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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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편집]

1[편집]

사랑의 배반처럼 눈을 어둡게 하고 이성을 무디게 하는 것은 없다. 제 삼자가 냉정히 생각해 보면 춘심의 말과 영민의 인격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건마는 다시 말하면 영민의 사람된 품으로서 도저히 결과가 행동으로 나타낼 수가 없건마는 산 속에 들어서 산을 모른다는 격으로 그처럼 총명한 유경으로서는 냉정히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용맹무쌍한 장군 「오세로」가 간신 「이야고오」의 공교로운 중상에 넘어가서 사랑하는 아내를 마침내 죽여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 애욕의 의혹(疑惑)도 결국 유경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나 사람이 사람을 현명(賢明)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유경은 자꾸만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거두고 부모 몰래 집을 나간다는 대담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춘심의 말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영민을 한 번 더 믿어보리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실로 현명한 생각이었다.

연애소설에 흔히 나오는 오해와 중상으로써 불행하게 되는 젊은 남녀들과 같은 그러한 우맹(愚盲)한 행동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밤, 유경은 자리에 누워서 지나간 날 영민이가 자기에게 준 가지가지의 사랑의 말과 온갖 성실(誠實)의 말들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것이 거짓말이었던가?

「서로 노력합시다. 노력 없는 애정에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시 나를 꾀이려는 하나의 조작의 말이었던가?

「하여튼 영민이가 춘심이와 만났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손수건이 춘심이의 손에서 나온 사실로도 정확하다. 그러나 그 이외의 말은 직접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니까 춘심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허씨 딸과 결혼을 했다는 말, 춘심이와 남행열차 속에서 입술을 바꾸었다는 말 ── 그렇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사실만은 직접 영민의 입으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경솔히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이 사실을 영민에게 따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 후에라도 행동은 늦지는 않으니까 ──」

보통 같으면 사랑의 의혹으로 말미암아 광란(狂亂)의 세계를 헤매일 것이언만 유경의 현명은 그것을 억지로 피하는 것이었다.

유경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운 숨소리만을 쌕쌕 천정을 향하여 퍼부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동경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유경은 꾹 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유경은 어머니 몰래 당분간 갈아입을 조선 옷을 한두 벌 손가방에다 챙겨넣었다. 그리고는 잠깐 도서관엘 갔다 오겠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남겨놓고 집을 나섰다.

유경은 그 길로 전차를 타고 진고개로 나갔다.

진고개 입구에 Y악기점이 있다. 유경은 서슴치 않고 악기점으로 들어갔다.

「아, 동경서 언제 나오셨읍니까?」

악기점 주인이 반가이 유경을 맞이하였다.

「며칠 됐어요.」

「어서 좀 앉으시지요.」

「아이, 괜찮어요. 그런데 내 피아노 좀 팔아 주세요.」

「아니, 피아노를 왜 파십니까? 그만한 피아노두 쉽지 않습니다.」

어떤 외국인이 쓰던 것을 이 주인이 알선을 해서 간신히 사 준 독일제 八十八[팔십팔]건이었다.

「아이, 인젠 피아노 싫증이 났어요. 싸게 해 드릴께 팔아 주세요.」

「그런 피아노라면 우리가 사도 괜찮읍니다. 싸게 한다는 것보다 적당한 값을 드리지요.」

「얼마나 주시겠어요?」

「자아.」

하고, 주인은 잠간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六[육]천 원 쯤이면 어떠실까요?」

「六[육]천 원은 너무 싸지만, 괜찮어요.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무엇입니까?」

「현금을 지금 주실 것 ──」

「아, 그거야 당장에라도 드리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 피아노는 두 주일 후에 가져 가세요.」

「아, 좋읍니다. 댁에 두시면 저의 집에 둔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실은 며칠 후에 동무들이 모여서 실내 연주회를 개최하게 됐어요. 그래 연주회나 끝나거든 가져가세요.」

「잘 알았읍니다. 그럼 대금은 절수로 드릴까요?」

「현금 없으세요?」

유경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 보면서 물었다. 열 시다. 열 시 四十[사십] 五[오]분에 남행열차가 있다.

「방금 떨어 졌읍니다. 잠간 기다리시지요. 조선은행이니 곧 찾아다 드리지요.」

「조선은행임 그만 두세요. 내가 가다가 찾지요.」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주인은 곧 六[육]천 원 짜리 절수를 떼어 유경이에게 주었다. 유경은 영수증을 써주고 나서

「그럼 두 주일 후에 오세요.」

「네네,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유경은 그 길로 조선은행에 들려서 절수를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삼월 백화점 「튜리스트ㆍ뷰로」들어가서 아는 점원을 하나 붙잡고 벌써 다 팔렸다는 차표를 간신히 샀다. 동경행 二[이]등 차표였다.

택시를 몰아 유경은 황급히 경성 역으로 달려 갔다.

간신히 시간에 대어 온 것을 유경은 다행으로 생각 하면서 차에 올랐다.

빈 자리 하나를 얻어 앉으며 유경은 손 가방을 펼쳐 엽서 한 장을 꺼내 놓고 다음과 같은 몇 줄을 간신히 기록하였다.

어머니.

나 동경 잠간 다녀 오겠읍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정말인 줄 알고 며칠 후로 임박한 시험을 그대로 내 던지고 왔어요 . 나 시험 다 마치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잘 위로해 드릴께 어머니 화 내지 마세요. 네?

실은 어머니 한테만은 간다는 말을 하고 떠나려다가 어머니가 붙잡고 놓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떠나는 거야요. 학교엘 다니려면 충실히 다녀야 하지 않어요. 그렇죠, 어머니? 한 보름 후에 다시 나올테야요. 그럼 어머니 안녕히 ── 유경이 올림유경은 「아까보오」를 불러서

「미안하지만 엽서 속달로 좀 내 주세요. 오늘 저녁으로 들어 가겠죠?」

「들어 가굽쇼.」

「그럼 이건 약소하지만 ──」

유경은 五[오] 원 짜리 한 장을 쥐어 주었다.

「네, 염려 마십쇼.」

그러는데 기적일성, 창밖의 풍경이 스름스름 움직이며 기차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