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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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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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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경험이 없는 운옥이도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도 운옥의 진실함과 총명함이 김 준혁 박사를 저으기 기쁘게 하였다. 나이도 듬직하고 까불러만 대는 다른 간호원들에게 비하여 믿음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 무척 좋았다.

그리고 결과로 보아서 김 준혁 박사는 그 이상의 것을 운옥에게서 발견하 였던 것이다.

일 년도 못되어 운옥은 간호원으로서의 충분한 기술과 자격을 갖게되어 적어도 김 준혁 병원에서는 없어선 아니될 중요한 멤 ─ 버의 한 사람임을 자타가 인정하게 되었다.

김 준혁은 회계 까지를 운옥에게 맡겼다. 단지 병원의 출납만이 아니라 아직 독신인 김 준혁의 가계(家計)를 포함한 그것이었다.

「선생님이 얼마나 불편하실까?……」

운옥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기 손을 기다리는 병원의 이구석 저구석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운옥을 파출부로 보내지 않으면 아니될만큼 김준혁은 다리에 총상을 받은 그 환자를 위하는 것이 운옥에게는 알 것 같기도 하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열흘 전 어떤날 밤, 김 준혁과 친지간인 신 성호가 외인편 다리에 총상을 받은 어떤 청년을 병원으로 데리고 왔었다. 때마침 다른 간호부들은 모두 영화 구경을 가고 병원에는 운옥이 혼자 남아 있었다.

간단한 수술로서 총알을 빼내고 운옥이가 환자의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안 신 성호는 김 준혁을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 한참동안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과하지는 않았으나 보통 같으면 당연히 입원을 시킬만한 상처였다. 그러나 신 성호가 다시 환자를 데리고 가버린 후, 김 준혁은 운옥에게 그런 환자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김 준혁은 운옥을 파출부로서 청량리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신중히 하고 비밀히 하라는 간곡한 당부와 함께 ── 웃 사람이 이르는 분부를 뒤적거려 보려하지 않는 운옥이기 때문에 운옥은 성심성의로 파출부로서의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운옥은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는 모퉁이 가개로 환자에게 줄 사과를 사려고 옷에 묻은 눈을 털면서 들어섰다.

그즈음 그 골목으로 한참 들어 가다가 바른편 검은 널판자로 답담을 한 기와집 뜰아래 방에서는 지금 방금 찾아온 신 성호가 과일 꾸레미를 장 일수 앞에 내 놓으면서

「태평통서 예까지 두 시간 걸려서 왔네, 두 시간 ──」

자리에 들어누운 장 일수는 꾸레미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사과를 한 개 집어서 깎을 생각도 않고 와작와작 깨물어 대면서

「거 맛 좋은걸.」

신 성호는 칼을 꺼내 사과를 깎으며

「땅개가 종시 날 찾아 왔다는 말이야.」

「땅개가?……」

「옴, 땅개가 ──」

「언제?」

「바루 오늘 ──」

장 일수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눈을 번적거리며

「그래 찾아 와서 뭐라구 허는 거야?」

「날 동 떠 보려는 거지 뭐야? 자네 거처를 필시 내가 알 것이라구 ──」

「왜 이리 좀 모시구 오지 않구?」

그러면서 장 일수는 유쾌한 듯이 자꾸만 사과를 씹어 댄다.

「자네를 놓쳐버려서 땅개가 이를 갈면서 분해 하데.」

신 성호는 거기서 오늘 최 달근이가 출판사로 찾아 왔더라는 이야기를 쭉하고 나서

「그런데 땅개가 내 뒤를 톡톡히 따르거든. 땅개는 내가 자네 거처를 아는 것 같은 눈치어서 어젯밤에는 내 하숙으로 와서 내 설합을 몰래 뒤져보았다는 말이야.」

「허어, 그래서?」

장 일수는 자리에 누운채 사과를 와작와작 깨물며 흥미로운 얼굴로 묻는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돌아 갔는데, 오늘 갑자기 출판사로 나를 찾아와서 자네의 거처를 아느냐고 묻는단 말이야. 그래 알 리가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 편에서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오 창윤의 집에서 자네를 만났다가 놓쳤노라구……」

「음 ──」

「그런네 작자가 나를 감시하기 위하여 부하를 한 놈 내 꽁무니에다 매달아 놓았단 말이야.」

「그래 자네 뒤를 따르던가?」

「따르다 마다! 내 뒤를 졸졸 따라 댕기는데, 그 놈을 떼 노라구 여기까지 두 시간이나 걸려서 왔네. 그런데 우스운 것이 이 자식이 하필 왜 외눈깔이야.」

「외눈깔……」

「외눈깔이구 보니 멀리서 봐두 판연하거든. 저루선 내가 자길 몰라보는 줄 알지만……나 참 애꾸 눈일 두 시간이나 꽁무니에 달구 댕길래게 진땀뺐네.」

그러면서 신 성호는 지갑에서 백 원 짜리 다섯 장을 끄내 장 일수의 벼개 밑에 쓸어 넣었다. 어젯밤 명월관에서 춘심이 한테 받은 것이다.

「늦어서 미안하네. 그동안 퍽 고생스러웠지?」

자네 그 돈 또 어디서 났나?」

말은 비록 대수롭지 않은 장 일수였다. 그러나 그 빙글빙글 웃는 얼굴 한편 구석에는 친우의 그 따사로운 배념(配念)을 깊이 호흡 하려는 정의 세계가 알알히 떠 올랐다.

「다 나오는 데가 있는거야.」

「자네 협잡은 안했겠지?」

「협잡?……하하하……협잡과 비슷두 하지.」

춘심의 얼굴이 눈 앞에서 아물거린다. 춘심의 그 빨간 입술이 「화류계란 그런 게야, 그런 거래두!」하며 자기 입술에 미친듯이 달려들던 어젯밤을 생각한다.

「협잡과 비슷하다?」

「괜찮어. 어떤 돈 있는 늙은이가 어떤 여인의 젊은 몸둥일 손에 널려구 내놓은 미끼다.」

「그래 그걸 또 자네가 가로 챘다는 말인가?」

「하하하, 말하자면 그렇게 됐네만……그러나 이런 돈은 자네 같은 사람이 당연히 써야할 돈이거든. 그러니까 염려말구 쓰게. 모자르면 내 얼마든지 가져 오마.」

「허어, 보와하니 사정이 좀 복잡한 것 같으네 그려?……자네 그 젊은 몸뚱일 가진 여인을 사모하지 않나?」

그때 신 성호는 갑자기 표정을 가다듬으며

「장군, 이 돈이 어서 나온지를 이야기 할까? ── 군이 저번날 밤 찾아갔던 바루 그 오 창윤의 손에서 나온 돈이야. 알겠나?」

「오 창윤?」

장 일수도 어지간히 놀랬다.

「이야길 하면 춘심의 말투로 일장춘몽일세!」

하며 어젯밤의 이야기를 신 성호는 쭉 했다.

춘심이를 오 창윤에게 빼앗겼다는 신 성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장 일수는

「핫, 핫, 핫……」

하고, 한 번 웃고 나서 거 안됐네 그려 그러나 「 . 춘심이의 심경이 그러 하다니 어쩔수 있겠나?」

「응, 어쩔수 없지. 화류계란 모두 그런거래.」

「누가 그러던가?」

「춘심이의 고 새빨간 입술이 그러데.」

「흥, 그만 했으면 춘심이 년도 상당하이.」

「음, 상당하데.」

「자네 같은 미남자두 툇자를 맞을 때가 있네그려.」

「미남자는 연애의 조건은 될지 몰라두 결혼의 조건은 못 되나부데. 아아, 돈, 돈, 돈, 돈, 돈…」

그러면서 신 성호는 팔고비를 베고 장 일수 옆에 번듯 누워 버렸다.

「콘사이스.」

「응?」

「자네, 쓸쓸한가?」

「한없이 쓸쓸하이!」

「흥, 오 창윤이가 내 사랑하는 콘사이스를 이처럼 못 살게 군다는 말이지?」

오 창윤의 그 굵다란 목덜미를 장 일수는 눈 앞에 그려 본다.

「콘사이스.」

「응?」

장 일수는 신 성호의 목을 끌어 댕기며

「내 춘심이 대신에 키쓰를 한번 해 주마.」

「아이구 맙수사!」

신 성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자네의 그 소 도둑놈 같은 얼굴과 한 번 의논을 해 보았나?」

하면서, 운옥이가 사용하는 조그만 손 거울을 장 일수 얼굴 앞에 갖다 댔다.

「하, 하, 하……」

장 일수는 유쾌하게 웃어대며

「콘사이스, 자네 여자의 대명사가 무엇인지 아나?」

「오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노오, 노오!」

하고, 장 일수는 신 성호의 말투를 흉내 내며

「여자란 언제든지 거울과 같이 다니는 동물이야.」

「여자가 있는 곳에 어찌 거울이 없을수 있으랴! 그 말인가?」

「옳지, 옳지.」

「자네, 이 거울의 임자와 한방에 있으면서 무척 행복한 모양 같은데 ……」

「그건 또 무슨 의민고?」

「얼굴을 보면 모를 일도 알 법 하거든.」

「그건 자네의 오해구……그것과는 다른 의미에 있어서 사실 운옥씨는 온갖 아름다움을 한 몸에 갖춘 여인이라네. 전형적인 조선의 어여쁜 아내가 될 사람이야.」

「허어, 이건 최상급의 찬송일걸.」

그러다가 신 성호는 문득 말머리를 돌리며

「아, 참 백 영민에게서 엽서가 왔는데, 이번 동경 들어갈 때엔 꼭 서울에 들리겠다구 ──」

그러면서 아까 출판사로 온 영민의 엽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 꼬마가……?」

장 일수도 일어나 앉으며 엽서를 반가이 들여다 본다.

「음, 이거 참 반가운 일인걸! 졸업은 언젠고?」

「내년 봄일껄. 지난 가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신문 발표가 있었다네.」

「꼬마가 변호사가 된다! 음, 교문을 등진 후론 한 번두 못 봤는데…… 무척 변했을걸.」

「졸업식날 밤, 자네 하숙에서 송별주를 마시고 모란봉 아래를 산책하던 생각 안나나?」

「음, 땅개네 패와 한바탕 했었지!」

감개무량한 듯이 장 일수는 담배만 퍽퍽 피운다.

「어서 쾌차해서 꼬마가 올라오면 우리 한 번 밤새껏 마셔 보세.」

「그래 한 잔 먹세.」

그때 대문이 열리며 약을 사들은 운옥이가 눈을 털며 뜰안으로 들어섰다.

「아이, 신 선생님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