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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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입구[편집]

1[편집]

효자동에서 유경은 허벙지벙 아현동으로 돌아 왔다.

어머니에게는 다녀 왔다는 간단한 보고를 되는 대로 해 두고 곧 이 층 자기 서재로 뛰어 올라갔다. 뛰어 올라 가자 유경은 피아노 앞에 돌 팔매 하듯이 몸을 털썩 던지며 흰 건반 위에 실신한 사람처럼 쓰러져 버렸다.

「콰아 ── 앙!」

하는, 우렁찬 음률과 함께 흐늑흐늑 느끼는 유경의 울음 소리가 방안을 점령하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었던고?……

「영민씨! 영민씨! 당신이……당신이 그런 인물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했던 유경이었다.

하늘이 배반하고 대지(大地)가 배반을 하여도 인간 백 영민이만은 자기를 배반할 줄을 정말 몰랐다.

그러던 것이 이 어이한 노릇이뇨? 떳떳한 본처가 있는 사나이! 그 본처를 배반하고 춘심을 희롱한 사나이! 그 춘심을 배반하고 또다시 자기를 희롱한 사나이!

「춘심은 그를 악마라고 불렀다. 색마라고 불렀다!」

사람을 잘못 보지 않는다고, 준혁이와 아버지에게 그처럼 뻗쳐온 유경은 결국에 있어선 설익은 개살구에게 자기의 처녀를 고스란히 바친 셈이 아닌가!

「암만 그래두 네 인생은 二十[이십] 년 밖에는 안돼. 네 눈에는 잘 익은 능금 같아두 알구보면 설 익은 개살구야.」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뼈아프게 유경을 쳤다.

「행복이란 먼 산 너머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행복의 그림자」일런 진 몰라도 행복 그 자체는 아니요.」

하던 준혁이의 뿌리 깊은 한 마디가 혹독하게 유경을 내갈겼다.

그때야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유경은 눈물젖은 얼굴을 후딱 건반 위에서 들며 자기의 밑 배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아아, 이 일을 어찌 하노?……」

그순간 까지도 유경은 영민에게 받은 인격적 모욕만을 분해 하였고 영민에게 배반당한 애정만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을 유경은 발견하고 새삼스레 놀라는 것이었다.

「아아, 내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구나!」

벽에 걸린 「리스트」와 「쇼팡」의 초상화가 눈 앞에서 핑글핑글 맴을 돈다.

「인격의 모욕」이라던가 「애정의 배반」이라던가 하는 그러한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고 좀더 뿌리 깊은 하나의 현실 문제가 지금 자기의 뱃속에서 움트고 있지 않는가!

「이 일을 어찌 하노?……」

유경은 울음을 그쳤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될 중대한 순간임을 유경은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그 순간 유경의 머리에 후딱 떠 오른 것은 김 준혁 병원 약국에 놓여 있는 커다란 약장이었다.

그 약장 맨 윗 칸에는 「극약」이라던가 「독약」이라던가 하는 「렛텔」

이 붙은 수 많은 약병이 쭈루루 들어 있었다.

그 속에는 칼모친 「 「 」이나 혹은 「청산가리」 같은 독약도 있을 것이 아닌가?」

유경은 입속말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2[편집]

「어떻거면 그 약장에서 독약을 몰래 훔쳐 낼 수가 있을꼬?」

독약을 그리워 하는 일순간이 유경을 무섭게 습격해 왔다.

「독약을 마시고 내가 자살을 하면 그이가 와서 보고 눈물을 흘려줄까? 비웃어 줄까?」

그러다가 유경은 피아노 앞에서 발딱 몸을 일으키며

「아니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하고, 부르짖었다.

「나는 죽음이 편할지 몰라도……그렇게 되면 나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살아야 한다! 쓰던 달던 나는 살아서 이 어린 생명에 대해서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 태중에 있는 어린 생명이 귀여워서가 아니다. 귀엽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로지 유경은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하나의 생명이 움트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다음 순간에 있어서의 유경은 살길을 골똘히 강구하였다.

「그러면 어렇게 사느냐?」

부모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 하고 그들의 풍부한 인생의 체험으로써 정당한 방도를 강구해 달라는 것도 사는데 있어서의 방법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유경의 결백한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젯밤까지도 그렇게 강경히 아버지에게 대항한 자기가 아니었던가.

아니, 그것 보다도 오늘 아버지의 정조를 힐난하고 춘심이의 굴욕적인 인생을 비난한 유경으로서는 차마

「아내 있는 사나이의 애를 뱄소. 그리고 그 사나이로 말하면 아버지가 귀여워 하시는 춘심이와도 관계가 있었소」

하고는 감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거나?……」

그렇다. 유경은 배가 더 불러 오르기 전에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더러운 사나이가 살고 있는 동경으로 가기는 더욱 싫었다.

어딘가 먼 곳으로 완전히 도피해 버리고 싶었다. 이 사바와 완전히 절연된 외로운 섬 같은 데로 가고 싶었다. 그러한 무인도(無人島)에서 어린 것을 데리고 해초(海草)를 따는 해녀(海女)로서 일생을 지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딜 가던 당분간의 생활비가 있어야 하잖느냐?」

적어도 一[일]년간의 생활비는 있어야 할 것이다. 해산을 하고 나선 무엇을 하든지 어린것 하나와 자기 한 몸을 지탕해 나갈만한 자신이 유경에겐 있었다. 어린애를 기르기 위해서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방직 공장의 여직공도 유경은 사양치 않는다.

학교를 그냥 다니는 척하고 동경서 해산을 하면서 돈을 보내 달랄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 역시 유경의 양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다.

그리하여 돈 마련할 궁리를 골똘이 하다가 유경은 문득 피아노 위에 놓인 핸드ㆍ백을 열고 아까 춘심이가 보여주던 손수건을 꺼내 보며

「나쁜 사나이!」

하고, 종알거리는 것이다.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주루루 볼을 적신다.

「영민씨, 글쎄 이게 무슨 짓이야요?」

마치 자기 눈 앞에 백 영민이가 섰는 것처럼 조용히 물었을 때, 등 뒤에 노크 소리가 들리며 김 준혁 박사의 얼굴이 천천히 나타났다.

「……」

3[편집]

준혁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 표정없는 얼굴이 모자를 벗어들고 유경이 앞으로 다가온다.

「아까는 일부러 전화를 걸어 주어서 고맙읍니다. 그 답례로서 인사를 왔읍니다.」

준혁의 말투가 여간 무겁지 않다. 최경어의 말씨였다. 그러다가

「아, 유경씨, 울기는 왜 우십니까?」

하고, 의아해 하는 얼굴을 준혁은 지었다. 유경은 그 말에 얼른 쥐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아이, 저 눈에 뭣이 들었어요. 아까부터 암만 씻어내두 좀처럼 나오질 않는군요」

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 그러세요?」

하고, 바싹 다가서며 걱정스런 얼굴로

「어디 봅시다. 어느 편이지요?」

「아이, 저 왼편……괜찮어요. 가만 둠 저절로 없어지는 걸요.」

하고, 유경은 사양을 하였으나, 원체 성실한 의학도인 김 준혁은 상대방이 사양한다고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가만, 여기 앉아요.」

하고, 의자에 앉힌 후에 유경의 왼편 눈을 빌기집어 보았다.

「보이질 않는데 고놈이 어디로 샜나 봅니다.」

「그냥 둠 괜찮어요. 아이 정말 미안합니다.」

유경도 깍듯이 존경어를 썼다. 준혁은 유경의 눈에서 손을 떼며

「그냥 그래요?」

「아이, 인젠…인젠 괜찮어요. 나왔나봐요. 아이 고맙읍니다.」

하고, 유경이가 약간 머리를 숙였다.

「유경씨가 나한테 치료를 받고 머리를 숙여 본 것이 오늘이 처음이지요?」

「………」

유경은 대답이 없다.

「유경씨……」

「네?」

「유경씨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조금도 나한테 미안해 할 것 없읍니다. 나는 그처럼 몰상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준혁씨, 고맙습니다.」

유경의 눈에서 일단 사라졌던 눈물이 다시 핑 하고 감돌았다.

유경이가 준혁씨라고 부른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유경씨, 왜 또 우십니까?」

「아뇨. 공연히……」

유경은 손수건을 또 눈으로 갖다 댔다. 유경은 자꾸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감정 같아서는 이 진실한 현실주의자의 품안에 안겨서 실컷, 실컷, 정말로 실컷 한 번 울어 보고도 싶었으나 그러나 유경의 모난 감정이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준혁씨!」

「네?」

「길이, 길이 행복하세요.」

「유경씨.」

「네?」

「내게서 이미 행복은 사라졌읍니다. 유경씨나 길이, 길이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그리 쉽사리 얻어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행복이 그처럼 쉽사리 얻어지는 것이라면 이 세상 사람이 왜 이처럼 태반이 불행하겠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유경씨.」

「네?」

「나는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편히 다녀 가세요.」

불행한 사람들만이 바꿀 수 있는 쓸쓸한 작별의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