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5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운명의 전야[편집]

1[편집]

「어젯밤에 친 길흉 점이 맞았나 보다.」

하였다.

「도라지 혼이 나를 돕나 보다.」

하였다.

술상을 채리는 운옥의 솜씨가 무척 가볍다.

집에는 들리지 않고 바로 동경으로 떠날 줄 알았던 영민이가 점심 때쯤 해서 아버지가 즐겨하시는 술 한 병을 들고 선뜻 대문 안으로 들어 섰을 때는 정말 운옥은 꿈결 같았다.

울바주 안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흰 종자 암탉이 얼른 운옥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니나 . 다를까 조금 있더니 어머니가 샛문을 열면서

「야 애기야, 그 흰 닭 잡아야겠다.」

그래서 불야불야 잡은 닭이었다.

술상을 차려 들고 사랑방으로 나가니 아버지는 술도 자시기 전에 벌써 반취나 된 것처럼 즐거운 안색이시다. 아들 옆에 바싹 다가 앉은 어머니도 이마의 주름살이 갑자기 편 것처럼 화안하시다.

아버지 앞에 꿇어 앉았던 영민이가 얼른 일어나 운옥이가 들고 들어 오는 술상을 받았다. 운옥은 눈을 내려 뜨고 공손히 술상을 받드렀다. 그러기 때문에 영민이가 어떠한 표정으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았는지 운옥은 알 수가 없었다.

운옥은 물을 닫으면서

「어머니, 진지 상은 안방으루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유쾌하게 굴러 나왔다.

「점심 상은 천천히 차려라. 오늘은 네 남편에게 술을 한 잔 권하겠다.」

영민을 가리켜 운옥의 남편이라고 부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운옥은 귀밑까지 빨개진 얼굴을 치맛귀로 가리우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 갔다.

얼굴이 확확 닳아 오고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다. 모두 신령한 도라지탑에 공을 드린 때문이라고 운옥은 생각한다.

「그이가 술을 먹는다?」

거위배를 쓰다듬어 재우던 五[오]년 전이 엊그제같건만……아아, 웃어 버리지 못할 세월의 흐름이여!

그지음 사랑방에서는

「아버지, 정말 전 못 먹읍니다.」

하고, 얼굴을 붉히며 굳이 사양하는 아들을 붙잡고 아버지는 억지로라도 한 잔 권해야만 마음이 편할 모양이다. 몇 잔 술에 얼굴이 뻘건 백 초시는

「흥, 그러믄 누구가 모를 줄 알구?……선생의 눈을 속여 가면서 술집에두 댕기구 기생 집에두 제법 출입한다든데, 뭘 그래? 내가 다 알구 있는 거야.」

그런 아들이 아닌 줄을 굳게 믿고 있는 백 초시기 때문에 이런 농담을 자연스럽게 배앝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

아니 그 보다도 제법 , 아들 노릇을 하느라고 술을 사들고 돌아온 영민의 성장(成長)이 무척 기뻤다. 갓난 영민을 품안에 넣고

「아가, 아가……」

하고 달래던 그 시절부터 백 초시는 이런 즐거운 풍경을 얼마나 골돌히 꿈 꾸었던고!

「원, 아버지두……」

영민은 얼굴을 붉히었다.

「얘, 어서 한 잔 받으려므나. 네가 술을 다 사들고 댕기게 됐으니 아버지가 오직이나 기쁘시겠니?」

그말에 영민은 잠자코 술잔을 받았다. 두 번째 입에 댄 술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뻐하시면 기뻐하실수록 영민은 점점 무서워 졌다. 더구나 자기를 가리켜 운옥의 남편이라고 분명하게 불러주신 아버지가 더 한층 두려웠다. 이렇게도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오늘 극도로 슬프게 하지 않으면 아니될 영민이기 때문에 ──

2[편집]

「거 술 한 잔 잘 하는군! 자아, 한 잔 더……」

「아버지, 정말 전……」

「일배일배(一盃一盃) 부일배(復一盃)라구 했어. 주도(酒道)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거든.」

영민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권하는대로 받아 마셨다. 가문 땅에 자우(慈雨)가 젖어 들 듯이 아버지의 너그러우신 애정이 술기운과 함께 영민의 마음을 흐뭇하게 적시었다.

어머니는 뼈다구에서 진살만 뜯어 아들에게 주면서

「거 먹을 줄두 모르는 술을 너무 권하지 말으우.」

「앗다, 웬 말이 이렇게 많어? 그래 五[오]십이 넘은 이 늙은이는 딱딱한 뼈다구만 빨란 말이요?」

그래서 또 한바탕 웃어 댔다.

좌석이 평화로우면 평화로울수록 영민을 괴로왔다. 계산에 넣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래 정말루 동경을 가겠느냐?」

말머리가 갑자기 돌아 간다.

「네. 가구 싶어요.」

「음 ──」

백 초시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가구 싶거던 갈 수 밖에…… 그러나 내 욕심으론 공부두 그만했으면 됐구, 이 탑골만 해두 어디 중학교를 마친 이가 몇 되느냐? 집에 나와서 가도나 돌아 보구……」

「…………」

「그래 왜 하필 동경이냐? 대학은 서울도 있구 한데……」

「서울선……서울선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하구, 식민지 교육이라 교육방침이 편벽해서……동경은 문화의 중심지구……」

「무슨 뜻인지 난 잘 모르겠다만, 동경 가믄 무슨 학굘 댕길테냐?」

「조도전 대학(早大)에 지원서를 넣습니다.」

「조도전대학 ── 관립이냐?」

「사립입니다.」

「사립 학교?」

「네, 사립입니다만, 아니 사립이기 때문에 진취의 기상과 자유의 정신을 길러 주고 학(學)의 독립(獨立)을……」

「그래 거기선 대한독립 만셀 불러두 붙들어 가지 않는다느냐?」

「하하……아버지두……」

「그럼 학의 독립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

「학문이라는 것은 아무 한테두 구속과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여쭈면 그 나라의 정치적 사상이라든가 경제적 환경이라든가 ── 그러한 것에 지배를 받지 않고 학문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독자적 입장에서……」

「너 어려운 말 많이 배웠구나?」

「말하자면 자유로히 비평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공부를 시키는 것입니다.

조선 학생에게는 이러한 비판력을 주지 않으려구 조선서는 당연히 보일 것을 보이지 않고 가르칠 것을 가르치지 않구……좌우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운 말처럼 교육을……」

「응, 맞았어. 네 말이 똑 맞았다!」

이처럼 믿음직한 아들을 눈 앞에 보는 백 초시는 마음이 여간 흡족하질 않다.

「좋다. 공부라는 것이 참 좋기는 좋구나!」

백 초시는 그러면서 무릎을 친다.

「그래 무슨 공불 할테냐?」

「법률공부를 하겠읍니다.」

「변호살 할테냐?」

「그건 해 보아야 알겠읍니다만 먼저 조선 사람은 법률적 양심(法律的 良心)을 길러야만 될 줄 믿습니다. 즉, 권리와 의무를 구별할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음 ── 옳다. 아 네 말이 옳아!」

백 초시는 삼룡이같은 무리를 머리에 그리며 무릎을 또 한 번 쳤다.

그때 어머니가

「그래 너 언제 떠나겠니?」

「내일 아침 떠나겠읍니다. 시험 날자가 급박해서요.」

「내일?……」

어머니는 입으로 놀라고 아버지는 안색으로 놀란다.

「너 그래두 식이나 올리구 가야지 않겠니?」

「…………」

「그리구 내일은 안된다. 내일 밤엔 운옥이가 야학을 졸업하는데 그래두 네가 있어야지. 글쎄 부인반에서 운옥이가 첫째란다, 첫째야.」

「…………」

3[편집]

저녁상을 치우고 자기 방에 들어와 앉은 지도 오래건만 영민은 안방에서 좀처럼 나오는 기척이 없다.

운옥은 방안을 깨끗이 치우고 빨간 모본단으로 선을 친 남빛깔 보료를 꺼내 아랫목에 펴놓고 웃목에도 따로이 수박색 비단 방석을 하나 적당한 자리에 놓아 두었다.

경대 위의 일력이 三[삼]월 十五[십오]일, 영민이가 쓰다 버린 연필 꽁지와 공책 부스러기가 조그만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운옥은 얼른 연필과 공책을 책상 밑으로 쓸어 넣었다.

「주제넘게 야학은 무슨 야학?」

자기를 싫어하는 영민이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하나의 재료가 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운옥은 오늘같은 날 입을 셈으로 아끼고 아끼던 다홍색 양단 저고리를 의 농 밑에서 꺼내 보았으나 과장된 분식(粉飾)이 도리어 소박한 영민의 감정을 해칠까봐 버선만 새것으로 갈아 신고 어젯밤 입었던 분홍 저고리와 검정 치마의 수수한 차림으로 경대 앞에 앉았다.

옅은 화장이 운옥의 갸름한 얼굴을 어여쁘게 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어여쁨이 아니고 쓸쓸한 어여쁨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영민의 얼굴이 중얼중얼 들리기만 하지, 문 여는 인기척이 통 없다.

「하기야 지나간 겨울 방학에두 무슨 시험준비를 한답시구, 열흘에 한 번두 들여다 보지 않은 이 방을……」

그리 쉽사리 들어서리라고는 운옥도 바라지 못한다.

「그러나 내일 아침 떠나신다면……」

아무리 무정한 사람이라도 한 마디 무슨 말이 없지 않으련만 하였다.

「야, 애기야.」

시아버지가 사랑방에서 쓰시던 람프에다 불을 밝게 켜들고 문을 열었다.

「이걸 켜라. 그리구 그 등잔은 이리 내라.」

「아버지, 괜찮아요.」

「글쎄 이리 내려므나.」

운옥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등잔을 내 드렸다. 방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고마운, 정말로 운옥에겐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시아버지였다.

들창 밖에 달이 밝다. 태극령 고개에 뻐꾹새 울음이 처량한 밤이다.

이윽고 안방 문이 열리더니 영민의 구두발 소리가 가까와 왔다.

「엑크!」

운옥은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 올라 온다. 무슨 죄를 진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에헴 ──」

기침을 하고 남의 집을 들어서는 것 같은 영민이었다.

영민은 아랫목 보료에도 앉지 않고 웃목 방석에도 앉지 않고 반다지를 등지듯이 하고 중간에 가만히 앉는다.

운옥은 조용히 일어나 보료 밑에 넣어 두었던 명주 바지 저고리에다 수박색 모본단 조끼, 같은 천으로 만든 대님과 허리띠, 그리고 옥양목 버선을 받쳐서 영민의 옆에 가만히 밀어 놓았다.

그렇다.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중학교 교복은 아무리 보아도 이 방에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러나 눈도 들떠보지 않는 영민이었다. 운옥은 다시 방석을 가까이 밀어 놓았다. 그래도 영민은 돌부처처럼 말이 없다.

운명의 전야(前夜)인 양 호수처럼 고주낙한 방안이다. 두 줄기 숨결만이 저으기 높아 간다.

「떠나기 전에 한 마디 말해 둘 것이 있어서 일부러 들렸소.」

「…………」

운옥은 후닥딱 놀래며 머리를 들었다.

4[편집]

마침내 영민은 입을 열었다. 호수처럼 고요하던 방안의 공기가 폭풍우처럼 무섭게 동요하는 순간을 운옥은 전신에 느끼며 대답 대신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나는 집에 들리지 않구 곧장 동경으로 떠날 생각을 했소만……그러나 그것은 너무 비겁한 행동같이 생각되어서……」

그 어떤 심각한 오뇌의 빛을 이마에 그리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씹는 듯이 무겁게 배앝는다.

「늙으신 부모를 생각해서라두 뵙구 가셔야지요.」

이상하게도 말문이 순순히 터져 나왔다. 지나간 六[육]년 동안, 어린 영민이가 무슨 실수나 하지 않을까고 두 손으로 고이고이 부축 하듯이 모셔 온 운옥의 어른다운 습성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말 등 뒤에는「그리구 이처럼 당신을 기다린 저두 만나 보셔야지요!」

하는, 가벼운 원망이 숨어 있는 줄을 영민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두 있었소.……그러나, 아니 그 보다도 나에게는 좀더 절박한 문제 ── 좀더 심각한 번민이 있는 것이요.」

무섭게 긴장된 영민의 표정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억센 한 일자 모양으로 굳게 닫쳐지는 그 입술이며 마즌편 벽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는 그 이글이글한 눈동자며……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있구나!」

운옥은 불현듯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민의 사람된 품을 시부모와 똑같이 굳게 믿고 있는 운옥이기 때문에

「설마……」

하는 생각이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비스듬히 꿇어 앉아 방바닥에 묻은 무슨 새까만 티를 손가락으로 빡빡 문질르고 있던 운옥은 살며시 머리를 들어 영민의 얼굴을 대담하게 바라보며

「무슨 심상치 않은 근심이 계시나요?」

그러나 영민은 숨결만 높다. 좀처럼 쉽사리 말을 열지 못한다.

「무슨 근심인지?……혹시……」

하고, 운옥은 망설이다가

「혹시 제 힘으루두 될 수 있는 일이나요?」

하고 물었다.

운옥은 영민이가 애처로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마 지나간 六[육]년 동안 있는 정성을 다하여 물을 주고 북을 주어 가꾸고 길러 온 뜰안의 한 포기 화초같은 영민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영민이가 오늘날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해 나가지 못할 그 어떤 커다란 근심으로 말미암아 저처럼 고민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때, 정말 자기 힘으로 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못하랴 하였다.

「당신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냐고요?」

영민은 그러면서 시선을 옮겨 운옥을 바라보았다. 그순간 어째 그런지 자기를 바라보는 영민의 눈동자가 무서운 속도로 오들오들 경련을 일으킨 것 같이 운옥은 생각되었다. 정녕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예, ── 저 같은 사람의 힘으로래두 될 수만 있는 일이래믄……」

배가 아프다고 해서 하룻밤을 쓰다듬어 재운 귀여운 사람이 아니었던가!

무엇인들 못하리, 무엇인들 못하리! 그 어떤 가장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깨달으며 운옥은 미친 듯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렇소. 당신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요.」

「좀더 똑똑히 말씀을 해 주셔요. 제 힘으로 되기만 한다믄야……」

「그렇다면……정말 그렇다면 내일부터 나를……나를 남편 될 사람이라고 생각질 마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