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6장
은좌의 밤거리
[편집]1
[편집]그즈음 유경은 여덟 시 반 차로 동경역에 내렸다.
오늘 새벽 경도(京都)서 유경은 두 장의 전보를 영민에게 쳤던 것이다. 한 장은 하숙으로 치고 한 장은 학교로 쳤다. 둘 중에 어느 것이든지 하나는 볼 수 있도록 그처럼 두 장을 친 것이다. 그러니까 의례이 마중 나올 줄을 믿었던 영민이었으며 유경이었다.
그러나 영민은 통 보이지가 않았다.
한참동안 구내를 두리번 거리다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개찰구를 나와서 약 二十[이십]분 동안을 기다렸다.
아예 전보를 치지 않았으면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장 영민의 하숙으로 찾아 들어 갔을 것을 공연히 전보를 쳤기 때문에 이처럼 기다리는 것이라고 유경은 여러번 자신에게 나무랬다. 혹시 길이 어긋날까 하고
「五[오]분만 더, 五[오]분만 더 ──」
하면서 유경은 三十[삼십]분을 기다렸다.
긴 여행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유경의 신경이 한층 더 악화되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서부터 지니고 온 유경의 날카로운 신경이 아닌가. 거기에는 임신부로서의 신경과민도 있었겠지만 그것 보다도
「완전(完全)이냐? ──」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
하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려는 유경의 성품이 문제였다.
무엇 보다도 유경은 시장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민을 만나면 「긴자」
로 나가서 저녁을 같이 먹을셈으로 「누마즈」근방에서부터 배가 쪼르락쪼르락 하는 것을 참아왔다.
그런 것 이런 것 들이 함께 합쳐서 유경은 시계를 쳐다 볼 때마다 부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에이 그만 만나지 말고 이대로 영영 없어져 버리고 말면 어때?」
그런 생각도 하였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하듯이 아무 말없이 없어져버리는 것이 유경의 감정으로는 알맞는 행동이다.
「만나서 이러구 저러구 했댔자 무슨 소용이 있담. 나에게 있는 것은 완전이냐, 무냐? 건설이냐, 파괴냐? ── 그 둘 중에 하나 밖엔 없다.」
뜻뜻미지근한 타협적 행동은 유경의 생리에는 맞지를 않았다.
어렸을 때 유경은 새옷을 입고 진흙길을 조심성스럽게 걸어 가다가도 잘못하여 흙탕물이 한 방울 치마 끝에 뛰면 유경은 그만 화가 나서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버리곤 하였다.
유경은 그만 약이 오를대로 올라서 현관 밖으로 또박또박 걸어 나가자 택시를 잡아 탔다.
「대지급으로 「와세다」까지!
「네이.」
유경은 자기 기숙에는 들리지 않고 곧장 영민의 하숙으로 찾아 갈 셈이다.
차가 움직이자 또 쪼르락쪼르락 하는 소리가 뱃속에서 나자 유경은 문득
「임신과 섭생」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 올랐다.
「임신부는 절대로 공복(空腹)을 참지 말 것 ──」
유경은 곧 운전수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긴자」 四[사]정목으로 차를 돌려 주세요.
「네이.」
「오오데마찌」로 향하였던 자동차의 머리가 큰 원을 그리며 「유락쵸오」
로 돌아 섰다.
2
[편집]등화관제로 거리에는 희미한 가등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오다 가다 하나씩 켜져 있을 뿐 호화로운 은좌란 한낱 옛날의 전설인 양 아득하다.
그래도 아직 초저녁이라 사람들의 왕래는 여전히 빈번하였다.
「스끼야바시」와 「긴자」 四[사]정목 사이에서 유경은 택시를 버리고 어떤 조그만 레스토랑 이층에 올라가서 씁쓸한 「라이스 . 카레」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땠다.
식량 사정이 절박한 때의 시간을 넘기면 런치 한 그릇도 얻어 먹기가 힘이 들었다. 三十[삼십]분만 더 일찌감치 왔었던들 돈까스 하나 쯤은 더 얻어먹을 뻔 한 유경이었다.
「우유 없어요?」
「있읍니다.」
「주세요.」
「라이스 . 카레」 한 접시로 요기는 했으나 유경은 뱃속에서 고이고이 자라는 태아의 영양을 염려하여 우유를 청했다.
저번 동경을 떠나던 날 밤 신숙 모나미에서 영민과 더불어 비어를 먹던 생각이 불쑥 난다. 신궁 외원 벤취 위에서 영민에게 진실한 사랑의 강의를 들으면서 만금을 주고 봄 밤을 사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것이 불과 열흘 전의 일이건만 역시 유경의 기억에는 옛날의 전설처럼 아득하다. 그리도 화려하던 은좌의 거리가 암흑으로 변한 것처럼 행복하던 유경의 삶도 캄캄해졌다.
그래도 그이가 「 그럴 리가 있을까?」하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몇 만리 길을 단숨에 달려온 유경이었다.
한시 바삐 유경은 영민을 만나고 싶었다. 가슴을 우벼대는 애정의 의혹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민의 인격의 정체를 알므로써 자기 인생의 파멸을 기도(企圖)함이 유경이다운 행동이다.
유경은 방공 커튼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은좌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춘심이가 배앝은 독설(毒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다시 씹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전차 길을 건너 마즌편 골목에서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행길로 빠져 나오는 것이 희미한 가로등 밑에 보이었다.
하나는 학생이고 하나는 여자다. 여자 편이 남자 보다 더 술이 취한 모양 같았다.
그순간 유경은
「응? ──」
하고, 양미를 보았다.
「그이가 아닌가?」
비틀거리는 여인을 부축하듯이 하고 「스끼야바시」방면 어둠속으로 사라진 학생이 유경이게는 어쩐지 영민과 같았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나?」
유경은 자기의 생각을 부인하면서도 한편 희미한 가로등 밑에 나타났다 사라진 학생의 모습이 똑 영민과 같았다.
「환영이겠지. 착각이겠지!」
이 며칠동안 춘심이의 말을 너무 골똘히 생각해온 자기의 환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경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환영이 아닐런지도 몰라!」
하숙과 학교로 친 두 장의 전보를 하나도 보지 못한 영민이라면……
유경은 홀딱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었다. 그때 주문하였던 우유가 왔다.
그러나 우유를 먹을 생각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 유경은 요금을 치르기가 바쁘게 밖으로 뛰어 나왔다.
캄캄한 거리다.
유경은 두 사람이 사라진 「스끼야바시」쪽을 향하여 쏜살같이 따라갔다.
3
[편집]유경은 영민의 뒤를 쏜살같이 따라갔다. 꿈결 처럼 뛰어갔다.
정말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기 일생에 이러한 장면이 벌어질 줄을 정말 몰랐던 유경이가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무엇을 생각 했는지 유경은 행길 가에 우뚝 멎었다.
이 어두운 거리에서 따라갔댔가 두 사람은 만날는지 어쩔는지도 의문이었다. 아니, 그것 보다도 그런 추잡한 장면을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한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고 무섭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미스러운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만약 자기에게 한 자루의 권총이 있다면 무슨 서양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이중인격을 가진 영민의 가슴 한 복판에다 서슴치 않고 방아쇠를 잡아 댕겼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유경은 주차장(駐車場)에 머물러 있는 택시를 잡아 타고
「대지급으로 「와세다」까지!」
하고 외쳤다.
정말 꿈같은 일이기 때문에 자기의 착각인지도 몰라서 우선 영민의 하숙으로 가 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면서
「춘심이의 말이 맞는구나!」
하였다.
이윽고 「이이다바시」를 지나고 「에도가와바시」를 를 지나서 「와세다」에 다달았을 때
「와세다 어딥니까?」
하고, 운전수가 물었다.
「도츠카 그라운드 앞이야요.」
영민의 하숙은 그라운드 바로 뒤에 있는 조그만 담배 가게 이층이었다.
현관을 열고 안내를 청하니 낯익은 마누라가 나오면서
「아이,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영민씨 계세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그 말에 유경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구나!
「언제 나갔어요?」
요즈음 아침 일찌기 「 나가신 답니다. 일곱 시에 나가서 아직 안 돌아 왔어요.」
그러다가 생각이 난 듯이
「참 누구가 오신다구 전보가 왔는데……바루 나가신 뒤에 왔어요.」
「학교에는 나가는 가요?」
「나가시겠지요. 매일 가방을 들고 나가시니까요. 좀 올라 오세요.」
「나 올라가서 좀 기다리겠어요.」
「네, 어서 올라 오세요.」
이층 영민의 방으로 유경은 올라가서 전등을 켰다.
책상 위에 자기가 친 전보가 놓여 있었다. 유경은 책상 앞에 앉아서 마누라가 갖다 주는 차를 한 잔 마셨다. 목이 공연히 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수선 四[사]조 반이다. 책이라고는 교과서 몇 권 밖에는 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 것이 없다.
귀국할 때 거치장스럽다는 구실로 팔아버린 장서도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다 아까 그 술취한 여자에 대한 비용이었구나 하였다.
「타락한 사나이!」
유경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밖에서 자동차가 달려와 멎는 소리가 들렸다.
유경은 발딱 몸을 일으켜 유리창 너머로 행길을 내려다보다가 그만
「아 역시……」하고 외쳤다.
「분명히 아까 본 그 여자다!」
만취한 여자는 영민의 어깨에다 팔을 걸고 차에서 내리지 않는가!
「그순간 유경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