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청춘극장/2권/4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진실 일로

[편집]

시국이 점점 긴박해 짐을 따라 일본인 학도의 병역 의무의 연장을 단축시켜 명년 二[이]월에 졸업할 것을 금년 九[구]월로 끌어 올려서 졸업을 시키게 되었다.

따라서 「소화제빵」의 배달꾼인 백 영민도 이른 아침부터 三十[삼십]여 집이나 되는 빵 배달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기간이 약 반년 동안 단축된 셈이다. 그것은 아직 조선인 학도들의 강제출정 소식을 모르고 있는 고학생들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소화제빵」의 마누라는 영민의 근실함을 눈여겨보고 기뻐하였다. 더구나 영민이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된 학생이라는 것을 안 후부터는

「아이, 그처럼 훌륭하게 되신 분에게 이런 하잘것 없는 노동을 시켜서 미안합니다.」

하면서 들어 간지 한 주일도 못 되어 일당을 二[이]원으로 올려 주었다.

북지전선(北支戰線)으로 출정한 남편에게, 진실한 학생을 한 사람 고용인으로 데려다가 지장없이 영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집의 일은 염려 말라는 편지까지 마누라는 썼다.

오늘은 소화제빵 「 」의 「마크」가 든 「합삐」를 입은 영민의 어깨에 닿으리만큼 덧두겨 놓은 빵 궤짝을 짐틀에 싣고 구슬 땀을 흘리며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영민은 그러한 노동이 조금도 부끄럽거나 고생스럽거나 하지를 않았다. 아니, 도리어 영민은 이러한 시련(試練)을 인생의 귀중한 긍지(矜持)로 생각하였다.

「만일 나의 인생에 요만한 시련도 없다면 나는 다만 한 포기의 온실(溫室)의 화초일 뿐이 아닌가.」

그렇다. 온실에서 자란 한 포기 화초는 비 바람 풍기는 황야에서는 단 며칠의 생명도 유지를 못한다.

조그만 촌락에서 초라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자기의 비교적 평화로운 생활을 영민은 한 번도 다행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좀 더 크고 호화로운 현실적 행복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불만은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냐? ── 자기의 조그마한 평온한 생활이 자기의 인격 완성(人格完成)에 있어서의 하나의 장해물이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인생의 목적은 인격을 완성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인격을 완성시키려면 온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시 바삐 거칠은 사바로 뛰쳐나가 파동치는 세상(世上) 속에서 난무(亂舞)하는 인간 군상(人間群像)에 부딪쳐야만 한다. 보라! 폭풍우가 쏟아져 내리는 황야에 홀연(屹然)히 서 있는 한 그루의 구부러진 노송(老松)을 보라. 참 되고 굳세인 인간의 자태가 바루 거기 있어야 할 것이며 거기서 비로소 인격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민의 참된 인생관인 동시에 대학생활 五[오]년 동안에 얻은 졸업장에 쓰여질 문구가 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영민이가 중학시절에 유도로소 체력을 배양한 것도 동기는 거기 있었다.

「정의(正義)가 정의로서의 가치를 발휘할려면 단지 관념의 외침만 가지고는 아니된다. 그 관념의 외침을 보장하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무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를 못한다면 정의는 단지 하나의 관념상의 어휘(語彙)일 따름이요, 구체적으로 실천될 기회는 영영 없을 것이다.」

중학을 졸업하던 날 저녁, 대동강변 부벽루 앞 마당에서 땅개를 패 주고 정의를 실천한 것은 이편에 실력이 있은 탓이었고 연락선 二[이]등실에서

「고시나게」로 형사를 메따치다가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것은 이편에 실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힘은 「 불의(不義)를 실천하는 동시에 정의도 실천하는 것이다.」

영민은 열심히 그리고 유쾌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인격의 완성은 정신수양 ── 다시 말하면 관념의 수양에서 온다는 것은 낡은 모랄이다.」

영민은 열심히 자전거를 돌면서 생각하였다.

「군자는 위태로움을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하고, 제자를 가르친 공자(孔子)의 모랄은 벌써 낡은 도덕이다.

위태로움을 가까이 하여 거기 빠지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여 넘어가는 데 새로운 도덕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인격의 완성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인간 영민이가 청춘의 항의서(抗議書)를 아버지에게 제출하고 감연히 집을 떠나 스스로 위태롭고 험준한 길을 택한 동기가 단지 오 유경이라는 한 사람의 여인과의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연연(戀戀)한 애정에만 있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이다. 부모를 배반하고 사랑의 노예가 되는 자가 어찌 혼자 백 영민 뿐이랴.

오 유경이와 사랑을 완성시킴으로써 자기의 인생관을 실천하는 동시에 인격 완성에의 용감한 일보(一步)를 내짚었을 따름이 아니었던가.

「요만 노동이 무슨 고생이냐? 나는 이 보다 몇 十[십]갑절 몇 백 갑절의 곤경을 이미 각오한 바가 아니냐? 나는 다만 오 유경을 열심히 사랑하면 그만이다. 내가 지금 이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는 것처럼 유경을 열심히 사랑하자! 이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하여서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길 가에 나가 앉아 바나나를 팔 수 있으며, 군밤을 구울 수 있다.」

유경이, 유경이, 이 한 마디는 절대로 거짓 말이 아닐 것이다. 일시의 열에 떠서 주절거리는 잠고대는 아니다.

만일 내 말에 허위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하늘이여, 나를 시험하소서, 나를 연옥(煉獄)과 같은 무서운 곤경에 처하게 하여 주시요. 나는 결코 그 곤경을 피하지 않을 터이오니, 그리고 내가 지닌 온갖 성의와 노력을 아끼지 않을 터이오니 하늘이여, 한번 나를 시험하소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영민은 힘차게 페달을 놀렸다.

이리하여 그날도 영민이가 배달을 마치고 「소화·제빵」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한 시가 가까왔을 무렵이었다.

「고꾸로오ㆍ사마. (수고 했읍니다.) ──」

주인 마누라가 그러면서 빵과 차를 점심으로 갖다 주었다.

「고맙습니다.」

이리하여 영민은 빵 세 개로 점심을 떼우는 것이다. 「안삐를 벗어 버리고 영민은 양복 저고리로 바꾸어 입었다.

「그럼 다녀 가겠읍니다.」

가방을 들고 「소화 제빵」을 나섰다.

「다까다노ㆍ바바」역전으로 나서서 「와세다」로 걸어 가다가 영민은 문득 오늘 오후에는 형사소송법(刑事訴訟法)의 S교수의 시간이 휴강(休講)임을 생각하고 오래간만에 「우에노」도서관에나 가 볼 셈으로 다시 「다까 다 노ㆍ바바」 역에서 「야마데」선을 탔다.

다섯 시가 지났을 무렵에 영민은 도서관을 나왔다. 공원 앞에서 시전을 타려다가 때마침 「럿슈ㆍ아워」로서 줄이 너무나 길게 늘어 선 것을 보고

「만세이바시」에서 전차를 타 볼 생각으로 「히로꼬오지」를 지나 「구로 몬쵸오」 정류장에 다달았을 때였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한 대가 욹하고 영민의 옆에서 멎었다.

「오오, 미스터ㆍ백이 아냐?」

자동차의 문이 홱 열리면서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오랫동안 소식이 묘연하던 나미에의 화려한 얼굴이었다.

「아, 부인이 아니세요?」

영민은 깜짝 놀랐다.

四[사]년 전 야마모도 선생과 헤어졌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후 통 소식이 두절되었던 나미에였다.

「아이, 인젠 제법 어른이 됐네!」

四[사]년 전 보다 더 풍만한 몸집이며 더 윤택있는 호화로운 얼굴이었다.

「언젠 어린애던가요?」

「뭘 그래? 코만 흘리지 않음 어른이나? 호호호호……」

「하하하하……」

영민이도 유쾌히 웃었다.

「그래서 어딜 가던 길이야?」

「하숙으로 가던 차입니다.」

「아직두 와세다?」

「네, 도츠캅니다.」

「그럼 마침 잘 되었군요. 나두 그리로 가던 길인데 ── 타세요.」

「괜찮읍니까?」

「아이구, 이 시굴뚜기야! 어째 그리 옹졸한가?」

나미에는 그러면서 영민의 팔을 끌어 올린다.

자동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차안에 들어 앉으니 나미에의 분 냄새 향수 냄새가 후각에 그윽하다.

「그래 부인은 그동안 동경에 계셨읍니까?」

「부인? 내가 언제 누구와 결혼을 했었던가? 호호호호……아이, 참 사람 웃기네.」

「헤에……」

영민은 놀라면서

「그럼 그건 무어야요?」

「식을 지내구, 호적에 이름을 올리구, 같은 집에서 살림을 하구 ── 그럼 결혼인가?」

「그럼 그건 무엇입니까?」

「그건 결혼(結婚)일런진 몰라두 결혼(結魂)은 아냐. 난 아직 내 몸을 판 적은 없어.」

「?……」

영민은 대답이 없이 나미에의 옆얼굴을 문득 쳐다 보았다. 나미에의 본체(本體)를 오늘에야 비로소 발견한 것 같았다.

「나 그동안 북지(北支)에 가 있었어.」

「북지? 북지는 어디를……」

「북경 ──」

「아 그래서 통 소식이 없었군요. 언제 오셨어요?」

「한 달 전에 ──」

「또 가세요?」

「사흘 후에 또 가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다녀 갈려구요.」

「북경서 무얼 하십니까?」

「애국(愛國)하죠.」

「무어요? 애국이라구요?」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 모르세요?」

「허어……」

하고, 영민이가 감탄사를 던졌을 때, 자동차는 「스에히로쵸오」를 지나

「만세이바시」에 다달았다. 「와세다」로 가려면 여기서 오른 편으로 「커브」하여 「오챠노미즈 방면으로 가야 한다.

「어떡허실까요? 「와세다」로 방향을 고치시겠읍니까?」

하고, 그때 운전수가 나미에게 물었다. 택시를 탈 때 나미에는 운전수에게 긴자 四[사]정목까지 간다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

「노오 노오! 운전수 양반 아까 말대로 「긴자」로 가요.」

「네에.」

운전수는 곧장 「스다쵸오」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응?」

하고, 영민은 의아스런 표정으로 나미에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나미에는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얼굴이 말없이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가

「── 「긴자」로 가요. 긴자로 가서 나 술 한 잔 사줘요. 四[사]년 전에 내 구두코를 밟아 준 벌로 말이야!」

하고, 시치미를 딱 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