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7장
애증 무한
[편집]1
[편집]불꽃이 튀는 순간 유경은 눈 앞이 아찔해졌다.
이윽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 마누라가 뭐라고 한다. 아마 유경이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는가 보다.
쿵쿵쿵 복도를 걸어 오는 발자국 소리에 뒤이어 쿵쿵콩 여자의 가벼운 발자취 소리가 따라오며
「흥, 뭐 충돌이야? 거 미남자는 다르구려. 이왕 충돌한 바에야 예쁜 아가씨 선이라도 좀 보구 갈까?」
층층대를 올라 오면서 하는 여인의 혀꼬부라진 말소리가 유경의 신경을 극도로 긁어 주었다.
유경은 오들오들 떨면서 , 그러나 오들오들 떠는 자기의 날카로운 신경을 애써 억누르며 영민이가 나타날 미닫이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섰다.
그때, 미닫이를 홱 열며 영민이가 선뜻 방안에 들어 섰다.
「아, 유경이! 유경이, 언제 왔오?」
영민은 달려가며 유경의 손을 정답게 덥석 붙잡았다.
「아니, 전보 한 장 없이 어떻게 이처럼 갑자기 돌아 왔오?」
그러나 유경은 대답이 없다. 어여쁜 부처님의 그것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자기 손을 잡은 영민의 손목을 무슨 더러운 물건이나 치워버리듯이 살그머니 뿌리쳤다.
그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라 올라온 나미에가 유경을 힐끗 바라보며
「옳지, 이처럼 예쁜 아가씨가 졸졸 따라 다니니까 미스터 . 백이 나를 그처럼 학대를 했었군!」
그러면서 영민의 어깨에다 팔을 얹으며 유경의 채림채림을 아래 위로 기미쩍게 훑어보다가
「음, 그만 했음 괜찮어! 그러나 어여쁜 관음보살처럼 표정이 없는 것이 옥에 티랄까?……흐흥, 약간 질투가 나는걸!」
그러나, 유경은 대꾸가 없다. 한 번 힐끗 나미에를 쳐다 보았을 뿐, 유경의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두 눈동자는 여전히 영민의 얼굴 위에 있었다.
「말을 삼가시요.」
영민은 자기 어깨 위에 휘감긴 나미에의 팔을 내리웠다.
「유경이, 오해 마시오. 이 여자는 옛날 내 중학 선생의 부인이었던 사람인데 오늘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지요.」
「………」
여전히 유경은 부처님이다. 나미에의 말과같이 어여쁜 관음보살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유경이, 조금도 오해 말아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저녁을 먹고 헤지려는데 자꾸만 하숙집까지 바라다 준다고 그래서……」
그 순간 오들오들 경련을 이르키던 유경이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나면서 영민의 뺨따구를
「찰싹!」
하고, 내갈겼다.
변명은 그만둬요 「 ! 그것은 당신의 인격의 소모(消耗)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아 유경이, 그것은 오해요!」
영민은 유경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놓아요. 내 손은 당신에게 잡힐만큼 더럽히지는 않았어요!」
「유경이!」
「안 놀테야요?」
「이 오해가……이 오해가 풀릴 때까지는 놀 수가 없소.」
「에이, 이 더러운 사나이!」
하고, 외치면서 유경은 영민의 손을 힘껏 뿌리쳐 버렸다.
그때 나미에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책상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여 물고 턱을 고이면서
「흥, 괜찮어! 어여쁜 아가씨, 그만 했음 괜찮어!」
2
[편집]「그건 정말 유경의 오해요. 유경이, 마음을 진정해 주시요. 이 여자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까 ──」
「이 비겁한 사나이! 어째서 자기가 취한 행동에 대해서 정정당당히 시인(是認)을 못하는거요? 사내답지 못하게 그처럼 구구한 변명을 왜 늘어놓는 거요? 오늘밤의 일만을 당신이 극력 변명했댔자 소용없어요. 나는……당신이 이중인격(二重人格)의 소유자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어요.」
「뭐라구요? 이중인격이라구요?」
「흥, 암만해두 외국 영화를 보는것 같은걸……내가 조선 말을 모른다고 무얼 열심히 변명하는 모양은 모양인데……하여튼 충돌은 상당히 재미있는 충돌이야.」
몽롱한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미에는 후우하고 천정에 담배 연기를 내 뿜는다.
「당신 말을 못 삼갈테요?」
영민이가 꿱하고 소리를 쳤다.
「흥, 소리만 크면 변명이 될 듯 싶어?……가램가지! 허는 수 있나? 후참자(後參者)가 되고 보니 양보할 수 밖에……」
나미에는 일어서며
「미스터 . 백 그럼 오늘밤 재미 많이 보슈. 그럼 난 또 다음 순번(順番)을 기다릴 수 밖에……호남자는 암만해도 다르긴 달라!」
그러면서 나미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층층대를 내려가다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처럼 취한 나미에가 제대로 집으로 돌아갈런지 의문이다.
「자아, 유경이의 오해를 풀어 드리리다.」
나미에가 사라진 것을 영민은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그만 두세요. 당신이 변명을 함 변명을 할수록 나는 당신의 사내답지 못한 비겁한 인격을 발견할 따름이니까요. 그러니까 암말 말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함 돼는 거야요.」
「대답을 하지요. 무엇이든지 솔직히 대답을 하지요.」
「당신은 저 여자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기생 박 춘심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죠?」
「뭐?……박 춘심이?」
영민은 놀랐다.
「아, 저 지금 유경씨의 부친과 살림을 한다는……」
「그런건 물을 필요가 없구요. 내 아버지가 아무런 짓을 하건 그건 나에게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춘심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다만 춘심이가 나에게 대해서……」
「당신이 처음으로 동경에 건너올 때 기차에서 그이와 입술을 바꾼 사실이 있었죠?」
「아, 그건……그건……」
「왜 분명히 대답을 못해요?」
「그건 춘심이가……」
「저번 겨울 방학에도 나 몰래 천일관에서 춘심이와 만났죠? 이 손수건이 증거야요!」
하면서 유경은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영민의 면상에다 내 갈겼다.
「아, 이건 내가 모르고 떨어뜨린 것을 춘심이가.」
「에이, 이 자존심 없는 사나이! 어렸을 때 허씨 딸과 결혼을 한 사나이가 대체 누구요?」
「옛, 허씨 딸?……」
「놀래긴 왜 놀라는 거요?」
「허씨 딸과 결혼을 했다구요? 그건 대체 누구가 그런 말을……」
「당신은 꼭 증인이 있어 알겠수? 에이, 이 비겁한 사나이!」
하고 유경은 부르짖자 , 마자 한 손으로 눈물을 거두며 쏜살같이 층층대로 뛰어 내려갔다.
「잠깐만……유경이 잠깐 기다려요!」
그렇게 외치면서 영민은 꿈결처럼 유경의 뒤를 허둥지둥 따랐다.
3
[편집]「유경이 전부가 오해요! 잠깐만……잠깐만 기다려요!」
영민이가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고함을 치며 층층대를 부리나케 따라 내려가다가 그만 층층대 중간에서
「앗!」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만취한 나미에의 몽뚱이가 층층대 중간에서 쿨쿨 잠이 들어 있다가
「이거, 왜들 야단 법석이야?」
하고,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영민의 몸뚱이를 꽉 껴 앉았다.
「유경이! 잠깐만 기다려요! 잠깐만 기다리면 모든 오해가 풀어질 테니……」
영민은 다시 몸을 일으키면서 그렇게 고함을 쳤다.
「내버려 둬요. 그래야 후참자도 때로는 덕을 볼께 아냐?」
그러나 그때는 벌써 유경은 현관문을 뛰쳐 나가 마치 돌팔매 하듯이 어둠 속을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호호……븟쨩(어린것), 왜 이리 철없이 덤비는거야?」
유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쓰러졌던 몸을 다시 일으키려는 영민의 팔소매를 나미에는 꽉 붙잡았다.
「놔요!」
「재미 있는 영화 같애!」
「안 놀테요?」
「재미 있는 외국 영화 같대두」
「에잇!」
영민은 나미에를 힘껏 뿌리치고 현관을 향하여 복도를 뛰어 나갔다.
「호호호호……「퍼스트」가 기권(棄權)을 했으니 「세컨드」가 「플레이」를 해 볼까? 호호호호……그러나 날 너무 박대하면 미스터 . 백 후일 좀 재미 없을걸!」
그런 말을 등골에 들으면서 영민은 현관을 뛰쳐 나갔다.
그러나 이미 유경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다.
영민은 골목을 빠져나가 행길을 달리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유경을 불렀다.
「유, 경, 이! 유…경…이!」
「도츠카」 그라운드 옆 길을 뛰어 내려오면서
「유경이! 오해는 반드시 풀릴테니 절대로……절대로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아요!」
하고, 캄캄한 하늘을 향하여 고함을 쳤다.
그러나 유경이의 대답은 없다. 다만 영민의 목소리만이
「우르랑, 우르랑……」
허공중에서 울려 올 뿐이다.
「와세다」정류장까지 영민은 뛰어 가 보았다. 그러나 유경인 보이지 않는다.
이번엔 「와세다」 대학 정문 앞까지 뛰어가 보았다. 그래도 유경이의 자태는 보이지 않는다.
「측루마끼쵸오」를 「야라이시다」까지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나 모두가 헛수고였다.
밤은 열두 시가 가까웠다. 때때로 파출소에 불리워 들어갔다. 불리워 들어간 파출소에서 영민은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 하고 전화를 빌려 「메지로」
여자대학 기숙사를 불러내서 유경이가 돌아 왔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사감 선생은 아직 유경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하는 수 없이 영민이가 하숙으로 돌아 온 것은 새로 두 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四[사]년 전 그날 밤 저녁, 나미에는 영민의 품속에서 어린애인 양 고스란히 잠들어었다.
영민은 아랫층으로 내려와 현관 옆 三[삼]조 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