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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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아니언만[편집]

1[편집]

이튿날 아침, 운옥은 일찌기 일어나서 자리를 개었다.

「밤새 춥지 않으셨나요?」

「좀 춥던데요.」

「어서 누워 계세요. 나가서 불 좀 살려 놓고 들어 올께요.」

「그냥 두세요. 후에 주인 할머니 더러 때라지요.」

「괜찮어요. 제가 때죠.」

「미안합니다.」

주인 할머니가 식사도 해 오고 불고 때 주곤 하였다.

「타락이다. 혁명가의 타락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루 밑에서 장작을 살리는 운옥의 인기척을 장 일수는 향그럽게 연상을 한다.

「눈이 한 자나 왔어요.」

그러면서 운옥은 아궁이에 장작을 챙겨 넣고 감껍질을 싼 신문지 봉지를 터쳐서 장작 밑에 꾸겨 넣었다. 그리고는 성냥불을 켜 댔다. 가늘하게 팬 장작개비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아이 그대루 두시우. 내가 때 드릴께요.」

그때야 안방에서 주인 할머니가 나온다.

「괜찮어요, 할머니. 눈이 어찌두 고운지! 글쎄 한 자나 왔어요.」

「내년엔 풍년이 들을래나 보우.」

할머니는 드르랑 부엌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제법 불길이 욹욹 한다.

운옥은 아궁이 앞에서 불을 쪼이면서 탈골동에 한채 밖에 없는 청기와집 넓은 부엌을 생각한다.

어린 영민이가 아직 자리 속에서 콜콜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 흡족한 마음으로 아궁이 앞에서 밥을 잦치던 아득한 기억이여!

불길이 세어 졌다.

운옥은 아궁이 앞에 너저분하니 널려져 있는 사과 껍질 감 껍질을 쓸어 넣어도 넉넉히 타버릴 수 있는 화력을 보았다. 운옥은 부지깽이로 실과 껍질을 하나씩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다가 문득 실과즙에 글씨가 번진 엽서 한 장을 발견하였다.

「백……영……민……?」

운옥은 눈을 부릅뜨며 엽서를 집었다. 분명히 탑골동 주소가 아닌가!

「아, 그이로구나!」

멍하니 엽서를 들여다 본다. 정신 없는 사람 같다.

「이게 꿈이 아닐까?……」

운옥은 가슴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온 몸이 화악하니 닳아 올라온다. 그것은 실로 운옥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놀라움인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신 선생과 그 분이……?」

꿈이뇨, 생시뇨? ── 이 너무나 놀라운 현실을 운옥으로선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운옥은 자기 입술을 꼭 깨물어 보았다. 아프면 생시요. 아프지 않으면 꿈이다.

「아, 아프다!」

운옥은 오들오들 떨리는 두 손으로 누구한테 빼앗기기나 할 것 처럼 그리운 사람의 성명 三[삼]자가 분명히 씌여 있는 그 엽서를 꽉 부여쥐고 서신의 내용을 읽기 시작하였다.

「아아, 그 분이……그 분이 신 선생을 찾아 오신다구?……그러면 장 선생과도 같은 친구가 아닐까? ──」

운옥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앞집 지붕 위로 먼 하늘을 머엉하니 바라보았다.

밀물처럼 욹하고 달려드는 이 너무나 커다란 반가움이여!

위대한 기적을 눈 앞에 볼때 느끼는 것과 같은 하나의 강렬한 전률을 전신에 깨달으며 운옥은 온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2[편집]

「분명히 꿈은 아니언만……그러나 꿈과 같은 일이다!」

와들와들 떨리던 온 몸이 차츰차츰 진정되자 운옥은 사리를 분간하여 볼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이윽고 주인 할머니가 차려다 주는 아침 상을 물리친 후, 운옥은 갑자기 생각이나 난 듯이

「아, 저 아까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다가 이런걸 줏었는데, 이것 신 선생께 온 엽서가 아니예요?」

하고, 문밖 마루 끝에 놓아 두었던 엽서를 집어서 장 일수 앞에 내 놓았다.

「아마 어저께 신 선생이 떨어뜨리고 가신거나 봐요.」

「아, 그건 버려두 괜찮은 겁니다.」

「글쎄 전 또 혹시 간직해 두실거나 아닌가 하구요.」

「뭘요. 우리 같은 중학 동창이 동경 조도전 대학엘 가 있지요. 그이가 이번 방학에 돌아 왔다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들리겠다구요.」

「네에! 중학 동창이세요?……」

운옥의 대답이 너무나 감동적임에 장 일수는 문득 고개를 베개 위에서 돌려 조용히 꿇어 앉은 운옥을 힐끗 바라보았다.

운옥은 그때야 비로소 자기의 대답이 필요 이상으로 감격적이었던 것을 깨닫고 얼른 말머리를 돌려

「아이 중학 시절의 동무면 무척 반갑겠어요.」

「네, 더구나 우리 세 사람은 중학 시절엔 소위 삼총사라고 불리우던 절친한 사이었지요.」

장 일수는 다시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삼총사라구요?」

「네, 삼총사 ──」

장 일수는 거칠게 흔러간 四[사]년 전의 즐거운 중학 시절을 꿈꾸듯이

「나는 웅변과 완력으로, 신군은 문학과 유 ─ 모어로, 그리고 백 영민군은 학문과 인격으로 뭇 학생들을 제압해 온 소년 삼총사였지요. 아아,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중학시절의 아름다운 꿈이여! 아름다운 노래여! 그대 나를 버리겠느뇨? 영원히 버리겠느뇨?」

「바이론」의 연시(戀詩)를 읊듯이, 만주 벌판의 거세인 삭풍 속에서 조국의 한 개 초석(礎石)이 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날뛰는 무명의 대통령 장일수의 입으로부터 젖은 듯이 흘러나오는 소년시절에의 절절한 갈망이여, 추억이여, 꿈이여!

아니, 그것은 다만 지나간 소년시절만을 회상하는 읊음은 아닐께다. 오강을 건느지 못하는 항우 장사가 우미인(虞美人)을 읊는 노래였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어젯밤 나의 , , 「 건강은 인제는 파출부를 필요로하지 않으니 당신을 해고하겠다」는 괴로운 고백을 한 장 일수의 읊음 가운데는 다분이 한 사람의 여인 허 운옥을 꿈꾸는 절절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운옥도 그런 것을 모르는 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좀더 직접적으로 운옥의 가슴 한복판에 불을 붙인 짧다란 한 마디가 장 일수의 이야기가 가운데 있었던 것이니, 백 영민이라는 단지 성명 三[삼]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 과거 四[사]년 동안 자기의 입으로부터는 수천 번 수만 번 수없이 불러본 그 너무나 그리운 님의 이름이었건만 그 그리운 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처럼 감동적인 음향(音響)을 가지고 들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그렇다. 백 영민은 허 운옥에게 있어서 영원한 그 지아비인 동시에 영구불변의 하늘이었다.

「백 영민!」

운옥은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입속 말로 조용히 불러 보았다.

「그래 그 분은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시나요?」

운옥은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태연스럽게 물었다.

「신군의 말을 들으면 법률 공부를 한다는데요. 작년 가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신문 발표를 봤다니까요.」

「변호사라구요?」

「네」

「그럼 이번 처음으로 만나는 구먼요?」

「그렇지요. 졸업장을 한 장씩 움켜쥐고 백군은 동경으로 건너 가고 신군은 서울로 올라 오고 또 나는 상해로 갔으니까요.」

「중학은 어디 였었나요?」

「평양이랍니다.」

「그럼 그 분은 고향두 평양이시나요?」

알면서도 운옥은 자꾸만 캐묻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평양서 남으로 한 三十[삼십]여 리 떨어진 촌이지요. 동리 이름이 뭐라구 그러던가요?……아, 탑골동 ── 탑골동이라구 하는 데래요.」

「탑골동!」

아아, 그리운 탑골동이여! 즐거운 기억이여! 그리고 또 한편 은장두로 박준길을 찌르던 무서운 기억이여!

그러나 백군은 우리들 「 보다는 무척 우울한 사람이었지요. 콘사이스는 눈물과 웃음을 아울러 가진 친구지만……」

「콘사이스라구요?」

「아, ── 하하하……」

하고, 장 일수는 웃으면서

「신군의 별명이지요. 영어 사전을 죄다 왼다구 해서 그렇게 불렀지요.」

「콘사이스 ─ 그럼 장 선생두 별명이 있었나요?」

「하하하……나는 대통령이었답니다.」

「대통령 ── 아이, 참 좋은 별명이시네! ── 그럼 그이는 또 뭐라구 그랬었나요?」

「그이?……아, 그 백 영민군 말이지요?」

「네, 그 백 영민이라는 분 말씀이예요.」

「하하하……」

하고 장 일수는 또 한 번 웃으면서

「꼬마 신랑!」

「꼬마 신랑 이라구요?……」

운옥은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네들끼리 약혼을 해 놓은 색시가 있었다구요. 그래서 별명이 꼬마 신랑이지요.」

「아이, 일찍두……일찍두 어려서부터 약혼을 하셨네!」

운옥은 맞장구를 치노라고 그렇게 대답은 했으나 가슴 속이 뭉쿨하여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질 않는다.

「인제 겨우 코 흘리는 것을 면한 중학생이 한 사람의 약혼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 심각한 비극이 아닐수 없지요. 항상 우울하던 백군! 백군은 말하자면 소년다운 즐거움이라는 것을 통 모르고 지낸 사람이었지요. 그렇다고 경박한 무리들 처럼 헌신짝 같이 버릴수도 없는 양심적인 인간이었답니다. 한집안에서 오랍 누이처럼 길러난 그 여인에게 여성으로서의 애정을 느끼기 전에 먼저 존경심을 느낀다는 것은 생각하면 부부의 길이 아닐런지도 모르지요. 백군은 그 여인을 누님처럼, 어머니처럼, 그리고 스승처럼 존경한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무슨 지조있는 지사의 딸이라고 그러더군요. 파혼을 했는지, 아직 그대루 혼자서 번민을 하고 있는지? ── 이번 만나면 그것두 알아보고 싶은 문제구요.」

「………」

운옥은 아무리 기를 써 봤으나 뭐라고 맞장구를 칠 용기가 인제는 없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같았고 눈을 들면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운옥은 머리를 숙인채 웃목으로 살그머니 돌아서서 체온기를 찾는 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