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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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이력서[편집]

1[편집]

여기는 청량리 역 근처 어떤 약방 안이다.

가제 뭉치와 붕산 봉지를 사 들은 운옥이가 주인을 향하여 그리구 「 미안하지만 전화 좀 빌려 주실수 없을까요?」

「네, 어서 쓰십쇼.」

주인은 너그럽게 대답하며 조제실 앞에 놓인 전화를 운옥의 곁으로 떠밀어 준다.

「미안합니다.」

운옥은 그러면서 수화기를 들어 광화문통 김 준혁 외과를 불러 냈다.

「거 누구야? 경숙이야?」

「아, 운옥 언니 아니유?」

운옥을 친 언니처럼 따르는 간호부 경숙의 목소리가 반갑게 굴러 나온다.

「그래 언니 얼마나 적적하슈, 혼자서?」

「뭐 괜찮어. 파출부 노릇두 가끔가다 해보긴 해야겠어.」

「언니, 무슨 로맨스 생겼수?」

「경숙이두 참……. 나 같은 올드 미쓰를 누가……」

전화통 앞에서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조제실 안에서 약을 달구는 주인을 운옥은 힐끗 쳐다보았다.

「언니, 나하구 헌 약속 잊음 안돼요. 일생을 수녀(修女)처럼 깨끗이 지나자던 그 약속 말야요.」

「잊긴 왜 잊어? 경숙이두 무척 신경질이야.」

「딴 사내와 교젤 함 난 죽을테야. 언닐 죽이구 나두 죽을테야! 그런데 언니.」

「응?」

「난 요새 잠 못 잔다우. 언니 품안이 그리워서… 언니, 인제 며칠이나 더 있음 되우?」

「환자의 경과가 무척 좋아서 연내엔 병원으루 돌아 갈 것 같애.」

「그럼 정초엔 우리들과 같이 놀게 되우?」

「응, 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될 것 같애. 그런데 선생님 계시냐?」

「잠간만 기다려요. 지금 병실에 계신데……」

하고, 쿵쿵 발 소리가 나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뛰어 돌아오며

「아차차, 언니 잊어 먹은 게 있구려. 중대한 보골 그만 잊어 먹을 뻔 했어요.」

「중대한 보고?……」

「응, 무척 중대한 보고!」

「어서 이야길 해 봐. 난 좀 무척 바쁜데……」

「저 다른게 아니구……선생님이 말이야. 언니가 곁에 없어서 무척 불편하신 모양이야요. 말은 안하셔두 얼굴에 써 붙인걸 뭐.」

「너희들이 있는데 뭐가 불편하시겠니?」

「공연히 짜증만 내구……허긴 그렇지 뭐예요? 언니 간호부라기 보다두 친절한 가정부니까 뭐. 그러니까 그 점두 약속 잊음 안돼요. 난 정말 죽을 테니까 ──」

「경숙이가 요즘 히스테리에 걸렸나봐. 어째 사람을 그처럼 못 믿어서야……」

「그럼 언니 믿어두 되우? 난 누가 꼭 언닐 잡아 갈 것만 같애 못 견디겠우.」

「요것이 무척 바가지야!」

「바가질 너무 긁다간 쫓겨날 게 무서워서 그럼 선생님 대 드릴께요. 난 옆에서 무슨 이야길 하나 다 들을테요. 그런줄 알어요!」

경숙의 발자국 소리가 쿵쿵쿵 멀어져 갔다. 무엇인가 애뜻한 한 줄기 감정이 운옥의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 간다.

쓸쓸해 하는 경숙이도 위로해 주고 싶었고 불편해 하는 김 준혁 박사도 거두어 주고 싶었고 또 지금 자기가 맡은 환자 ── 다리에 총상을 받고 신음하는 청년의 뒤도 돌보아 주고 싶었고 ── 운옥은 자기의 몸이 단 하나인 것을 순간 슬퍼하였다.

2[편집]

이윽고 쿵쿵쿵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김 준혁의 굵다란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나왔다.

「선생님이세요? 저 운옥입니다.」

「아, 얼마나 고생이시요? 파출부란 그리 편안한 일은 아니니까 ──」

「그동안 선생님, 얼마나 불편하셨어요? 선생님의 뒤를 잘 거두어드리라 구경숙에게 여러 번 일르구 오긴 했습니다만……」

「모두 나이 어려서……그런데 환잔 좀 어떤가요?」

「경과가 아주 좋아요. 연내로는 넉넉히 걸어 댕기겠어요. 지금두 변소 출입은 자유로히 하니까요.」

「음 ── 하여튼 보통 환자로 취급해서는 안돼요. 운옥을 특별히 보낸 것두 그때문이니까.」

「네, 저두 잘 알고 있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데 누가 환잘 찾아 오는 사람은 없는가요?」

「없어요. 신 성호씬 가끔 찾아 오시지만두……」

「음, 잘 알았오. 운옥이두 몸조심 잘 하시요.」

「네, 고맙읍니다. 그럼 이만 그치겠어요. 안녕히 계십시요.」

운옥은 전화를 끊고 주인에게

「미안합니다. 전화가 너무 길어서……」

「괜찮읍니다.」

운옥은 약방을 나섰다.

아침부터 흐리던 날씨가 오정을 지날 무렵부터 희득희득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인젠 제법 하늘이 하므룩해 졌다.

그 해도 거의 저문 섣달 중순 ── 미일전쟁 만 一[일]년을 마지한 전시 풍경이 이거리 저골목에서 일종의 살기를 띠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무섭게 억누른다.

지원병이 대오를 지어 의기양양한 듯이 나팔소리도 높다란이 운옥의 옆을 지나간다. 눈 오는 거리에서 날뛰며 놀던 조무래기들이 그 귀여운 조갑지 같은 조그만 손을 들고

「반자이(만세)!」

를 불러 준다.

운옥은 그 조무래기들이 가엾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불쌍한 애들! 조국을 모르는 그 가엾은 영혼! 저 애들에게 동해물과 백두산의 그 거룩한 노래를 가르쳐 주었으면……」

그순간 운옥은 문득 까아맣게 살아졌던 지나간 날의 낡은 기억이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자장가인 양 운옥의 귀 밑에 입을 대고 불러 주시던 「동해물과 백두산」

── 나라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아버지의 그 송죽 같은 절개여!

아니, 동해물과 백두산은 좀더 생생하고 가슴 아픈 기억을 짜아 낸다. 四 [년] 전 ── 탑골동 예배당 ── 야학원 졸업식날 밤 ──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던 그 스테 ─ 지 ── 슬픔의 절정에서 흐늑흐늑 느껴 울던 자기의 젊고 애달픈 영혼이 운옥은 무척 가엾었다.

「아아, 그리고 그 저릿저릿하게 무섭던 태극령 고개의 달밤……」

눈 내리는 거리를 회기리 쪽으로 허둥지둥 거닐면서 운옥은 잊어버리려 애를 쓰던 지나간 四[사]년간의 고달픈 이력서(履歷書)를 마음속으로 살그머니 펼쳐본다.

「구겨진 이력서! 찢어진 이력서!」

운옥은 입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3[편집]

그렇다. 가시 많고 상처 많은 운옥의 과거였다.

四[사]년 전 그날 ── 날이 채 밝기 전에 탑골동을 떠난 운옥은 도중 공동묘지에 올라 아버지 산소에 하직을 하고 낯설은 도시 평양 성내로 들어 왔다.

외가켠으로 먼 친척이 되는 이가 외성서 산다는 기억을 더듬어 이틀이나 찾아서 들어 갔다. 거기서 얼마를 지내다가 어차피 곁붙이 살림을 할 바엔 오히려 남의 집 식모살이가 훨씬 마음 고생이 덜 할 것 같애 연줄을 더듬어 들어간 것이 서문통 거리에 있는 어떤 조그만 병원이었다.

거기서 운옥은 얼마동안 식모살이를 하다가 원체 용모가 깨끗하고 사람 됨이 얌전하다 하여 주인 마누라는 운옥을 침모로 승격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간호부들의 눈에도 들어 병실을 거두고 진찰실을 치우고 가끔 가다가는 간호원들이 할 일을 운옥이도 하게 되었다.

침모에서 또 간호부로 승격된 셈이었으나 그러나 거칠은 세상의 물결은 운옥으로 하여금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지를 않았다.

五十[오십]이 넘은 원장이 어느날 밤, 연회로부터 늦게 돌아오자 운옥의 방으로 들어 갔다. 새우처럼 꼬부리고 고달피 잠든 운옥은 가슴 위에 그 어떤 압박감을 느끼며 눈을 번적 떴다. 구역질 나는 술 냄새가 확확 풍기는 주름살 진 얼굴이 바로 자기 눈 앞에 있었다. 운옥은 놀래어 그 짐승 같은 늙은 얼굴을 힘껏 떠밀며 고함을 쳤다. 원장은 당황히 나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 운옥은 말없이 병원을 떠났다. 그러나 갈 곳이 없는 운옥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노자를 털어 여관 밥을 사 먹고 있는 동안, 식비가 떨어지자 하는수 없이 여관집 부엌을 드나들게 되었다. 거기서 식모로 또 얼마 동안을 지나다가 연줄을 얻어 경상리 어떤 호화로운 집 침모로 들어 갔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그것은 염집이 아니고 기생네 집이었다. 기생 어머니는 운옥의 용모를 보자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놀음 놀이나 나가 보는게 어떠냐?」

하였다. 그러나 그만한 것은 참을 수도 있었다.

손님이 하룻밤에 겹쳐 들 때, 나중 온 손님을 기생 어머니는 운옥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무서운 세상을 운옥은 샅샅이 보았다. 마침내 운옥은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올라 왔다.

아니, 운옥이가 평양을 떠난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박 준길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바람 결에 들은 때문이었다.

애국가를 부른 사상범으로서, 그리고 박 준길을 죽인 살인범으로 쫓겨 다니던 운옥으로서는 살인죄만은 면한 셈이었다.

그러나 운옥은 살인죄를 범한 것 보다도 한층 더 박 준길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무서워 하였다. 평양서 어물어물 하다가는 박 준길을 딱 길거리에서 만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에도 그러나 운옥을 위한 안식처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제일로 손쉬운 박물장사를 시작했으나 그것이 여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를 상대로 하는 장사인 줄을 알자 운옥은 앞길이 캄캄하였다.

그럴 즈음에 광화문통에서 방금 개업을 한 김 준혁 외과 앞에

「간호원 모집 ── 경험 없는 사람도 좋소 ──」

한 광고를 본 운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