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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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역[편집]

1[편집]

여기는 신록에 무르익은 거리 동경 ── 「메지로」 역전 산부인과의 고요한 진찰실이다.

파아란 가죽으로 껍질을 씌운 진찰실 위에 반듯이 누워서 오 유경은 지금 六[육]십이 가까운 늙은 의사에게 복부 진찰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맹장 수술을 받으셨군요?」

「네.」

지나간 겨울 방학에 준혁이가 하듯이 늙은 의사는 유경의 알린알린한 복부를 이리저리 꾹꾹 눌러 본다.

가아드를 건느는 성선의 요란한 궤음이 유경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한다.

「틀림 없는 임신입니다.」

「…………」

유경은 별반 놀라지도 않는다.

「임지 四[사]개월이 가까웠읍니다.」

「고맙습니다.」

유경은 속옷 수습을 단정히 하고 양복을 다시 고쳐 입은 후에 진찰대를 내리면서

「임신을 함 해산을 해야만 될까요?」

어린애와도 같은 질문을 유경은 하였다. 그 너무나 귀여운 질문에 늙은 의사는 한 번 싱긋이 웃으면서

「왜 무슨 그런 사정이 있읍니까?」

「아뇨.」

「그럼 왜 그런걸 물으십니까?」

「귀찮지 않어요?」

「그렇게 귀찮은 걸 왜 임신은……」

「후후훗……」

유경은 웃음을 깨밀며 얼굴을 약간 붉혔다.

「선생님, 저 책 한 권 빌려 주세요.」

「책?」

「간단한 것도 좋아요. 임신부의 섭생에 관한 책 말야요.」

그 말에 늙은 의사는 인자스런 웃음을 입가에 띠웠다.

오늘 처음 보는 환자이건만 이처럼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여인을 늙은 의사는 처음 보았다. 자기의 감정을 이처럼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 젊은 학생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비록 예술은 몰랐으나 마치 한 개의 예술품을 눈 앞에 보는 것 같았다.

「왜 귀찮다면서 섭생은 또 무슨 섭생입니까?」

늙은 의사는 마치 자기 딸처럼 귀여운 감정을 느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넜다.

「귀찮은 것두 사실이지만요.…… 가엾지 않어요? 하면 된다는 섭생을 게을리 한다는 건 책임문제니까 말야요.」

「좋은 말씀이요! 세상의 여성들이 모두가 다 당신처럼 행동의 책임을 진지하게 느낀다면 이 세상에서 비극의 절반은 수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만 계시요 내 간단하고도 . 내용이 충실한 책 한 권을 빌려 드리리다.」

그러면서 의사는 옆방 서재로 들어가서 「임신과 섭생」이라 엷은 책 한 권을 들고 들어 왔다.

「자아, 이것을 내가 당신에게 증정을 하겠소.」

「아냐요. 나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빌려 주세요. 기차에서 심심풀이로 읽어 볼 테야요. 뭐 별다른 것 있겠어요? 과격한 운동을 하지 말고 입에 댕기는 것 아쉽지 않게 먹구 ── 그저 그런거죠?」

「아핫핫핫…… 잘 아시는군요. 당신 말대로 그저 그런 거지요. 하, 하, 하……」

의사는 유쾌히 웃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책 꼭 갖다 드릴께요. 제 직업 아시죠? 아까 진찰권 직업란(職業欄)에 기입했으니까요.」

「네네, 잘 알고 있지요. 「메지로」 여자 대학생 가운데서 가장 현대적인 감정을 가진 총명하고도 어여쁜 학생이지요.」

그러나 유경은 이 늙은 의사의 찬사를 절반도 채 듣기 전에 진찰실을 나섰다.

2[편집]

한 시간이나 찾아 헤매인 「소화ㆍ제빵」이었다.

영민은 다시 한 번 신문 광고와 「소화ㆍ제빵」(昭和製빵)의 초라한 간판을 비교해 보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안으로부터 손에 밀가루 칠을 한 주인 마누라가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나왔다. 四十[사십]이 가까운 여자였다.

「댁에서 내신 구인광고(求人廣告)를 보고 왔읍니다.」

영민은 모자를 벗어 들고 인사를 하였다.

「아, 그렇읍니까. 좀 걸터 앉으시지요.」

마누라는 상냥한 태도로 걸상을 권하면서

「그래 직업을 구하시는 분은 어떤 분인가요?」

「접니다.」

「옛?」

마누라는 놀란다

「왜 저는 안 될까요?」

안 되구 말구요 「 . 당신 같은 훌륭한 학생이 그런 일을 어떻게 해요?」

「무슨 일입니까?」

「배급 빵을 배달해 주는 일이야요. 매일 오전 중에 할 三十[삼십]집 배달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하세요?」

「배달만 하면 다른 일은 없읍니까?」

「그럼요. 저의 집 주인이 갑자기 출렁을 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집의 애가 스물 두 살 나는 것이 있긴 하지만 병신이어서 검사에두 떨어 졌으니 자전걸 탈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하는 수 없어서 광고를 내 봤지만 어디 요즘처럼 손이 바쁜 때고 보니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서 마누라는 영민을 쳐다보며

「아이, 학생 같은 사람이 와 주셨으면야 좋겠지만 어디 그럴 수가 있겠어요?」

「제가 해 보겠읍니다.」

영민은 당장에 승락을 하였다.

「그러셔요?」

마누라는 무척 기뻐한다.

「그렇게만 해 주시면야…… 학교는 야학인가요?

「아니요.」

「그럼 학교는 어떻거시나요?」

「오전엔 그만 두어도 괜찮읍니다.」

「그러셔요? 그럼 내일부터라도 와 주겠어요?」

「오겠읍니다.」

「그런데 보수가 적어서요. 보시다 싶이 이걸루 간신히 먹어가는 형편이고 보니…… 일당 二[이]원 五十[오십]전 가량이면 어떨까요?」

「좋읍니다.」

「그럼 내일부터 수고해 주세요.」

「네. ── 그런데 나는 조선 학생인데 괜찮읍니까?」

「그러셔요?」

마누라는 다시 한 번 영민을 바라보며

「그러면 어떱니까? 대학생이 빵 배달을 한다면 저의 집 명예지요.」

그러면서 마누라는 웃어 버린다.

영민은 내일부터 틀림없이 출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소화제빵」을 나섰다.

태극령 고개에서 어머니가 살그머니 주머니 속에 넣어준 三[삼]백 원으로 영민은 학기금을 내고 나머지로 두 달 동안의 식생활을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리고는 애장하였던 서적을 팔아 또 두 달을 살아 왔었으나 인제는 팔 물건이 영민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직업을 구하노라고 싸돌아 댕겼으나 그리 쉽사리 얻어지지 않았던 직업을 오늘이야 간신히 발견한 영민이었다.

「왜 책을 다 팔아 버렸어요?」

영민의 하숙을 찾아 왔던 유경이가 묻는 말에

「귀국할 때 귀찮지 않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영민은 자기가 아버지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을 유경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민은 경쾌한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다까다노ㆍ바바」역에서 상선을 탔다.

오늘 아침 유경에게서, 오늘 오후 다섯 시에 신숙역 대합실에서 만나자는 속달이 왔다. 그래서 지금 영민은 유경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3[편집]

신숙 역에서 내리면서 영민은 문득 팔뚝시계를 들여다 보다가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쓴 웃음살을 지었다.

오늘 벌써 여러번째 영민은 습성(習性)에 속는 것이 우스웠다. 아까 아침 유경의 속달을 받고 하숙집을 나오는 길에 유경이와 저녁을 나눌 셈으로 영민은 학교 근처 전당포에 들려서 시계를 잡힌 사실을 깜박깜박 잊어 먹는 것이다.

영민은 푸렛ㆍ홈에 걸린 시계를 쳐다 보았다. 다섯 시 五[오]분이다. 약속한 시간에서 五[오]분이 지났다.

「五[오]분이 늦었다!」

영민은 무척 당황하여 개찰구를 향하여 뛰어 나갔다.

영민도 그렇고 유경이도 그렇고 아직껏 단 한 번도 약속의 시간을 넘겨 본 일이 없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약속한 시간보다 五[오]분이나 十[십]분 쯤은 먼저 와 있었다. 궂은 날이나 개인 날이나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러 하였다.

그러던 것이 오늘은 시계를 갖지 못한 탓도 있거니와 「소화제빵」을 거쳐서 온 것이 불찰이었다. 그러나

「五[오]분 쯤은 ──」

하는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았다. 영민은 개찰구를 허둥지둥 빠져 나와 二 [이]등 대합실로 뛰어 들어 갔다.

저편 전언판(傳言板)이 걸려 있는 바루 앞 걸상에 유경이가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이 어정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내다 보이었다.

「기다렸지요?」

영민은 유경이 앞으로 다가 가서 미안한 얼굴을 지었다.

그 말에 유경은 후닥딱 놀래어 얼굴을 들다가 얼른 책을 덮어 무슨 비밀이라도 감추는 것처럼 가방에 넣으면서 일어섰다. 반가운 표정이었으나 샐쭉한 얼굴이기도 하였다.

「그만 집을 나올 때 시계를 깜박 잊어 먹었소. 무척 기다렸지?」

「무척이래야 五[오]분 밖에 더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건 늦었다는데 대한 변명으론 불충분해요.」

얼굴은 방글방글 웃으면서도 어조는 엄숙하리만큼 새침하다.

「아, 그건 변명이 아니구……」

「변명이 아님 뭐야요? 오늘처럼 시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날, 그처럼 잊어 먹을 염려가 있담 왜 애당초 잘 때에 시계를 손목에서 떼 놓느냐 말이야요? 나 같음 안 그래요.」

「유경이, 미안 했소.」

「미안한건 당연허지만, 그리구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아도 미안해 할 줄난 다 알구 있어요. 그렇지만 미안하구 안 한게 문제가 아냐요. 문제는 딴 데 있지 않아요?」

그러면서 유경은 바루 자기 머리 뒤에 걸터 있는 전언판을 한 번 힐끗 쳐다 보았다.

영민도 유경의 시선을 따라 전언판을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난잡하게 쓰여진 十[십]여 종의 전언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 줄이 눈에 띠었다.

「영민씨 ──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을 나는 존경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야요. 다섯 시 정각. ── 유경.」

영민은 다시 시선을 돌려 유경의 얼굴을 귀여운듯이 들여다 보며 낮은 목소리로

「유경이, 고맙소. 내 생각도 꼭 그러니까. ── 만일 이 자리에 우리를 감시하는 수 많은 얄미운 눈동자가 없다면 내 입술은 유경이의 고 새침한 입술을 존경해 드렸을 것이요!」

그 말에 유경은 그만

「후후훗……」

하고, 손으로 웃음을 막으며 대합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름다운 풍족감이 영민의 마음을 흐뭇하니 적시기 시작한다.

영민은 천천이 유경의 뒤를 따라 나갔다.

4[편집]

「럿슈ㆍ아워」를 전후하여 파동치는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면서 흐르는 신숙의 저녁 거리다.

불야성인 양 五[오]색의 네온이 호화롭게 흐르던 옛날의 신숙은 아니었다.

그 찬란하던 색채와 감미롭던 리듬에의 「노스탈쟈 ─」를 품은채 보다 평범한 향락과 보다 적은 행복을 찾아 헤매는 군중의 물결이었다.

대합실을 뛰쳐나온 유경과 영민은 「무사시노」 사진관 옆 골목으로 해서

「미츠코시」 앞으로 빠져 나왔다.

아무 말도 없이 두 젊은 이는 그저 나란이 서서 걷는 것이 기뻤다. 그 무언의 행복 속에 깊이 잠긴 채 두 사람은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골돌히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편이 먼저 그런 회롱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의 손과 손이 상대편의 손가락을 더듬어 잡고도 꼭 쥐어 주곤 한다. 그러다가 사람이 밀려 들면 손과 손은 아까운 듯이 이별을 한다. 사람이 지나가면 또 어느 편에서 더듬어 잡는 것이다.

그러한 비밀이 열락(悅樂)을 이러한 어지러운 가두에서 남 몰래 가질 수 있는 행복을 두 사람은 깨보숭이처럼 고소하게 향락하는 것이다.

「아얏 ──」

유경이가 입 속으로 소리를 쳤다. 영민은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

「어디 두구 봐요!」

이번엔 유경이가 힘껏 손아귀에 힘을 주어 영민의 손을 꽉 지었다. 그러나 영민은 조금도 반응이 없다.

유경은 자기 손 힘이 예상 이외로 약한 것을 발견하고 불만을 느꼈으나 조금도 반응이 없는 꿋꿋한 사나이의 손을 무척 탐탁하게 여기고 만족해 하였다.

비어ㆍ홀 「모나미」 입구에 주객들이 열을 짓고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나 삐루 한 병 먹어 봤음……」

유경의 맑은 목소리가 톡 하고 영민의 귀 밑에 떨어졌다.」

「삐루를?」

「왜 불량 소녀 같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이 꼬리에서요.」

영민은 유경의 손을 끌어 댕기며 十[십]여 명 서 있는 맨 꼬리에 섰다.

「정말이야?」

「뭣이?」

「삐루 먹구 싶다는 거……」

「내가 언제 영민씨에게 거짓말 했어요?」

「아, 그럼 됐어! 야아, 이건 정말 유쾌한 걸!」

유경의 이 돌연한 제안을 영민은 진심으로 반가워하였다.

「삐루 먹어 본적 있어?」

「없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잡수시는 약주는 핥아 본 적이 있지만……」

「아이, 쓰기만 하구……」

「그럼 왜 갑자기 삐루를 먹구 싶달까?」

「누가 먹고 싶댔어요? 먹어 보구 싶댔지.」

「왜 갑자기 먹어 보구 싶을까?」

「술을 먹음 유쾌하다지 않아요?」

그러는데 순번이 왔다. 영민은 오늘 아침 시계를 잡힌 돈으로 한 사람 앞에 「죠끼」 두 개의 식권을 사려 했을 때, 등 뒤에 섰던 유경이가 얼른 계산대 위에 돈을 내밀었다.

「내가 꼭 사구 싶은 걸요.」

「어!」

이리하여 영민은 하는 수 없이 유경의 술을 얻어 먹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