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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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피[편집]

1[편집]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영민이가 눈을 떴을 때는 일곱 시가 거의 가까운 무렵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나미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미에는 없고 잠자리만이 되는 대로 흩으러져 있었다. 영민이가 잠이 든 사이에 나미에는 돌아간 것이다.

연필로 되는데로 내갈긴 종이 조각이 한 장 베개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아마도 미스터 . 백의 잠자리와 연애를 할 팔자를 타고난 사람 같다. 두번째의 이 모욕을 나는 달갑게 받고 돌아 가거니와 세번째의 기회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는 나미에에게는 이처럼도 자존심이란 것이 없었던가! 오호라, 나미에여, 오호라, 나미에여!」

영민은 부화가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서 방바닥에 내던지는 순간, 책상 위에 놓인 전보가 항상 시야에 뛰어 들었다.

「여덟 시 반 도착, 유경 ──」

어제 새벽에 경도서 친 전보였다.

영민은 부리나케 세수를 하였다. 그리고는 조반도 먹지 않고 하숙을 뛰쳐 나갔다.

「대지급으로 「메지로」까지!」

영민은 택시를 잡아 타고 그렇게 외쳤다.

「메지로」 여자 대학 기숙사 앞에서 영민은 차에서 내려 정문을 들어 섰다.

그러나 유경은 없었다.

유경이와 한 방에 있는 후미꼬라는 일본 학생에게 물었더니

「아, 참 유경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냐요?」하고, 도리어 이편에서 묻는다.

「왜요? 유경씨가 어째서요?」

긴장한 얼굴로 영민은 물었다.

「귀국했다가 오늘 새벽 차로 왔다는데……암만해두 좀 이상해요.」

「왜요? 어서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영민은 애원하듯이 달려 들었다.

「글쎄 이상하지 않아요. 오자마자 보스톤 . 백에다 옷을 몇 가지 챙겨 가지구 도루 나가는 거야요. 그래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 누구한테 책을 한 권 빌린 게 있는데 그걸 갖다 주러 가는 길이라구요.」

「책이라구요?」

「네, 그래 누구한테 빌린 책이 그처럼 급히 서두르냐고 물었더니, 뭐 바로 역전에 있는 무슨 병원이라던가? 아, 참 「오오다니」 병원에서 책을 한 권 빌린 것이 있다구요.」

「그래서 어떻게 됐읍니까?」

「그래 책을 돌려 주러 감 뽀스보 . 백은 무엇하러 갖구 가느냐구 그랬더니, 빙그레 한번 쓸쓸한 웃음을 입가에 띠울 뿐, 암말없이 나가 버렸어요.」

「잘 알았읍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니, 별로……」

그러다가 영민은

「미안하지만 유경씨가 돌아 오거든 꼭 十[십]분 동안만 나를 만나 주기 바란다고 전해 주십시요.」

「네, 전해 드리구 말구요.」

「그리구……」

영민은 잠간 생각하다가

「미안하지만 편전지를 좀 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로 전하는 것보다 편지를 써 놓고 가겠읍니다.」

「네. 그러세요.」

후미꼬는 편전지를 영민에게 내 주었다.

2[편집]

후미꼬의 편전지를 빌려 영민은 당황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유경이에게 썼다.

유경이.

모두다 오해입니다. 만나서 단 十[십]분만 이야기 하면 오해는 반드시 풀릴 것입니다. 기숙사로 돌아 오는대로 꼭 나를 한번 만나 주시요. 영민은 하늘도 땅도 부끄럼이 없읍니다.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야!

유경이 제발 일을 저질지 마시요! 일을 저질기 전에 단 十[십]분의 시간을 영민에게 허용해 주시요. 유경이! 하늘 아래, 땅 위에 단 하나인 나의 사랑 오 유경의 인격을 내가 왜 모욕하리까? 그럴진대 차라리 나 자신의 인격을 모욕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유경이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생각하시요. 새로운 생명 ── 유경이와 나와의 사랑의 결정인 새롭고 귀여운 생명이 고이고이 움트고 있는 귀중한 몸이요. 유경이가 만일 경솔히 일을 저질러 놓는다면 유경은 한을 일생에 남길 것이니, 유경이, 유경이, 원컨대 十[십]분의 시간을 나에게 빌려 주시요!

경건한 마음으로 영민 씀 봉투에다 넣고 봉함을 한 후에 영민은 편지를 후미꼬에게 내 주면서

「유경씨가 돌아 오거든 꼭 이 편지를 전해 주십시요.」

「네, 염려 마세요.」

「부탁합니다.」

영민은 창황한 걸음으로 기숙사를 뛰쳐 나왔다.

「어디로 가나?……그렇다! 「오오다니」 병원이다!」

영민은 「메지로」역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음질을 쳤다. 다름박질을 치면서

「하늘이여, 오 유경에게 실수가 없도록 인도하소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을 하였다.

구슬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메지로」 역전까지 다달은 영민은 「오오 다니」 병원을 찾아 헤매었으나 그리 쉽사리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 하는 수 없이 파출소로 들어 가서야 간신히 병원의 소재지를 알았다.

그것은 의외에도 보통 병원이 아니고 산부인과였다.

그즈음 늙은 오오다니 의사는 마침 조반을 먹고 진찰실에 나와서 담배 한 대를 피고 있을 때였다.

「저는 백 영민이란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혹시 이 병원에 오 유경이라는 학생이 다니지 않았읍니까?」

모자를 벗어들고 영민은 공손히 물었다.

「아, 「메지로」 여대에 다니는 조선 학생 말이지요?」

늙은 의사는 그러면서 영민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네, 그이가 오늘 식전에 여기에 찾아 오지 않았읍니까?」

「왔었소. 와서 내게서 빌려갔던 책 한 권을 돌려 주고 돌아갔지요. 좋은 이성과 감정을 구비한 아주 똑똑한 여인입니다.」

「그것은 무슨 임신에 관한 서적이 아니었읍니까?」

「그렇소.」

「아, 역시……」

저번동경 역에서 헤어질 때 유경이가 부끄러운 듯이 자기에게 잠간 보이던

「임신과 섭생」이라는 책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3[편집]

그 학생이 왔다가 「 어디로 갔는지……혹시 무슨 그런 말을 남기고 가지는 않았읍니까?」

그 말에 늙은 의사는

「응……」

하고, 얼굴의 표정을 가다듬고 자기의 예감이 들어 맞았다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끄덕거리며

「당신이 그 여자에게 임신을 시킨 책임자입니까?」

하고, 영민의 근심스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아, 그래요?」하고, 노인은 또 한번 머리를 끄덕거렸다.

시정에 흔히 보는 일개 의사라기 보다도 어딘가 학자와 같은 무게있는 표정이 항상 노인의 얼굴 위에 떠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트러블이 생겼지요?」

「네, 약간……트러불이라기 보다도 나를 오해하고……」

영민은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유경이의 신상에 일어난 일을 근심해 주는 것 같은 노인의 태도가 마음에 무척 미더워졌던 때문이다.

「그런것 같아서 나도 잘 타일러 보냈지요. 저번에는 단지 귀찮아서 낙태를 시키겠다고 하더니, 오늘 와서는 정말 진심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읍니다.」

「아아, 그래 뭐라고 말씀하셨읍니까?」

영민은 이마의 땀을 씻으며 열심히 물었다.

「물론 타일렀지요. 그 학생과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바꾸었읍니다.」

「선생님, 임신을 하면 정말 해산을 해야만 될까요?」

「무슨 그런 일이 정말로 생겼읍니까?」

「네, 정말로 그런 일이 생겼어요.」

「음 ── 그러나 임신을 한 후 해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당신은 혹시 당신의 어머니 배에서 나오지 않아도 되었을런지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하등의 의욕(意慾)도 없이 나왔으니까요.」

「그러나 대자연의 신비로운 의욕이 있었읍니다. 임신하는 것이 자연의 의욕에서 나온 소이라면 해산하는 것도 자연의 의욕을 존중해야만 되겠지요.」

그랬더니 그는 힐끗 한번 나를 쳐다 보면서 선생님의 「 말씀을 잘 알았읍니다. 그럼 선생님은 「버스 콘트롤」(産兒制限 [산아제한])을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다시 질문의 화살을 던져 왔지요.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읍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임신 문제를 지성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훌륭한 여성이었읍니다.」하고, 오오다니 의사는 일단 거기서 말을 그쳤다.

「선생님, 어서 다음을 말씀해 주십시요. 저는 一[일]분 一[일]초가 바쁜 몸이 올시다. 제가 이러고 앉았는 동안에도 혹시 유경이가 그 어떤 경솔한 행동이나……?」

영민은 창백한 얼굴로 조급히 물었다.

4[편집]

늙은 산부인과 의사는 초조하게 앉아있는 영민을 향해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래 산아제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길래 ── 하나의 생명이 나고 하나의 생명이 죽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엄숙한 사실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애를 낳기 때문에 당신이 굶어 죽고 당신의 가족이 굶어 죽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의 민족이 굶어 죽는다면 당신은 모름지기 낙태를 시키지 않아서는 아니되겠지요. 이것이 사회정책(社會政策)에 있어서의 산아제한입니다.」

「아냐요. 그런 의미로서 물은건 아냐요.」

「아, 그럼 결국 낳고 싶지 않은 사나이의 애를 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말이지요?」

「물론 그것두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제 감정문제구요. 이런 중대한 문제를 감정으로써 해결 짓는다는건 위험한 행동이니까요.」

「그럼 뭡니까?」

「의학상으로 보아서 산아제한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요?」

「암, 있구 말구요. 그러나 보아하니 당신의 신체는 극히 건강하오. 모체에 위험이 없는 한 당신은 해산할 의무가 있는 것이요. 그것은 마치 임신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것이 대자연의 법측칙 동시에 의학적 입장에서의 산아제한이지요.」

「그러나 불신(不信)한 사나이의 피를 받은 태아가 역시 불신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나온다면 그것은 사회정책적으로나 또는 우생학적(優生學的)으로 보아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아니될 중대문제가 아니예요? 저는 그것을 제일로 무서워 해요.」

「물론 정신병자 같은 우생학상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낙태의 정당화(正當化)가 시인(是認)되지요. 그러나 단지 불신한 사나이의 피를 받았다는 이유로서 만은 그것이 허용되지가 않읍니다.」

「어째서요? 부모의 피가 아이에게 작용(作用)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면 유전학(遺傳學)이라는 하나의 학문은 이 세상에 없어도 무방하지 않아요?」

「물론 작용되지요. 그러나 정신병자 같은 극심한 예는 모르지만 단지 불신하다는 이유만을 가지고는 하나의 엄숙한 생명을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어째서요? 한 개의 사회악(社會惡)을 없애기 위해서는 불신한 피를 제거(除去)해야만 될 것이 아니야요?」

「학생, 학생의 그 고매하고 결백한 정신에 나는 진심으로 동정을 하오.

당신과 같은 분이 절반만 되더라도 이 세상의 사회악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병 같은 것과는 달라서 후천적(後天的)으로 부모의 교육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정화(淨化)되는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멘델」의 법칙은 반드시 그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지는 않읍니다. 안심하시요!」

「그때 그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아주 솔직한 태도로」

「선생님, 고맙습니다. 만일 제가 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의 생명은 오로지 선생님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병원을 나가 버렸지요.」

그리고는 늙은 의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입속 말로 중얼거렸다.

「주여, 그 여인으로 하여금 실책이 없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선생님 감사합니다!」

영민은 눈물을 글썽글썽 하면서 의사의 손목을 덥석 부여잡고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