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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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향기 없는 인생이여[편집]

1[편집]

매화 한 분을 최후의 선물로 남겨 놓고 바람처럼 사라진 허 운옥의 소식은 그후 통 알 길이 없었다.

다닥다닥 붙었던 연분홍 꽃송이는 벌써 다 떨어져 버리고 판란 잎만이 꾸부러진 가지 위에 한들한들 달려 있는 그 추억 많은 화분은 아직도 준혁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화분을 바라볼 때마다 준혁은 마치 어미를 잃은 송아지처럼 한없이 쓸쓸해 지는 것이다.

오 유경에 대한 준혁의 애정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기 자신이란 존재가 뚜렷이 도사리고 있었건만 허 운옥에 대한 준혁의 사랑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 유경에 대한 그것은 아낌 없이 빼앗고자 한 사랑이었지만 허 운옥에 대한 그것은 아낌 없이 주고자 한 애정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오 유경에게 받은 실연의 고배는 준혁으로 하여금 육체적인 아품을 느끼게 하였지만 허 운옥에게 받은 그것은 더 많이 정신적인 아픔을 감각하게 하였다 유경을 . 잊어 버리기는 비교적 수월할 것 같았으나 운옥을 잊어 버리기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 하여도 준혁은 운옥을 한시 바삐 잊어 버려야만 하였다. 아니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재생의 길을 힘차게 내 찦어야만 하였다.

「과거를 잊어 버리자!」

잿빛갈 도는 온갖 과거를 청산하고 모든 정열을 자기가 맡은 바 인술에 바치는 도리 밖에 준혁에게는 없었다. 그것이 이 가혹한 타격에서 벗어날 단 하나의 남은 길이었다.

그리고 만일 김 준혁에게 이러한 굳세인 의지력과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착실성이 없었던들 그는 벌써 감정의 노예가 되어 홍등록주(紅燈綠酒) 속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길을 걸었을런지 모를 일이다.

유경에게 배반을 당하고 또한 운옥에게 버림을 받은 김 준혁박사가 아니었던가.

준혁에게 있어서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랑이 인생의 반려자이긴 하나마 인생 그 자체는 아니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 장식하는 한포기 향기로운 꽃은 될지언정 삶의 가치를 좌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준혁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러나 향기 없는 아아, 너무도 향기 없는 쓸쓸한 인생이여!」하고, 준혁은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준혁에게 흘렀다. 그리고 그러한 준혁이가 오늘 아침 외래 환자를 한번 쭉 보고 나서 허리를 펴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을 때

「째르랑 ──」

하고, 전화가 울렸다.

「네, 선생님 게신 데요, 네……아, 잠깐만 기다리세오.」

재빨리 전화를 받던 경숙이가

「선생님, 아현동 마님께서 전화가 왔어오.」

하고, 수화기를 준혁에게 주었다.

「저 준혁입니다.」

「아이, 이 일을 어찌 하느냐? 유경이가…… 유경이가 아주 집을 나갔구나 글쎄!」

「옛, 뭐라구요?」

「아, 누가 피아노를 몰래 팔아 갖고 간 줄이야 알았느냐?」

「뭐라구요? 피아노를 팔았다구요?」

저편 목소리 보다 못지 않게 당황한 음성으로 준혁은 물었다.

「글쎄 누가 그럴 줄이야 알았느냐? 진고개 악기점 주인이 지금 와서 피아노를 가져 갔는데 아, 글쎄 얘기를 들어 보니 유경이가 저번 날 팔아 갖구 갔다는구냐!」

「유경씨가 팔아 갖구 갔다구요?」

준혁이도 놀랬다.

「그러기에 말이지. 六[육]천 원을 받구 팔았다는데 돈받은 영수증이 있구…… 피아노는 두 주일 후에 가져 가라구 했다구, 글세 지금 막 가져 갔는데…… 아유, 이 일을 어찌 한다는 말이냐!」

부인의 목소리는 절반은 울고 있다.

「그러나 피아노를 팔았다구 아주 집을 나간 거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읍니까? 무슨 긴급한 용돈이 필요해서 그랬는 지도 모르지 않으세요?」

「나두 처음엔 그렇게두 생각했지만…… 알구 보니 그런게 아니야. 하두 이상해서 옷장을 뒤져 봤더니 유경이의 옷가지가 몇 벌 보이지 않구……」

「옷이 없어 젔다구요?」

아이유 이 일을 「 …… 글세 누가 그런 줄이야 알았느냐? 그저 제 편지를 보구 시험이 급해서 떠난줄로만 알았지……하여튼 영감 좀 불러다 주우. 영감인지 생감인지는 이런 줄두 모르구 밤낮 그년의 옆구리에만 처백혀 있구……」

「선생님을 곧 모시구 가겠읍니다.」

준혁은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다.

효자동에는 전화가 없다.

2[편집]

준혁은 택시 ─ 를 타고 효자동으로 달려 가면서 집을 나간 유경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저번 유경이가 귀국했을 때 최후의 작별을 하던날 밤, 어쩐지 유경은 자꾸만 울고 있었다. 그처럼 명랑한 유경이가 사나이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배반한 사나이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였다.

「행복이란 그리 쉽사리 얻어 지는것 같지 않어요.」

하던, 유경의 쓸쓸한 한마디가 다시금 준혁의 기억에 새로워 진다.

그러한 유경이의 눈물과 집을 나간 유경이의 행동 사이에는 반드시 관련된 그 무슨 중대한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

「그렇다. 행복을 찾아 헤매던 유경이가 확실히 불행해 진 것이다!」

그러면서 준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감은 두 눈 속에 무장(武裝) 없는 한떨기 어여쁜 꽃 오 유경을 불행의 구렁지로 쓸어 넣은 그 무자비한 사나이의 모습이 알알이 떠 오르는 것이었다. 그 사각모를 쓴, 그리고

「백 영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무자비하고 난폭한 사나이의 잔인한 모습이 건전한 상식과 견실한 도덕들을 지닌 한 사람의 선량한 과학자인 김준혁 박사의 의분심을 극도로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나쁜 사나이! 잔인한 사나이!」

준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 위에 놓였던 주먹이 불끈 쥐어 진다.

행복의 그림자를 행복 그 자체인 줄로 믿고 동경하던 유경에게도 물론 불찰은 있을 께다. 그러나 그러한 유경을 잔혹하게도 진흙 발로 문질러 버린 그 불량 학생을 준혁의 감정으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건전한 의분심은 오 유경을 하나의 애인으로서 생각하는 감정에서 보다도 오랫동안 자기 손으로 물을 주고 하여 길러낸 혈육과도 같은 감정에서 좀더 농후하게 출발하는것 같았다.

이윽고 차가 춘심이의 집 대문 밖에서 멎었을 때, 춘심은 마루 끝에 앉아서 화투 장으로 재수를 떼고 있다가

「아이유, 별 일이야! 김 선생님이 어떻게 여길 다 오실까? 어서 좀 이리 올라 오세요.」

언젠가 오 창윤을 찾아 와서 술상을 한 번 편 이후로는 통 발길을 하지 않은 김 준혁이였다.

그러나 김 준혁이가 이처럼 찾아 와 주는 것이 춘심이에게는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잠깐 선생님을 만나 뵈려 왔읍니다. 외출하셨읍니까?」

「네, 아침을 잡수시구 곧 나가셨어요. 어서 좀 올라 오시지 않구」

「아니, 좀 긴급히 일이 생겨서 곧 가야겠읍니다.」

「무슨 일이 그처럼 바쁘시기에……」

「아니, 좀……」

준혁은 주저하면서

「하여튼 선생님이 돌아 오시는 대로 아현동 댁으로 곧 좀 와 주십사구 말씀 드려 주세요.」

「네, 그렇게 말씀은 드리지만 그래두 오래간만에 이처럼 오셨다가 그대로 가시면 제가 서운하지 않으세요?」

사실 오 창윤의 친척도 서울에는 많건만 누구 한 사람 춘심이를 찾아 주는 이가 없는 것이 무척 쓸쓸하였다. 모두가 다 자기를 흰 눈으로 보아 주는 것이 서글펐다. 그 서글프고 쓸쓸함을 춘심은 호소할 데가 없는 몸이다.

더구나 그처럼 긴급한 일이라면 자기에게도 알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그러나 춘심이의 쓸쓸한 표정을 준혁은 재빨리 발견하고

「아, 실은 유경씨가……」

「아가씨가……아가씨가 어째서요?」

춘심은 호닥닥 놀랜다.

「유경씨가 집을 나갔읍니다.」

「집을 나갔다구요?」

「네, 아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저번 동경 갈 때 피아노를 몰래 팔아 갖구 갔다구요.」

「피아노를……?」

「그리고 옷가지도 몇 벌 없어 졌다구요. 하여튼 자세한 것은 가봐야 알겠지만 선생님이 들어 오시거든 곧 좀 와 주십사구 전해 주셔오.」

「네……네……곧 돌아 오시는 대루……」

춘심이의 혀끝이 마음대로 돌아 주지를 않는다.

대문 밖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준혁의 뒷모양을 춘심은 얼 빠진 사람인 양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이윽고 자동차 소리 마저 사라졌을 때 춘심은 힘없이 마루 끝에 털썩 걸터 앉으며 그래 바로 여기 왔던 「 , 그 이튿날, 떠난다는 말도 없이 동경으로 떠났다 지 않아?…… 음, 그랬군, 그랬어!」

그러나 다음 순간

「암만 해두 내가 좀 너무 했나 봐? 고 새침뚝이가 오작 했을라구?」

그러다가

「그러나 설마 자살이야 안 했겠지만…… 옷 가지를 갖구 갔다니까 물론 자살은 하지 않았겠구……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두 내가 좀 지나쳤어. 비린내 나는 어린애 보구 내가 왜 그처럼 망발을 했을까?……」

그러다가 또

「흥, 하는 수 없지 책임은 고년의 주둥이에 있는 거니까. 뭣이 어째서?…… 자기가 자기를 모욕한다구? 방정맞은 년 같으니……」

일단 누그러졌던 투쟁심이 또다시 춘심이의 젖가슴 밑에서 불붙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