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50장
죽엄의 입술이
[편집]1
[편집]먹으면 유쾌해 진다는 술을 오늘 밤 유경은 영민에게 권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먹어 보고 싶다는 것도 전연 구실만은 아니었다.
구석 식탁에 영민과 유경은 마주 앉았다. 홀 안에서는 여자 손님이라고는 유경이 혼자 밖에 없었다. 여급사가 삐루를 가져 오면서 힐끗 유경의 얼굴에 시선을 던진다.
「불량 학생!」
그러한 표정이 급사의 얼굴에 일순간 떠 올랐다.
「아이, 이 커다란 컵을 그대로 마셔요?」
벌컥벌컥 들이키는 영민의 자태를 바라보며 유경은 놀란다.
「아, 참 시원한걸. 자아, 유경이도 어서 마셔봐요?」
「그렇게 맛 있어요?」
그러면서 유경은 어색한 솜씨로 「조끼」를 들고 서너 모금 마시다가
「아이, 써!」
유경은 얼굴을 찡그린다.
「왜 맛이 없어?」
「돈 주면서 먹으래두 난 못 먹겠네. 어서 영민씨나 많이 자세요. 난 이걸 먹을테야요.」
유경은 옆에 놓인 식사에 손을 댄다.
「그런데 왜 여길 들어 오자구 그랬어?」
「후후훗 ──」
하고, 혼자 속으로 유경은 웃으며
「나 영민씨, 술 자시는 것 보구 싶어서요. 이것 저것 다 봐 둬야 되잖어요? 그리구……」
「그리구?」
「슬프고 기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렇다. 아까 병원에서 임신 四[사]개월이라는 선언을 받은 순간, 유경은 어쩐지 공연히 서글펐다. 처녀로서의 순결을 영원히 상실했다는 정확한 물적 증거 명백한 낙인(烙印)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 무척 슬펐다.
그러나 곧 그 서글픔을 하나의 기쁨으로서 전환시킬 수 있는 총명을 가진 유경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이나마 해산을 거부하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고
「임신과 섭생」이란 책을 유경은 빌렸던 것이다.
「슬프고도 기쁘다니…… 오늘이 무슨 날이게?」
「후후훗…… 내 이따 동경 역에서 가르쳐 드리께요.」
「동경 역?…… 동경 역은 또 왜?」
「나 집에 좀 다녀 와야만 되겠어요.」
「왜? 무슨 일이 생겼수?」
영민은 정색을 한다.
「영민씬 그런걸 생각해 본 일 없어요?」
「무엇을 말이요?」
유경은 얼굴을 붉히며
「결혼…… 결혼할 생각을……」
그 말에 …… 후우 숨을 쉬며
「난 또 무슨 다른 일이 생겼다구? 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아요? 밤낮 그 생각 뿐인데……」
「나 집에 돌아 가서 모든 이야길 하구 오겠어요.」
「아, 그건 좋은 생각이지만 학기 도중에 그렇게 갑자기 떠나지 않어도 되지 않아요?」
「그럴…… 그럴 이유가 갑자기 생겼어요.」
그러면서 유경은 자기 배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무슨 이유가 그리 갑자기 생긴다는 말이요?」
「흐흥……」
하고, 유경은 영민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글세 그럴 이유가 갑자기 생긴걸요. 그 이유를 내 이따 역에서 가르쳐 드릴께요.」
「몇 시 차요?」
「열 시 반 급행이 있어요.」
그 말에 영민은 후딱 팔뚝시계를 들여다 보다가
「아, 참 잊어 먹었지. 하하하……」
하고, 웃었다. 유경도 따라 웃으며
「이 담엔 시계 잊고 나오지 마세요, 네?」
「네, 네 ──」
2
[편집]차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잠시 동안이나마 이별을 아끼는 마음으로 신궁외원(神宮外苑)을 거닐기로 하였다.
조각 달이 가늘게 울창한 숲 위에 걸려 있었다. 탄탄 대로에 달리는 자동차를 ── 그 자동차 가운데 한 대에서 영민과 유경은 내렸다.
숲을 등진 산보로 가변에 가다가다 놓여 있는 벤취 위에는 천금을 주고 봄밤을 사려는 젊은이들의 속삭임이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거닐면서
「영민씨.」
「응?」
「나 사람 잘못 보지 않았죠?」
「무슨 뜻인데?……」
「나 영민씨를 잘못 보지 않았죠?」
「내가 유경일 잘못 보지 않은 것처럼……」
「유경인 기뻐서 죽을지도 몰라!」
유경은 영민의 손을 대담하게 더듬어 잡았다. 아까는 수 많은 눈동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희미한 조각달의 관대한 눈동자 하나 뿐 ──
「나 집에 가면 약간의 반대가 있을 것 같애서. 그래서 나는 영민씰 열심히 변호할 테야요.」
「그래두 집에서 들어 주지 않으면?」
영민은 집을 쫓겨 나던 날의 자기의 모습을 회상하며 물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정말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걸을 수 밖에……」
이번에는 영민이 편에서 또 유경이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유경은 또 한 번 살그머니 배를 쓸어 보았다. 쓸어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느끼지 못한 또 하나의 애정 ── 좀더 현실적인 탐탁한 애정을 유경은 영민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어제까지 유경은 보다 더 많은 정신적인 애정을 영민에게서 느끼고 요구했지만 오늘의 유경으로서는 또 한 가지 직접 피부에서 오는 애정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살 냄새를 느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벤취에 걸터 앉았다.
유경은 영민의 커다란 손등을 어루만지며
「오늘은 영민씨의 손이 더 한층 미덥고 더 한층 귀중하게 생각키어요.」
「그렇소! 이 손은 귀중한 손이요. 이 손은 유경일 사랑할 수 있고 유경을 위하여 세상과 싸울 수 있고 우리들이 창조하는 새로운 생명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귀중한 손이지요. 이 손이 바위처럼 굳은 매듭이 지도록 나는 유경일 위하여 노력할 것이요.」
「영민씨, 황송해요!」
「그렇소. 우리는 언제든지 서로 황송해 하고 송구해 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사랑합시다. 사랑이란…… 진정한 사랑이란 노력하는 사랑이어야 할 것이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애정에는 노력이 없어요. 노력 없는 애정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요. 동물에게도 애정의 세계가 있지만 그것은 노력 없는 애정, 단지 본능에서 오는 욕망의 표현에서 더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그처럼 귀중하게 생각하고 그처럼 감미롭던 사랑의 속삭임이 나중에는 무서운 증오로 변하고 저주와 원한을 가져오게 되는 이유도 단 한 가지 인간으로서의 노력의 결핍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영민은 가만히 자기 입술을 유경의 볼에다 갖다 댔다.
그러나 영민의 입술을 받은 것은 유경의 타오르는 볼이 아니고 유경의 새침한 입술이었다.
3
[편집]영민의 포옹 속에서 나 영민씨의 그 진실한 「 사랑 속에서 일생을 지내고 싶어요. 그 사랑이, 그리고 그 행복이 비록 한낱 그림자래도 괜찮아요. 사랑의 환영이래도, 그리고 행복의 그림자래도 나 조금도 겁내지 않을테야요.」
유경은 영민의 품안에서 가느다란 몸부림을 치면서 속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유경이의 입술로부터 흘러 나오는 하소연만이 아니었다. 유경이의 전신이 몸부림을 치면서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다.
「유경이, 감사하오! 그것이 사랑의 환영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이것이 행복의 그림자가 되지 않도록 나는 노력하리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도 내가 유경일 행복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죄는 우리들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이요.」
그렇다. 유경이가 만일 아버지에게 쫓겨난 영민의 사랑의 노력을 안다면, 내일 아침부터 「소화제빵」에서 빵 배달을 하게 된 영민의 숨은 노력을 안다면 유경은 단지 사랑이라는 것이 한낱 감미로운 애정으로써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정확한 증거를 여실히 보았을 것이다.
「영민씨.」
「네.」
「영민씨는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세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요?」
영민은 유경의 머리에서 발산하는 향그러운 냄새를 피부 깊이 호흡하면서
「공간적(空間的)으로는 우주(宇宙)를 시간적으로는 영원(永遠)을 생각합니다.」
「그럼 영민씨두 나처럼 행복하신가 봐요.」
「그렇지요.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 영원을 곧잘 생각하는 법이랍니다.」
「영원! 영원!」
하고, 유경은 입속 말로 중얼거리다가 그러나 「푸랑소아ㆍ콥페 ─」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은 영원히 나를 사랑하겠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니 죽엄의 입술이 어찌 영원이라는 말을 할 수 있으리까? ── 라고요.
「아아, 죽엄의 입술이……」
「밉지 않아 죽여버릴 입술이 영원이란 말을 곧잘 입에 담는걸 보면 정말 우스워요.」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이란 말을 입에 담지 말고 머리로 생각만 하기로 합시다.」
「자연(自然)의 섭리(攝理)란 참 신비로운 거야요. 그러구 아주 무자비하게 정직하고요.」
「어째서요?」
「태고로부터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지 않아요? 그 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도 없다는 건 너무 무자비해요.」
「두어 사람 쯤 예외(例外)가 있어두 괜찮을 것 같다는 뜻이겠지요?」
「네 ── 영민씨 나와……」
그러면서 유경은 부끄러운 듯이 영민의 포옹 속에서 살그머니 몸을 빼며
「밤이 오면 꼭 낮이 오고…… 봄이 오면 꼭 겨울이 오고요. 자연의 섭리란 정말 톱니바퀴(齒車)처럼 정확해요.」
「사람은 꼭 낳았다 죽고, 열 달 만엔 꼭 애를 낳고……」
「아냐요. 二[이]백 八十[팔십]일 만이야요.」
「그건 다 어떻게 알아요?」
「이것 저것 다 알아 두어야죠.」
아까 대합실에서 「임신과 섭생」을 읽고 얻은 지식이었다.
「영민씬 어린애를 귀여워 하세요?」
「아주 귀여워 하지요. 집의 아버지는 날 저고리 속 품안에 넣구 다니면서 귀여워 하셨대요.」
「아이, 좋은 아버지시야. 한 번 만나 봤음……」
「이제 다 만나 볼 때가 오겠지만…… 좀 완고하신 데가 없지 않지만 좋은 분이지요.」
「완고하시담 그럼 아직 상투 트셨어요?」
「상투?」
어린애 같은 물음에 영민을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