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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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정열[편집]

1[편집]

넓은 두 간 방 ── 아랫목을 장 일수가 차지하고 웃목을 운옥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환잘 혼자 내버려 두구 어딜 댕기십니까?」

「파출부두 가끔가단 산볼 좀 댕겨야죠. 밤낮 환자하구만 마주 앉아 있으믄 우울하지 않아요.」

장 일수는 빙글빙글 웃으며

「운옥씬 시인이니까, 눈 오는걸 보구 뛰쳐 나갔어.」

「장 선생님두……어디 제가 나갈 때 눈 왔었나요?」

웃목과 아랫목 사이에 비록 미닫이는 없었으나 그러나 두 젊은이는 마치 무슨 미닫이나 있는 것처럼 방 한가운데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그어 놓은 것 같은 생활 태도였다.

아랫목에는 주로 장 일수의 물건이 놓여 있었고 웃목에는 주로 운옥의 잔 자부런한 생활 도구가 놓여 있었다.

운옥은 조용히 웃목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며 책보를 끌렀다.

「뭐 맛나는 것 사 오셨읍니까?」

신 성호는 보자기를 끌르는 운옥의 흰 손가락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신 선생이 사괄 사 오셔서 마침 잘 되었어요. 저두 사괄 살려구 들어 갔었죠. 그랬더니 모두 언 것밖에 없드군요. 감 사 왔어요.」

「거 마침 잘 됐군요. 어디 하나 시식 할까요?」

「어서 잡수세요. 아이, 붕산이 모두 쏟아 졌네.」

붕대와 붕산 봉지를 따로 내놓고 보자기채 앞에 다 밀어 놓았다.

「너무 오래 앉아 계시믄 다리가 피곤 하실텐데 ─」

운옥은 파출부로서의 임무를 잊어버리는 순간이 없다.

「처음엔 약간 피곤을 느꼈지만 요샌 괜찮읍니다. 달음박질 이라두 할 것 같은 데요.」

「호호, 달음박질을……정말 어서 나셔서 달음박질을 하셔야지.」

신 성호는 입맛을 다시면서

「거 감 맛 나는걸.」

「많이 잡수세요. 장 선생님 병문안 오시는 건 선생님 혼자 뿐이신데 ── 」

그때, 장 일수도 감을 하나 골라 쥐며

「어디 나두 한 개 먹어 볼까?」

하는 것을 운옥은 막으며

「아이, 가만 계세요. 깎아 드릴께요. 몸두 충실치 못하신데 껍질채 잡수시면 소화불량에 걸리기 쉽답니다.」

「뭘요.」

하며, 입으로 가져 가는 장 일수의 손에서 감을 빼앗는다.

「허어, 거 참 성실한 간호원이신 데요!」

하고, 신 성호는 웃는다.

「그게 제 직분인데요 뭐. 그리구 환자를 소홀히 하면 선생님이 꾸중을 하신답니다.」

그러면서 운옥은 웃는 얼굴을 다소곳이 숙이고 감을 깎기 시작하였다.

창 밖에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

방바닥에는 먹다 남은 사과 몇 알과 사과 껍질, 사과 속, 사과 봉지, 감봉지가 너저분하게 널리 있다.

장 일수가 읽고 난 영민의 엽서도 함께 사과 껍질 사이에 놓여 있었다.

감을 깎는 운옥의 희고 날씬한 손가락 사이로 길게 달려 내려오는 감 껍질이 무감각하게도 영민의 엽서 위에 도사리며 떨어진다.

그렇다. 너무나 감각이 없는, 그리고 너무나 무심한 감 껍질이었다.

운옥은 열심히 감을 깎는다.

이윽고, 사과 껍질 사이로 반만큼 남았던 엽서는 손가락 사이로 연달아 떨어지는 감 껍질로 말미암아 완전히 씌워 버리고 말았다.

「자아, 잡수세요.」

운옥은 깎은 감은 장 일수에게 공손히 주었다.

2[편집]

「제가 칠게 그냥 두세요.」

신 성호는 갈 임시에 너저분하게 널린 사과 껍질, 감 껍질을 모아 신문지 봉지에다 꽁꽁 싼다.

「아이, 신 선생님 그냥 두시래두.」

운옥의 만류를 굳이 물리치면서

「운옥씬 어서 장군의 간호나 톡톡히 하십시요. 이 방에 들어서면 똑 신혼 부부의 살림방 같아서……인젠 아예 안올 작정입니다.」

감 껍질과 함께 백 영민의 엽서도 께묻혀 봉지 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신 선생님두……?」

운옥의 얼굴이 빨개 진다. 당황한 눈초리가 멎을 곳을 찾지 못하고 일순간 허공중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신군, 그런 말을 하려면 정말 인젠 오질 말게. 농담두 상대자 여하에 따르는 것이니까!」

의외에도 장 일수가 얼굴을 가다듬었다. 빙글빙글 웃을 줄로만 생각했던 장 일수의 얼굴을 신성호는 후닥딱 놀래며 덤덤히 바라보다가

「아, 취소, 취소!」

하고, 머리를 긁으면서 밖으로 뛰쳐 나갔다. 구두를 신으면서 쥐었던 신문지 봉지를 마루 밑 아궁지 앞에 던지고 일어선 신 성호의 얼굴이 이번에는 운옥의 얼굴 보다도 한층 더 빨개졌다.

「신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문 밖까지 전송을 나온 운옥에게 신 성호는 대답조차 못하고 도망 하듯이 사라져 버렸다.

「운옥씨, 신군의 실언을 용서 하시요.」

그러나 운옥은 대답이 없이 마루 끝에 놓인 걸레를 갖고 들어 와서 실과즙이 떨어진 방 바닥을 닦기 시작하였다.

「빠드닥 빠드닥 ──」

소리가 나도록 무척 힘을 주어 닦는다. 방 바닥을 닦는 것이 자기의 천직인 것처럼 성심성의로 닦는다.

장 일수는 운옥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거기에는 웃음도 없는 대신 불행도 없었다.

「신군은 본래부터가 그러한 경솔한 친구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실언입니다. 소년처럼 순진한 청년 ─── 운옥씨 인사에 대답도 못하고 달아나버리는 신군을 용서 하시요.」

「어서 누우세요. 피곤하실텐데 ──」

운옥은 걸레를 마루로 내놓고 장 일수의 자리에 손질을 한다.

「운옥씨,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해서 파출부의 방을 따로 내드리지 못한 저를 꾸짖어 주시요.」

「그런걸 뭘 다 걱정 하시나요. 병이 더치믄 어떻거시려구?」

운옥은 끝끝내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었다. 신 성혼들 악의가 있어서 그랬으랴만 그러나 신 성호의 실언을 용서하는 순간, 운옥은 영민에게 커다란 죄악을 범하는 것 같았다. 영민을 한없이 모욕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운옥 자신이 모욕을 받는 것은 좋았다. 그것은 넉넉히 참을 수 있는 운옥이었다.

밤이 왔다.

붕대를 교환하고 장 일수와 허 운옥은 보이지 않는 미닫이를 사이에 닫치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장 일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고 하였다.

어젯밤까지도 적어도 표면으로는 평온한 잠자리였다. 환자와 파출부와의 평범한 잠자리였다. 무풍지대의 연못처럼 평온한 잠자리에 신 성호는 그만 부질없는 돌을 던졌던 것이다.

파문은 퍼지기 시작하였다.

「신혼부부의 살림방 같다 ──」

좋건 싫건 이 한 마디가 두 젊은이의 신경을 긁어 쥐었다.

3[편집]

창 밖에 눈이 멎지 않고 내린다. 소리없이 폭폭 쌓이는 눈이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기나긴 겨울 밤이다.

지나간 四[사]년 동안, 눈 내리는 겨울 밤이면 사념의 실마리는 운옥으로 하여금 머나먼 옛날로 다자구 끌고 가군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두 오늘처럼 눈 오는 겨울 밤이었다. 거이 배가 아파서 울어대는 어린 영민의 배를 밤새도록 쓸어 새운 그날밤 ──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의 애처로운 이야길 그이에게 들려주던 그날 밤……」

운옥도 잠을 못 이루고 뒤채기 시작하였다.

「전등을 가리울까요?」

운옥은 머리를 돌려 벽을 향하여 누은 장 일수를 살그머니 돌아다 보았다.

「아직 안 주무셔요?」

장 일수는 벽을 향한채 그렇게 물었다.

운옥은 일어나서 방공갓을 절반쯤 내리웠다. 방바닥에 둥그런 원이 그려졌다. 운옥은 다시 이불을 쓰고 누웠다.

그리고 또 얼마동안 ── 죽은 듯이 고요한 방안에는 두 줄기의 숨소리만이 가늘게 들릴 뿐이다.

「운옥씨 ──」

장 일수가 벽을 향한채 그렇게 불렀다.

「………」

그러나 운옥은 대답이 없다.

「운옥씨!」

「………」

장 일수의 거치러운 생활은 여자를 몰랐다. 불덩어리처럼 타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자나깨나 조선 사람, 조선 민족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총알이 날아가고 칼날이 번쩍이는 그 밑을 이 젊은 혁명가는 단 하나 조선 민족의 혼백을 품고 날( )면 그만이었다.

그는 일찌기 따사로운 가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의 과거에 만일 여성이라는 존재가 개입 할수 있었다면 그것은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먹어치우 듯이 밖에 대한 적이 없었다.

「운옥씨 주무셔요?」

「………」

그러한 이 젊은 혁명가가 운옥을 알고부터 가정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세상의 뭇 사나이가 어째서 일생을 평범한 가정속에서, 평범한 온돌방에서 지내다 죽는가를 장 일수는 비로소 안 것 같았다.

「타락이다!」

장 일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것은 벌써 혁명가로서 타락의 제일 보를 내짚는 것이라고 장 일 수는 생각하면서도 눈을 감으면 운옥의 얼굴이 자꾸만 보였다.

지금까지 장 일수가 보아온 여성이란 모두가 남성에 가까운 중성(中性)의 여자였다. 혁명가들 가운데도 여자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태반이 이름만이 여자였다.

「운옥씨!」

「………」

참다운 조선의 여성, 조선이 가질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장 일수는 파출부 허 운옥에게서 비로소 발견하였던 것이다.

「운옥씨!」

하고, 장 일수는 벽을 향해 누운채 힘있게 불렀다.

「………」

「나는 이젠 간호원이 필요치 않읍니다. 운옥씨 덕택에 나는 충분히 내 한 몸을 제 손으로 지탕하리 만큼 건강이 회복 되었읍니다. 내일 아침 운옥씨는 병원으로 돌아 가시요.」

장 일수의 폐부를 뚫고 나오는 실로 괴로운 사랑의 고백이었다.

「나는……내일부터 파출부를 해고(解雇)하겠읍니다!」

「………」

운옥은 끝끝내 대답이 없이 오리오리 찢어진 자기의 이력서를 다시 한 번이 불 속에서 가만히 처음으로 펼쳐 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음이 약하면 「 큰 일을 못 한다구 ── 제 돌아 가신 아버님께서 늘 말씀을 하셨답니다. 주무세요. 주무시구 날이 밝으면 다시 마음이 강해 질 테니……」

「………」

이번엔 장 일수 편에서 대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