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9장
악마의 방
[편집]1
[편집]〈어린애를 낳는 것까지 유경의 감정은 거부를 했었구나!〉 그처럼 도 심각하게 자기를 오해할 줄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일이 공교롭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모든 조작은 오 창윤씨의 소실로 들어간 춘심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날 영민은 병원을 나와 「소화 제빵」으로 가서 배달을 마치고 무슨 뜻하지 않은 소식이나 있을까 하고 하숙으로 돌아 왔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불안에 찬 하룻밤이 지났다.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유경의 기숙사와 「오오다니」 산과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역시 유경으로부터는 하등의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영민은 빵 배달을 하는 자전거 위에서나 또는 학교로 가는 행길 가에서 양장을 한 젊은 여자만 보면 유심히 얼굴을 들여다 보곤 하였다. 으슥한 골목 같은 데서 유경의 창백한 얼굴이 불쑥 나설 것만 같았다.
또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이 지났다. 그래도 유경의 소식은 묘연하다.
그이상 더 영민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유경을 위해서, 유경을 찾기 위해서 향상 움직이고 있어야만 그래도 마음이 편했다. 반 시라도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괴로웠다.
이리하여 유경이가 행방불명이 된지 닷새만에 영민은 「소화제빵」에서 약간의 여비를 취해 가지고 동경 역을 떠나 하관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는 유경이가 혹시 귀국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가족에게 전보를 쳐 볼가도 생각하였으나 그러나 간단한 전보만 가지고는 사건이 더 복잡만 해질 것 같아서 몸소 나가서 유경의 부모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아뢰고 져야만 될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주여. 제발 유경을 선도 하십시요!」
차창에 흐르는 「시나가와」 「요꼬하마」의 어지러운 아침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영민은 마음 속으로 고요히 합장을 하였다.
「여기에는 누구 하나 그른 사람이 있을 리 없읍니다. 다만 희롱을 즐겨하는 악착한 운명의 조작이 있을 따름이오니, 주여, 어린 영혼을 저바리지 마시고 인도하십시요!」
영민은, 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교인들처럼 영민은 신령하신 주님 예수 .
그리스도의 보호를 간절히 원했다.
「아아, 유경이, 유경이!」
영민은 입속 말로 유경의 이름을 수 없이 불렀다.
지나간 닷새동안 영민은 그저 놀라고 당황하여 몸과 마음이 불덩어리처럼 되어서 뛰어 다니느라고 유경이의 그리움을 오늘처럼 절실히 느껴 보지를 못했다.
그랬던 것이 이처럼 한가로이 열차에 몸을 싣고 보니 지나간 날의 유경이가 그리울 대로 그리워 지는것이다.
「유경이, 글쎄 이게 어찌 된 일이요!」
영민은 자꾸만 울고 싶다. 커다란 소리를 내어 유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민은 어린애처럼 울고 싶다.
「그처럼 진실하고 그처럼 아름답게 나를 사랑하고 귀애하던 유경이, 유경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밖에 흐르는 백사장과 바다와 갈매기떼를 하염없이 내다보는 영민의 눈자욱에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그때
「아다미, 아다미!」
하고,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조그만 손가방 하나를 들고 영민은 마치 몽유병 환자인양 정신없이 차에서 내렸다.
영민에게 있어서 「아다미」 항구는 유경이 그 자체처럼 그리운 곳이다.
2
[편집]어째서 내렸는지 자신도 알 수 없다.
그저 정신없이 꿈결을 걷는 것처럼 「아다미」역에 내려버린 영민이었다.
마치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서울이 아니고 곧 이 「아다미」였던 것처럼 영민은 내려버렸다.
전번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렸던 역 앞 언덕 위에 오늘은 유월의 잡초가 무성해 있다.
「벌써 반 년 전이다.」
영민은 감개무량한 듯이 역을 나섰다.
달려드는 여관 보이들을 간신히 물리치고 영민은 꿈 속을 걷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언덕 길을 해안선으로 내려 갔다.
七[칠]월이 가까운 해안선에는 벌거숭이 조무래기들이 날뛰고 있다. 활채 같이 휘어진 해안선 맨 끝 「우어미가사끼」에는 추억의 부부암이 둥실 떠 있었다.
그 둥실 떠 있는 부부암을 바라보는 순간, 오 유경에의 향수(鄕愁)가 자즈러들 것처럼 영민의 가슴을 쑤셔 댔다.
아프다 가슴이 . 아프구나! 육체의 아픔을 영민은 맛 보는 것이다.
부부암을 머엉하니 바라보면서 허둥지둥 기념비 앞을 지나려 하였을 때였다.
「아, 학상이 아니세요?」
하고,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오른편 머리 위에서 들렸다.
올려다 보니 ── 아, 참 저번에 들었던 바로 그 여관이 아닌가.
그 여관 이층에 빨래를 널고 있던 하녀 기미꼬가 걷어 올렸던 옷자락을 내리워 빨간 「고시마끼」를 가리우면서
「아이, 어쩌면 집에는 들리지 않구 그냥 지나가셔요?」 하고. 반가운 얼굴을 짓는다.
「그만 저도 모르게 깜박 잊어 먹구요.」
기미꼬는 층층대를 내려오며
「어서 들어 오세요. 그런데 왜 두 분이 같이 오시지 않구 그처럼 따로따로 댕기세요?」
영민은 현관으로 들어 가면서
「에?……」
하고,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때 기미꼬는 헐레벌떡 뛰어내려와서 인사를 하기가 바쁘게
「저번에 부인께서 혼자 오시구……왜 그처럼 따로따로 댕기세요?」
그 말에 영민은 후닥닥 놀라며
「뭐요? 누구가 왔었다구요?」
하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아니, 부인께서 오셨던 걸 모르세요?」
기미꼬도 어리벙벙이다.
「언제요? 언제 왔었읍니까?」
「사오일 되었어요.」
「사오일!」
아, 그렇다 영민이가 「오오다니」 산과에 찾아 갔던 날이다.
「아아, 유경이가 왔었구나!」
하고, 영민은 흥분한 어조로
「그래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까? 며칠이나 묵어 갔읍니까?……」
하고, 연거퍼 묻는 말에
「하룻밤 묵어 갔어요. 하여튼 올라 오세요. 올라와서 천천히 이야기 하세요 암만해두 좀 이상한 . 것 같아서 혹시 그렇지나 않나 하고 생각했더니 정말 댁에는 알리지 않구 혼자 왔었군요.」
그러면서 기미꼬는 영민을 이층으로 안내하였다.
영민은 그 어떤 헤아릴 수 없는 불길을 전신에 느끼면서 기미꼬를 따라 올라갔다.
전번에 묵은 바로 그 추억 많은 방이다.
3
[편집]기미꼬가 차를 가지러 내려간 동안 영민은 그 회상 깊은 방안을 휘 둘러 보았다.
모든 것이 반 년 전 그날 밤과 꼭 같다. 「도꼬노마」에 걸린 잇챠(一茶 [일다])의 액자며 그 밑에 놓인 오다후꾸」(御多福[어다복])며 유경이가 영민의 눈을 가리우고 백년이라도 그러구 서 있겠다던 유리창 밑 베란다며…… 아아, 그 베란다에서 자연에 축복 받은 두 젊은 영혼이 감격과 함께 주고 받던 애달픈 애사(愛詞)의 추억이여!
「그러나 모든 것은 갔다! 유경이와 함께 갔다!」
인생의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매듭(節[절])이 하나 뻥 하고 가슴 속에 뚫려진 것 같은 공허감이다.
그 허무한 공허감에 사로잡힌채 영민은 베란다 앞으로 걸어가서 가만히 걸터앉아 보았다. 알린알린 하니 닦이운 베란다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자기 인생에는 이처럼도 격동하는 변화가 있었건만 방안의 모든 것이 반 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영민에게 꿈결만 같았다.
「유경이도 역시 이 방이, 이 베란다가 그리워서 여기를 찾아 온 것이로구나……」
그때 기미꼬가 차를 들고 올라 왔다.
「한 잔 드세요.」
하고, 차를 권하며
「어찌 된 셈이세요? 두 분이 다 원기가 없어 보이니……」
유경이도 원기가 없어 보이었어요?」
「네, 무척! 병인처럼 창백한 얼굴이었어요. 아, 참 부인께서 임신하셨죠?」
「네에.」
꼭 그래 뵈드군요 「 . 감출려구 하지만 왜 모르나요? 무슨 마음 고생이 심하면 나쁘다던데요. 너무 사이가 좋아서 싸움을 하셨나요?」
「아니요.」
「글쎄 그랬으면 괜찮지만두요. 그날 새로 한 시쯤 해서 여행용 가방을 들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전번에 들었던 그 방이 비었느냐구요. 그러니까 바로 이 방이지요. 그때 마침 이 방에는 손님이 들어 있었지요. 그래 그런 말을 했더니, 그분은 쓸쓸한 표정으로 얼마동안 잠자코 있다가, 그 방에 들은 손님이 언제 떠나느냐고 묻겠지요. 그래 그날 저녁 차로 떠난다고 했더니, 그럼 그 손님이 떠나거든 그 방을 자기에게 하룻밤 빌려 달라구요. 그래 그 방이 그처럼 마음에 드시면 얼마든지 그러시라고 했더니, 그럼 가방을 좀 맡았다가 그 손님이 떠나거든 그 방에다 갖다 놔 달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동안 해변을 산보하고 오겠다고요.」
「저 「우어미가사끼」로 가지 않았어요? 」
「그리로 갔었어요. 아마 부부암이 무척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죠.」
「그래 어떡했어요?」
「저녁 때 손님이 떠나간 뒤에 부부암에서 돌아와서 목욕을 하시구 저녁을 자시구……아, 참 저녁을 자실 때 그분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무슨 말을 했읍니까?」
「바로 지금 학상이 앉으신 그 자리에 앉아서 두어 술 진지를 뜨시는 척하고 술을 놓으면서 입맛이 없어서 통 식사를 못 하신다구요. 그리고는 방을 한 번 둘러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방을 가르쳐」
「악마(惡魔)의 방」이라구요.」
「뭐, 뭐라구요?」
영민은 당황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