께 막을 닫쳤다.

구름이 끼었다. 그래서 달은 흐렸다 밝았다 하였다.

이윽고 태극령 고개를 넘는 운옥의 발뿌리 앞에 한 조각 한 조각 마치 달빛 속의 흰 나비처럼 팔락팔락 날아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다.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한 조각씩 찢어 버리는 졸업장이건만 아직도 채 찢지 못한 운옥이었다.

「도라지……불쌍한 도라지! 네 신세 가이 없구나!」

「도라지탑」 앞에서 운옥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손바닥만큼 남은 졸업장을 한꺼번에 조각조각 찢어서 「도라지탑」을 향하여 그 누구에게 투정이나 하듯이 힘껏 내던졌다.

팔락팔락 팔락팔락 …… ……달빛이 희미한 허공에서 낙화(洛花)인 양 산산이 흩어지는 그 모양은 금후에 있어서의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려는 허 운옥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과도 같았다.

달이 갑자기 흐려졌다.

운옥이가 발걸음을 돌려 태극령을 내리려 하였을 바로 그때다. 시꺼먼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운옥의 앞에 우뚝 나서며 길을 가로 막는다.

「누구예요?……」

그러나 시꺼먼 그림자는 대답이 없다. 운옥은 가슴이 선뜻해 진다. 그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운옥의 전신을 무서운 속도로 습격해 왔다.

운옥은 다람쥐처럼 재빨리 길을 비끼려 하였다. 그러나 그림자는 다시 운옥의 앞을 가로 막는다.

「누, 누구예요?……」

「………」

그림자는 여전히 돌부처처럼 대답이 없다.

운옥의 앞길을 가로 막고 부처님처럼 말이 없는 시꺼먼 그림자!

「누구예요? 길을 비껴요!」

「………」

그때, 조각 구름에 싸였던 달빛이 다시금 태극령 고개를 화안하니 밝혔다.

「앗……」

박 준길이의 히쭉거리는 얼굴이 바로 운옥의 코 앞에 있었다.

「나야, 나! 나래두 그래.」

그 순간 운옥은 그 어떤 최악의 경우를 불연듯 머리에 그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려는 자기의 운명에 최후를 고하는 것 같은 무서운 목소리가

「운옥이!」

하고, 박 준길의 그 두터운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운옥이! 운옥은 날 그처럼 피하려구만 하지만……나는……나는 六[육] 년 전부터 운옥일……」

준길은 한 발 가까이 운옥의 앞으로 다가섰다.

「…내 색시가 될번한 운옥일 나는……나는 잊질 못하구…… 가슴 속 깊이 생각하구…… 아, 운옥이!」

그러면서 준길은 운옥의 손목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리 쉽사리 운옥의 손목은 잡히질 않는다.

「길을 비껴요」

쏘는 것처럼 튀어 나오는 운옥의 목소리에 준길은 잠깐동안 묵묵히 운옥의 얼굴을 쏘는듯이 들여다 보다가

「흥!」

하고, 코 웃음을 치며

「암만 그래 봐두 독안에 든 생쥐야! 너 오늘 밤 예배당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지?……」

「……?」

이번에는 운옥의 입이 벙어리처럼 막혔다.

「나두 다 들었어. 예배당에선 널 무사히 하려구 싸구 돌지만……흥, 내 말 한 마디믄 날두 밝기 전에 손목에 쇠수갑을 찰 사람이야!」

「………」

운옥은 눈 앞이 아찔해졌다.

「그만 했으면 알테지……그러니까 잠자쿠……암말 말구 내 말만 한 마디 들어 줘!」

그리고 준길은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옥을 달래기 시작하였다.

「운옥이, 나하구 만주로 도망을 가……여기 있다가는 아무리 예배당에서 싸구 돈대두 운옥의 몸이 위험하니까……우리 둘이서 멀리 저 만주 벌판으루 도망을 해!……운옥이!」

준길은 덥석 운옥의 손목을 잡았다.

짐승의 손발처럼 무섭고 더러운 준길의 손바닥에서 뜻뜻미지근한 체온을 깨닫자 운옥은 단번에 자기의 몸이 항간의 매춘부처럼 더럽혀지는 일순간을 분명히 느꼈다.

극도의 분노가 운옥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아아, 이 능욕! 이 치욕을 무엇으로 갚으랴?… 차라리 갚지 못할 바엔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운옥은 준길이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뿌리친댔자 또다시 잡힐 손목이었다. 덤비지 말고 가만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아니될 중대한 위기(危機)에 선 자신을 운옥은 확실히 깨달았다.

「운옥이, 도망을 해! 나하구 같이 도망을 해!」

준길은 뜨거운 입김을 확확 퍼부으며 잡힌 손목을 뿌리치지 않은 운옥을 보고 자기 요구에 응하는 것이라고 어깨가 으쓱해 진다.

위험은 절박하였다.

손목을 잡힌채 뿌리치지 않는 운옥의 얼굴을 준길은 마치 혀 끝으로 핥는 듯이 들여다보며 만족해 한다.

자아 「 , 운옥이, 나하구 먼 곳으로 도망을 하면 그만이래두!」

그 순간 운옥은 한 자루의 비수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을 불연듯 깨달았다.

병상에 누운 허 상진이가 딸 운옥을 백 초시에게 내 맡길 때 그는 물질적으로 운옥을 보탬해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단하나의 선물로 자나깨나 품안에 항상 품고 있던 한 자루의 권총을 딸에게 내주며

「운옥아, 아버지가 그립거든 이것을 끄내 보아라. 이 속에는 세 방의 실탄이 들어 있다. 한 방은 네 몸을 위하여…… 또 한방은 네 그 지아비를 위하여…… 그리구 남은 한 방은 네 나라를 위하여…… 잘 생각해서 써야 하느리라 ──」

그 권총이 지금 시집 가는 날 쓰려고 정성들여 지어둔 원앙금침(鴛鴦錦枕) 속에 들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위험은 좀 더 절박하였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되어 달려드는 이 짐승과도 같은 준길이의 희번득거리는 얼굴을 눈 앞에 볼 때, 원앙금침 속에 들어 있는 무기를 운옥이가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 운옥이, 이리 다가 와! 내 품안으로 들어와!」

준길이가 그러면서 운옥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잡아 당기면서 한 손으로 운옥의 허리를 휘여 감으려 하였을 때다.

운옥은 만신의 힘을 주어 손목을 뿌리치자 준길의 팔꼬비 밑을 뀌어 쏜살같이 다름박질을 쳤다.

그러나 운옥의 연약한 몽뚱이는 그순간 힘없이 뒤로 반뜻 나가 자빠지고 말았다. 준길의 독수리같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운옥의 끌채를 움켜 쥐고 힘껏 뒤로 잡아 당겼던 때문이다.

「요것이 노상 꾀를 피운다!」

열에 뜬 준길의 목소리다.

그러나 그때 아아 ── , 운옥은 어째서 베개 속에 든 권총만을 그리워 하였는고?……좀 더 손 쉬운 무기가 지금 모본단 엽랑과 함께 바지 허리띠에 달려있지 않는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린 운옥에게 능금을 깎아 주고 복숭아를 깎아 주시던 귀여운 은장두 ── 어머니의 기념물인 그 조그만 장두칼을 운옥은 살그머니 허리춤에서 빼들고 가만히 땅에서 몸을 일으키었다.

달이 또 흐려졌다. 사방은 캄캄하다.

「그러지말구 운옥이……내 말 한 번만 들어 줘!」

그 순간 ── 독수리처럼 장두칼을 움켜쥔 운옥의 손이 자기의 입술을 찾고 있는 준길이의 확확 닳은 면상을 향하여 죽어라 하고 내 찔렀다.

「앗……아우!……」

하는 날카로운 부르짖음과 함께 자기 허리에서 송충이처첨 무기미하게 어물거리던 준길이의 손이 털썩 떨어지면서 그 육중한 몽뚱이가 땅 위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위험은 갔다.

운옥은 단숨에 캄캄한 태극령 고개를 뛰어 내렸다. 피 묻은 은장두를 움켜쥔 채 운옥은 꿈결처럼 뛰어 내렸다.

「아버지, 인제 다녀 왔읍니다.」

박 준길을 쓰러뜨리고 장두칼을 움켜쥔채 단숨에 태극령을 뛰어 내려 온 운옥은 사랑문 밖에서 인사를 하였다.

「오냐, 졸업식은 다 끝났느냐?」

「예에.」

운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었다. 보통 때 같으면 二[이] 년 동안이나 공을 들여 받아온 야학원 졸업장을 문틈으로 살그머니 들여보내 시아버지에게 보여야만 할 운옥이건만 운옥의 손에는 그렇게 할 졸업장이 없다. 조각조각 찢어버린 것이 이 인자하신 시아버지에게 대하여 무척 미안해 졌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십시요.」

「응, 너두 어서 들어가 자거라.」

안방에 불이 꺼진 것을 보니 시어머니는 주무시는 모양이다.

운옥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 놓고 비로소 손에 들은 은장두를 들여다 보았다. 시꺼먼 피가 묻었다.

「사람을 죽였구나!」

그렇다.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을 그때야 비로소 운옥의 의식에 떠 올랐다.

치를 부르르 떨었다. 어디를 어떻게 찔렀는지 운옥은 통 기억이 없다.

그러나 운옥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었다. 운옥은 피 묻은 은장두를 씻어 다시 허리춤에 달린 칼집에 꽂은 후에 자기의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을 거울 속에 들여다 보면서

「아버지, 어머니 ……제 몸을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아가신 양친의 영전에 운옥은 조용히 아뢰였다.

그리고는 곧 장농에서 새 옷을 끄내 갈아 입고 몇몇 옷가지를 ( )려서 봇짐을 쌌다. 아니, 봇짐을 싸기 전에 운옥은 금실로 원앙 한쌍을 수놓은 긴 베개를 내리워 실밥을 뜯었다. 그리고는 모밀 짝대미를 헤치고 비단으로 싼 아버지의 선물인 한 자루의 권총을 끄내 옥양목 버선 속에 넣어서 봇짐 속에 쓰러 넣었다.

아주 간단한 차부였다.

운옥은 불을 끈 후에 봇짐을 들고 밖으로 나와 시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백 초시와 운옥은 거기서 약 한 시간 동안을 두고 중얼중얼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가 이윽고 사랑방을 나와 대문 밖을 나섰을 때는 벌써 태극령 고개 위에 훤하게 먼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태극령 고개는 위험하니, 지름길로 질러 가거라. 음 ──」

「예에 ── 그럼 아버지 안녕히……」

「평양으로 피신을 하더래두 어디 믿을 만한 곳이 있어야겠는데……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버지, 염려 마셔요. 어떻게든 되겠지요. 그럼 안녕히…… 어머님께……」

「오냐. 네 어머니가 이 일을 알면 깜짝 놀라 기절을 할께다. 그런데 노자가 적어서 안됐다. 있는 것이 그것 뿐이니……몸 조심 잘 하여 네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구 살겠다! 음 ──」

이리하여 운옥은 태극령 중턱 솔밭 사이를 끼어 아버지 묘지에 하직을 하고 일로 평양을 향하여 연약한 발걸음에 채찍질을 하였던 것이니, 애국가을 부른 불온한 사상범으로서, 또한 사람을 죽인 살인범으로서 六[육] 년 전까지 계속되었던 고달픈 유랑의 길이 또다시 허 운옥의 눈 앞에 끝없이 전개되려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