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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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영민의 도착[편집]

1[편집]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모욕하는 사람 ── 곁붙이 살림 ── 기생충 ── 」

이것은 저번 날 오 유경이가 자기 아버지의 애인인 박 춘심이에게 한 한마디다.

「떡을 너무 지나치게 먹다가 체하질랑 말아요.」

이것은 가난뱅이 소설가 신 성호가 이제 대걸작을 써서 몇 十[십]만 권 책이 팔리면 꽃을 한번 재미 있게 따 보자는 말과 함께 춘심이에게 준 한마디다.

사람은 각각 다르지만 각각 다른 이 사람이 빼았은 이 두 가지 말이 춘심에게는 항상 마음에 걸려 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춘심이의 인생관이 차츰차츰 흔들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최 달근이가 자기 인생에 확고한 자신을 갖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양 기생 박 춘심이도 역시 자기가 걸어 나가는 인생항로(人生航路)를 한 번도 낮추 평가해 본 적은 없었다.

「요정에서 술을 붓는 것도 인생이요. 주방에서 밥을 짓는 것도 역시 인생이다. 너와 나의 다른 것이 대체 뭐야?」 하고, 고함을 치면서 걸어온 춘심이의 인생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오 창윤의 소실로 들어가는 것을 하늘의 별이나 딴것 처럼 영광으로 생각한 춘심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춘심이의 인생관이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아니, 뻗쳐 나가려면 얼마든지 뻗칠 수도 있는 춘심이었으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일종의 허세(虛勢)인것만 같았다. 향기 없는 인생인 것만 같았다.

춘심이에게는 신 성호의 생활 하나 쯤은 넉넉히 보장할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춘심이의 호의를 신 성호가 달갑게 받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달갑게는 그만 두고라도 쓰게도 받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떻거나?……모 말 같은 셋방으로 기어들어가서 남비 밥을 한 번 끓여 봐?」

그러다가는 그만

「미친년 같으니라구! 별 수작을 다 하지!」

하고, 자기의 말을 중도에서 꺾어 버리곤 하였다.

「남들은 따지 못해 헐레벌떡 하는 별을 그래 땄다가 그대로 놓아 줘? 미처 빠진년 다 보겠어!」

그러한 불안정한 생활이 춘심이에게서 흐르고 있는 어제 오늘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정에 흐르기 쉬운 동물이다. 오 창윤의 그 지긋하면서도 점잖은 사랑이 이제는 춘심이의 피부에 젖어 들었다. 자기의 몸을 판다는 생각이 점점 희미해 졌다.

「춘심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외도라고는 춘심이가 처음이다. 일평생을 나는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싸우고 일해 왔다. 그러던 것이 나이 많아지고 생활에 여유가 있어지고 하니까, 긴장이 점점 풀어지면서, 요만한 외도쯤 나의 과거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생각하면 관대히 처분을 받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춘심이도 단지 나를 돈 있는 늙은 색광으로만 생각해 준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그러한 점잖은 잠자리 말을 들을 때마다 춘심은 점점 오 창윤의 그 폭 있는 부드러운 인격과 애무속에서 그리 불행하지 않은 자기의 인생을 확실히 느끼면서 고스란히 잠이 들곤 하였다. 그런 때는 이상하게도 유경의 고 뾰죽한 말과 신 성호의 그 비웃는 말이 그리 가슴 아프게 생각지는 않았다.

「하여튼 좀 지나치긴 지나쳤지 뭐야?」

화투 장을 거두어 넣는 춘심의 마음이 점점 무겁게 어두어 진다.

그지음, 준혁은 아현동에 도착하였다.

「아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셔요?」

「글세 낸들 아느냐?」

부인은 허둥지둥이다.

「그런데 이놈의 영감은 또 어디 가서 들어 붙어 있는고?……에잇, 집안이 망할려거든 곱게나 망할 것이지.」

준혁은 묵묵히 앉아서 부인의 투정을 죄 진 사람처럼 듣고 있을 따름이다.

부인의 그러한 투정을 들으면 들을 수록 유경의 순정을 잔인하게 짓밟아 버린 「백 영민」이라는 사나이에게 대한 의분심이 불타올랐다.

「암만 해두 유경이가 저번 이야기 한 그 백 무엇이라는 학생과의 관계가 재미없게 된 모양이 아니냐? 나는 암만 생각해두 꼭 그런 것만 같다.」

「재미없게 되었다구 집을 나갈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준혁은 그렇게 대답하여 부인을 안심시키려 한다.

「꼭 무슨 곡절이 있느니라. 자네니까 허물없이 이야기 하지마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유경이의 몸이 암만해두 좀 이상한것 같애.」

「에?……」

준혁은 놀랐다. 거기까지는 감히 생각도 못 해 본 준혁이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글쎄 지금 가만이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이지. 모르긴 모르지만두……」

「음 ──」

깊은 신음의 목소리가 김 준혁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눈물을 흘리면서, 행복이란 그리 쉽사리 찾아지지 않는다던 유경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지를 지금이야 비로소 똑똑히 알아 볼 수 있는 준혁이다.

「하여튼 선생님이 돌아 오시면 곧 동경으로 건너가 봐야겠읍니다.」

준혁이와 부인이 그런 말을 하고 있을 지음에 백 영민은 경성역에 내렸다.

2[편집]

영민은 경성 역 앞에서 간단한 식사를 취하면서, 대관절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생면부지인 낯설은 사나이가 돌연 뚜벅뚜벅 찾아 들어 가서, 유경이의 행방불명과 아울러 유경이가 임신한 사실을 알린다면 오죽이나 부모네가 놀랄 것인가 . 놀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유경이가 항상 말하던 그 진실한 과학자 김 준혁이란 사람을 먼저 찾아 갈까?」

그렇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쑥스러운 일이었다.

「신 성호를 찾아 가서 김 준혁 박사에게 소개를 해 달랄까?」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영민의 감정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예의가 무엇이며 쑥스럽다는 말이 대체 무엇이냐! 나에게 있어서는 오직오 유경이 하나만이 문제의 초점이다. 유경이의 생사를 나는 한시 바삐 알아야 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한 영민은 서대문행 전차를 타고 곧장 아현동으로 찾아 들어갔다.

사회적인 모든 기반, 모든 인습, 모든 예의가 현재의 영민에게는 필요치 않았다.

「유경이여, 제발 집으로 돌아 와 있기를……」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며 동경서 뛰어 온 영민이었다.

아현동 마루턱 오 창윤씨의 집은 극히 찾기 쉬웠다. 영민은 서슴치 않고 현관으로 걸어 들어 갔다.

「째르랑 ── 째르랑 ──」

현관에서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난다. 식모가 뛰어 나가다가 들어 오면서

「손님 오신뎁쇼.」

「어디서 오셨느냐고 여쭤 봐요.」

부인의 대답이다.

「저 동경서 오셨다고요.」

「동경서?……」

부인 보다 먼저 준혁이가 놀랜다. 부인도 눈이 둥그레지며

「동경서……어떤 사람이야?」

「학생인가 봐요. 사각모를 썼어요.」

「학생?……」

부인과 준혁이가 똑같이 놀래 물었다.

「네.」

부인과 준혁은 잠깐동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섰다가

「들어 오시라구 그래.」

부인은 준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채 그렇게 대답하였다.

이윽고 손가방 하나를 든 학생이 현관을 들어서는 것이 바라 보였다.

준혁이가 마중을 나갔다.

영민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나서

「오 선생님을 뵈려 왔읍니다.」

「선생님은 지금 외출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준혁은 뚫어질 듯이 학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하고, 영민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실은 선생님을 뵙고자 동경서 왔읍니다.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를 여기서 좀 기다리게 하여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조금도 흐림이 없는 분명한 말씨였다. 그 몇 마디 말씨에 준혁은 이 학생의 바탕을 어느 정도로 추측할 수가 있었다.

「어떠한 용건으로 오셨읍니까?」

「그것은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말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중대한 용건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읍니다.」

「잘 알겠읍니다. 이리로 올라 오시지요.」

준혁은 영민을 응접실로 인도하였다. 그 응접실은 과거에 있어서 최 달근과 장 일수가 정열의 곡예(曲藝)를 연출한 응접실이었고 지금 영민과 준혁이가 마주 앉은 그 의자는 과거에 있어서 최 달극과 장 일수가 마주 앉았던 바로 그 의자였다.

「처음 뵙겠읍니다. 저는 백 영민이란 사람입니다.」

영민이가 먼저 인사를 하였다.

「…………?」

준혁는 미처 대답을 못하고 후딱 시선을 들어 상대자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 보았다.

백 영민! 그렇다. 그것은 김 준혁 박사에게는 너무나 낮익은 이름이었다.

수술대 위에서 잠고대인 양 유경이의 입으로부터 무심코 불러 나온 이름 백 영민! 사랑의 파랑새를 홀랑 날려 보내던 날 밤, 독수리처럼 머리털을 긁어 쥐고 처방전 위에 수없이 써 본 그 이름 백 영민! 그리고 오늘날 무장 없는 꽃 오 유경이의 그 영롱한 눈으로부터 이슬과 같은 눈물을 강요한 그 사내 백 영민!

그 백 영민이가 마침내 김 준혁 박사에게 나타난 것이다.

「먼 길에 수고로이 오셨읍니다. 저는 김 준혁입니다.」

「…………」

이번엔 영민이가 대답을 못한채 덤덤히 상대자를 쏘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