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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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암[편집]

1[편집]

영민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면서

「뭐라구요?」

하고, 다시 한번 물었을 때 기미꼬는 잠깐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악마의 방이라구요.」

「악마의 방?」

시퍼런 비수로 가슴 한 복판을 쿡 찌르는 것 같은 한 마디였다.

영민은 심각한 안색으로 얼마동안을 부처님처럼 묵묵히 앉아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 언제 떠나 갔읍니까?」

「이튿날 새벽에 떠났어요.」

「어디로 떠났읍니까?」

「저희도 그걸 물어 봤었지만 어디로 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그런 말을 하셨답니다. 정거장에 나가 보아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차를 타신다구요.

정처없는 먼 여행을 떠나신다고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겨놓고 갔어요.」

「아아 ──」

하고, 신음을 하며

「그 시각에 차는 어디로 가는 차가 있읍니까?」

「새벽에는 약 十五[십오]분 가량 사이를 두고 동경행 급행열차와 대관행 보통열차가 있는데 어느 것을 탔는지 자세히 모르겠어요.」

「잘 알았읍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세요?」

「해안선을 잠깐 산보하고 오겠읍니다.」

「아, 그러세요. 식사 준비는……」

「그만 두세요. 오후 차로 곧 떠나겠읍니다.」

「그럼 다녀 오셔요.」

기미꼬는 현관까지 따라 나오면서 전송을 하였다.

그 길로 영민은 「우미가사끼」를 향하여 걸음을 옮기었다.

사오일 전에 유경이가 걸어간 길이라 생각하니 수심 많은 유경이의 허둥지둥 걸어간 발자취가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자기를 저주하면서 유경은 이 길을 걸었으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쑤시는 듯 아팠고 슬픔에 가슴이 메이었다.

이윽고 「우어미가사끼」에 다달은 영민은 비탈진 들길을 내려가서 동굴을 벗어 나갔다. 그리고는 부부암으로 건너 가서 저번 에 유경이와 나란히 앉았던 바위로 올라가 보았다.

흰 구름이 한참 남쪽 하늘아래 풍치있게 떴다. 먼 수평선 위에서 흰 돛이 한 개 개미새끼처럼 아물 거린다.

「유 ― 경 ― 이」

돌연 영민은 그 어떤 격정에 휩쓸리어 바다를 향하여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쳐 보았다 그러나 . 거기 대한 대답은 솨아솨아 하는 어지러운 파도 소리 뿐이다.

「유 ― 경 ― 이」

한번 더 영민은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갈매기도 모두가 나를 버렸다!」

무한의 고독이다. 이 넓은 바다를 두 팔로 힘껏 껴안고 영민은 목을 놓아 울고 싶다.

그때 이상한 글자가 하나 문득 영민의 시선을 붙잡았다. 반 년 전 유경이와 영민이가 합작을 하여 “Love(사랑) × 100=Marriage(결혼) ── 이라고 써 보았던 바로 그 바위 위에 그것은 벌써 반 년 동안의 거센 풍상으로 말미암아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 바로 그 바위 위에 역시 흰 조개껍질로 다음과 같은 세 글자가 새로히 쓰여져 있었다.

── 악마암(惡魔巖) ── 그 세 글자를 보는 순간 영민은

「앗!」

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그것은 분명히 유경이의 필적이 아닌가.

2[편집]

「악마암! 악마의 바위!」

영민은 그렇게 외치면서 바위 앞에 우뚝 마주 섰다.

육중한 쇠망치로 머리를 한 대 힘껏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일 찰나를 영민은 느끼면서 멍하니 바위의 글자를 바라보다가

「유경이, 너무 하다! 이건 너무 가혹하다!」

하고, 고함을 치며 주먹으로 바위를 무섭게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바위는 촌극(寸隙)의 움직임이 있을 리 없다. 도리어 영민의 부르짖음을 비웃는 듯이 태연하다. 너무나 태연하다.

「아아 ──」

영민은 마침내 「악마암」이라고 씌인 바위 위에 이마를 부비며 두 손으로 머리털을 움켜쥐고 울었다.

「유경이, 단 十[십]분 만 ── 아니, 단 五[오]분 만이라도 왜 나를 만나 주지 못 했소?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고……사랑은 노력으로써만 굳어진다고 한 나의 말을 왜 잊었소 ? 유경이, 왜 좀더 우리들의 사랑을 위해서 노력하지 못했소? 잘못이 있다면 고칠 수도 있는 것이고 오해가 있다면 풀 수도 있는 것이 아니요? 그처럼 우리들의 사랑이 식었던가요? 그처럼 우리들의 사랑이 평범했던가요……」

영민은 다시 두 손으로 바위를 두드리며

「하늘이여, 하늘에 만일 뜻이 있다면 오 유경이란 한 사람의 여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저버린 이 백 영민의 진실한 뜻을 그에게 전해 주십시요! 온갖 기반(羈絆)과 온갖 질곡(桎梏)을 벗어나 오로지 한 사람 오 유경이와의 참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제 뜻을 그이에게 전해 주시요!」

영민은 팔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바위에서 머리를 들었다. 조개 껍질을 한 개 집어 쥐고 「악마암」이라고 씌인 유경의 글씨를 벅벅 지워 버렸다.

그리고는 마루 그 옆에다 ── 연모암(戀慕巖) ── 이라는 세 글자를 정성드려 써놓고 영민은 부부암을 떠났다.

길게 뻗친 백사장 위에 오후의 태양이 눈부시게 내려 쪼인다.

유경이와 이 길을 걷던 반 년 전에는 배 돛대도 갈매기도 구름도 산도 바위도 물결도 ── 온갖 유상(有相)이 자기를 두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건만 오늘의 그것들은 어이하여 이처럼도 쌀쌀하고 무정하고 보고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버리는고?

영민은 곧장 여관으로 돌아와서 기미꼬에게 인사를 하고 「아다미」 역으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이윽고 우르렁 거리면서 닿는 하관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떠난다.

영민은 기차 승강구에서 부처님처럼 우뚝 서서 멀리 눈 아래로 감실감실 사라지는 「아다미」항구를 성난 짐승처럼 무섭게 노려 보았다.

「뚜우, 뚜우, 뚜우 ──」

돌연 기적이 울리자 기차는 쏜살같이 칼칼한 「단나 . 턴넬」속으로 위잉 하고 기어들어 갔다.

석탄 가루가 영민의 옆 얼굴을 바늘처럼 무섭게 두드린다.

영민은 그대로 버티고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나간 날의 유경이와의 가지가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안타깝게, 애절(哀切)하게 영민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아아, 유경이, 그대 어디로 갔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