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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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노래[편집]

1[편집]

「…………?」

낡은 필림이 끊기는 순간 ── 거기에는 온갖 움직임이 일제히 정지를 한다.

운옥은 입이 있으되 호흡을 잊지 못했고 눈이 있으되 빛갈을 분별치 못했고 귀가 있으되 음향을 듣지 못했다. 아니, 의식이 있으되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하나의 완전한 백치(白痴)의 세계가 운옥을 점령하였다.

「……무슨 말씀이나요? ──」

머엉하니 운옥은 남편을 쳐다 보았다.

「그것은…… 그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요! 나를…나를 남편 될 사람이라고 생각질 마오 ──」

영민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과 무섭게 싸우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억제할 바 없는 듯이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주먹 쥔 바른손이 가느다랗게 경련을 이르킨다.

「…………?」

백치의 세계로부터 비로서 벗어난 운옥이었다. 영민의 말을 이번엔 너무도 분명히 들었다.

「단지…단지 그 한 마디 때문에 나는 일부러 집엘 들렀소.」

영민의 얼굴에는 비로소 숨을 돌린 듯한 가벼운 기색이 떠 돌았다.

「전…전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말씀은 똑똑히 이 귀로 들었읍니다만…… 믿을 수가 없어요!…지금 하신 말씀을 정말루……정말루 믿어야 하나요?……」

공손한 말이었다. 조용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원망스러운 눈동자였다. 샛별같이 맑은 두 눈동자에서 한 방울 두 방울 이슬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져 내린다.

「아무리 괴로와도 넘어야 할 고개였소. 내 말로 그 괴로움과 싸우면서 넘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요. 나는 운옥을 무척 사랑해 왔소. 운옥이처럼 착하고 어여쁘고 영리한 여성을 내 일생을 통하여서도 다시는 발견할 것 같지가 않소. ──」

「…………」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운옥을 자기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소. 사랑하는 누나, 고마운 누나 ── 나를 고매굴고 나를 무척 귀여워 해 준 고마운 누나로 믿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었소. 철 없을 적엔 그렇게 믿고 운옥을 따랐고 철이 났을 땐 그렇게 믿고 운옥을 멀리 한 것이요.」

「…………」

운옥은 대답이 없다 . 아니, 대답이 있을 리 만무한 운옥의 신세였다. 눈물만 그저 자꾸자꾸 쏟아져 나온다.

「운옥의 외로운 신세를 생각하면 가슴이 쪼개질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소.

그래서 나두 운옥을 위하여 여러번 울었소. 운옥의 행복을 위하여……운옥을 절망속으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하여 나의…나의 모든 희망과 모든 이상을 희생하고라도 운옥이와 결혼할 생각도 하였소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이 다 같이 불행하게 될 것만 같아서……」

「── 잘 알겠읍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만 있으면 구 하셔야지요. 그리구 그것은 제 힘으로 넉넉히 될 수 있는 일이예요!」

이처럼 떠들지 않고 조용히 대답할 수 있는 자기를 운옥은 오늘 비로소 발견하였다.

유랑생활 三十[삼십]년 ── 적빈속에서 시퍼런 칼날 밑을 수 없이 뛰어다닌 지사의 피를 그대로 고스란히 받은 운옥이다.

그러나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리워 영민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제 힘으로…… 제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오니…아무런 염려 마시구……

부디, 부디 몸조심하여 공부 많이 하셔서……」

울음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염려하여 이를 악 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기러기 소리 구슬프게 태극령 달빛을 누비는 밤이다.

2[편집]

귀여운 사람에게 드리는 최후의 진지상이다.

날이 밝자 운옥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일어나 동자를 하였다.

운옥은 정성을 다하여 오순도순 상에다 찬 접시를 벌려 놓았다.

「이 진지가 그이의 피가 되고 살이 되기를……」

눈물 젖은 마음으로 운옥은 빌었다.

중낮쯤 되어 운옥은 어머니와 함께 영민의 트렁크에다 가지고 갈 옷을 채곡채곡 채어 넣고 있을 지음에 사랑방에서는 영민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응, 네 말 잘 알아 들었다.」

백 초시의 얼굴엔 노기가 만만하다.

「네 뜻한 바가 그처럼 굳은 줄도 인젠 알았다. 못 믿을 사람을 하늘처럼 믿고 있던 내 잘못도 인젠 알았다.」

「불초 영민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영민은 고개를 숙인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이 아비의 편지를 읽었느냐?」

「읽었읍니다.」

「읽구서두?」

「…………」

「얘이, 이놈!」

백 초시의 목소리가 궥하고 커졌다.

「그래 네가 따로이 정을 통하고 있는 그 계집은 대관절 누구냐? 바른대로 말을 해라!」

「아버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민은 고개를 들었다.

「왜 말을 못해? 네가 좋아서 댕기는 계집이 없다는 말이냐?」

「아버지, 오해하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제 동기는 그처럼 불순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음, 그렇다면 또 한번 속는 줄 알고 네 말을 믿으마. 그러나 그 대신 너는 금후 어떤 여인과도 절대로 정을 통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이 자리에서 해야만 된다!」

「…………」

영민은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맹세를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 못 될것이다!」

「…………」

「네가 운옥을 네 아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너를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다.」

「아버지……그러나 그것은……」

「여러 말 듣기 싫어! 한 마디루 썩썩 말을 못 하겠나?」

꿱하고 백 초시는 담뱃대를 거꾸로 쥐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 섰다.

영민은 다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얼마 동안 ── 그러나 다음 순간, 영민은 그 무엇을 마음깊이 결심한 듯이 머리를 번쩍 들고 힘 있는 어조로 대답하였다.

「맹세합니다! 아버지께서 그처럼 원하신다면 그것을 아버지 앞에 영민은 분명히 맹세합니다!」

「음 ── 이 아비두 분명히 네 말을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음 ──」

괘씸하다는 얼굴로 백 초시는 마당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면 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요.」

그러나 백초시는 먼 산만 머엉하니 바라보고 섰다.

낮이 지나서 영민은 트렁크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요.」

「오냐, 몸 조심 늘 해야 한다.」

운옥은 어머니 등 뒤에다 몸을 감추듯이 하며 어머니의 치마 귀를 잡고 따라 나오다가 어른들 앞이라 말은 못하고 멀리 눈 인사만 하였다.

이윽고 태극령을 감실감실 넘어가는 영민의 그림자를 부엌 뒷문 밖에서 발꿈치를 쳐들며 바라보던 운옥은 터저 나올 것 같은 슬픔을 꿀꺽 참으며 입속 말로 종알거렸다.

「가셨다! 인젠 아주 가셨다!」

눈물이 자꾸만 쏟아져 영민의 감실거리는 그림자를 운옥은 그만 놓쳐 버렸다.

3[편집]

그날 밤 예배당에서는 야학원 졸업식이 있었다.

예배당 목사인 원장과 여선생과 그리고 동리의 유지라는 명목을 가진 예배당 관계의 남녀가 十[십]여 명 참석하였다.

남자반 열댓 명, 부인반 스물 아홉 명 ── 그 부인 반에는 내일 모레가 환갑이라는 이웃집 개똥 할머니도 섞여 있었다.

「기미가요」의 제창이 있고 원장의 훈사와 졸업장 수여식이 있고 모모하는 젊은 유지의 축사가 있고 끝으로 형설(螢雪)의 공을 노래하는 소위 「호 다루ㆍ노ㆍ히까리」의 제창이 있고 ── 비록 초라한 야학원 일망정 졸업식은 제법 순서를 갖췄다.

졸업식이 끝나기가 바쁘게 개똥 할머니가 껑충껑충 걸어 나가더니 자기 손주 딸같은 윤 선생에게 졸업장을 쳐들고 겁신 절을 하였다.

「선생님 덕분에 서울루 돈 벌이를 간 우리 개똥이 녀석의 편지를 내가 인젠 제법 읽는다우. 그저 선생님의 덕분이래두!」

하하하…… 하는 웃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 웃음 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에 개똥 할머니가 졸업장을 휘저으며 흥에 겨워 춤을 추었다.

「가갸거겨 가실래면은, 나냐너녀 날보구 가오, 다댜더뎌 다듬이 소리, 라랴러려 라서방 죽네 ──」

웃음 소리가 이번에는 더 한층 커졌다. 졸업식장은 당장에 여흥장으로 돌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흥에 겨운 개똥 할머니의 엉덩춤에도 웃을 줄을 모르는 한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 부인반 반장인 허 운옥이었다.

운옥의 샛별같이 영롱한 두 눈동자는 분명히 개똥 할머니의 엉덩춤을 바라보고 있었건만 보이지를 않았고 운옥의 두 귀는 분명히 개똥 할머니의 노래를 들었건만 들리지를 않았다.

태극령 고개로 감실감실 넘어가던 영민의 최후의 그림자가 운옥의 망막 속에 인박한 듯이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인젠 가셨다! 아주 가셨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던 자기의 자태가 운옥은 한없이 가련해 보였다.

어디 즐거움이 있으며 어디 웃음이 있는고?…… 웃음은 벌써 운옥을 버렸고 즐거움은 벌써 운옥을 떠났다.

남자 반에서도 누군가가 민요 같은 것을 불렀으나 운옥의 귀에는 통 들어오지를 않았다. 또 누군가가 하 ── 모니카」를 분것도 같은 운옥이기도 하였다.

「자아, 부인 반에서 지면 안돼요. 허 운옥이 이리 나와요!」

개똥 할머니의 손주 딸같은 윤 선생이 운옥을 불렀으나 운옥은 자기를 부르는 윤 선생을 강단 옆에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통 일어설 줄을 몰랐다.

운옥은 아까부터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께서 어렸을 적부터 자기 귀에다 입을 대고 마치 속삭이듯이 가르쳐 주신 노래가 하나 있었다.

「운옥아, 이 노랠랑 네 일평생에 가장 기쁜 날과 가장 슬픈 날 불러라.」

하시며 밤마다 자장가인 양 불러주신 노래 ── 그 노래를 지금 눈물 젖은 운옥의 마음은 한없이 그리워 하는 것이다.

「아니, 얘는 그래 기쁘질 않아?」

개똥 할머니는 그러면서 머엉하니 앉아 있는 운옥의 팔을 잡아 일으켜 가지고 강단으로 끌고 나갔다.

운옥은 허둥지둥 꿈결처럼 강단에 끌리워 올라 갔다.

그런 줄도 모르는 군중은 운옥의 고운 목소리를 듣는다고 우뢰같은 박수로운옥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그 소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여어, 운옥이!……」

하고 환호의 소리를 보내는 청년의 목소리가 하나 섞여 있었던 것이니, 만일 온전한 정신 상태를 가진 운옥이었더라면 그 커다란 목소리가 박 준길이의 것임을 알았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밤의 그 무서운 비극을 저질러 놓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4[편집]

「아버지, 운옥은 오늘밤 아버지가 몹시 그립습니다!」

강단에 오른 운옥은 우뢰같은 박수 소리를 꿈결처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구슬프게 울었다.

「운옥이, 남자반에 지면 안돼요.」

윤 선생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격려의 말을 던지다가

「운옥이, 어디 편치 않아요?」

평시와는 어딘가 달라 보이는 허 운옥이가 아닌가.

「아니요.」

「그래두 안색이 대단히 나쁜데……?」

「괜찮아요, 선생님 ──」

「글쎄 그러믄 괜찮아두……」

「선생님 ──」

「응?……」

「저 미안하지만 풍금 좀 처 주세요.」

「아, 풍금……」

최 선생은 냉큼 풍금 앞으로 옮아 앉으며 가벼운 솜씨로 뚜껑을 열었다.

「그래 운옥이, 뭘 칠까?」

「저…저『호다루ㆍ노ㆍ히까리』를 좀 쳐주세요.」

「뭐?…『호다루ㆍ노ㆍ히까리』?……」

윤 선생은 의외였다. 그것은 아까 여러 졸업생이 다 같이 부른 졸업 창가가 아닌가. 그것을 다시 되풀이 하겠다는 운옥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걸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남자반에게 진대두 그래?」

그랬더니 운옥은 애원하는 듯이

「글쎄 선생님, 좀 처 주세요!」

윤 선생은 하는 수 없이 불만을 느끼면서도 운옥의 청대로 『호 다루ㆍ노ㆍ히까리』를 치고자 건반을 우왕 ── 하고 울렸다.

그와 동시에 운옥의 입으로부터 나온 노래는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순간 돌연 윤 선생의 풍금이 우르렁하고 멎었다. 늙은 원장 이하 몇 사람의 유지가 의자로부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들의 희번덕거리는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하나의 공포의 빛이 알알이 떠 올랐다.

그것은 분명히『호다루ㆍ노ㆍ히까리』와 동일한 곡조로 불리워지는 三[삼] 천만 민족의 애국가 ── 오랫동안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감격에 찬 애국가가 아닌가!

「운옥이!」

선생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이었다.

「안돼요! 허 운옥이, 그 노랠 하면 안돼요!」

늙은 원장의 얼굴 빛이 종이장처럼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었다.

그러나「오르간」의 반주를 잃은 운옥의 노래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뒤를 이어 흘러 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서 원장과 윤 선생이 뛰어 올라가서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고 섰는 운옥을 다짜고짜 끌고 내려왔다.

예배당 안은 마치 벌의 둥지를 터쳐 놓은 것 처럼 떠들썩 했다.

윤 선생의 부축을 받아 강단 뒤에 달리 준비실로 끌리어 들어 가는 운옥의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선생님!」

준비실로 들어가자 운옥은 윤 선생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늑흐늑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운옥이, 이게 웬 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