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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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인생들[편집]

1[편집]

「나나.」

숙희는 또 한번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나나는 손으로 눈을 감기고 벽을 향한채 꼼짝 달싹도 하지 않는다.

「나나는 귀먹어리냐?」

「…………」

「나나는 벙어리냐?」

「…………」

숙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스르르 베개 위로 흘러 내린다.

「나나, 엄마 인젠 무서운 얼굴 안 할께, 손을 떼고 돌아 서.」

「…………」

그래두 까딱도 없다. 숙희의 눈에서는 멎을 새 없이 자꾸만자꾸만 눈물이 쏟아진다.

「불상한 내 나나! 가엾은 나나! 모두가 다 그 녀석 때문이지! 최 달근, 최 달근! 최 달근! 그놈은 정말 악인이지 뭐야?」

때 묻은 이불 끝을 끌어 댕겨 눈물을 씻어 보았으나 그러나 한없이 흘러 나오는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른다.

그때 대야를 깨끗이 부셔 가지고 운옥이가 들어 왔다.

「나나는 왜 저러구 있는 거야? 숨박꼭질을 하는 거야?」

그때야 나나는 홱 돌아 서서 운옥의 품 안으로 기어 들어 왔다.

「아이, 우리 나나를 또 엄마가 학대를 했었군 그래.」

그러면서 운옥은 나나의 조그만 몸둥이를 오그라지도록 꼭 껴안아 주었다.

숙희는 고마와서 여윈 손을 뻗쳐 나나의 손보다 먼저 운옥의 손을 부여 잡으며

「언니, 정신은 차츰차츰 더 똑똑해 가지만 기운이 하나두 없어요. 밥물이 잦듯이 땅 속으로 포옥 잦아 드는 것 같애요.」

「…………」

운옥은 대답없이 멀지 않아서 끊어져 버릴 가느다란 숙희의 목숨을 생각하며 그 수척한 손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다.

들창 유리 문으로 내다 보이는 단풍진 은행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암만해두 「 나 저 은행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죽을 것 같애요.」

「또 죽는다는 말 ── 맘을 그처럼 약하게 먹으니까 기운이 더 빠지지, 글쎄 나나를 봐서라두 맘을 굳게 먹구 있어야지 않어요?」

늘상 하는 말을 운옥은 또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은행 잎이 수두룩 나무 가지에 붙어 있을 젠, 그래두 좀더 살을 것 같은 생각두 들었지만 저렇게 가을 바람에 우수수 하니 떨어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믄 내 가는 목숨도 그만 톡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걸요 뭐. 그래두 은행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는 내 목숨도 붙어 있을 것 같았지만…… 이처럼 나날이 기운이 빠져 나가니 암만해두 은행 잎보다 먼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요.」

그러다가 숙희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면서 불렀다.

「언니, 금순 언니!」

「응?」

「나 죽으믄 나나를 아버지한테 좀 데려다 줘요, 네?」

「아버지? ──」

운옥은 후닥딱 놀래면서 물었다.

「아버지라니? 나나의 아버진 죽었다구 그러지 않았어요?」

그때 숙희는 핏기없는 입술에 빙그레 가느다란 웃음을 지으며

「언니를 속여서 미안해요.」

하고 힘없이 대답하였다.

「속이다니?…… 그럼 나나의 아버진 살아 계셔요?」

그것은 정말 뜻 밖의 일이었다. 나나를 낳아 놓고 아버지 되는 사람이 죽었다고 숙희는 운옥에게 늘상 말해 오지 않았는가.

「네, 살아 있답니다.」

숙희는 쓸쓸히 웃었다.

「엄마, 아버지 죽잖았어?」

그때까지 운옥이 품에 안겨 있던 나나가 눈이 올룽해 지면서 어머니를 말똥말똥 바라 보았다.

「응, 죽잖았다. 나나는 아버지 보구 싶으냐?」

「응, 보구 싶어. 아버지 어디 있나?」

「이 서울에 있다.」

「서울에?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아버지가 있다! 아이, 좋아, 아이, 좋아!」

나나는 발딱 몸을 일으키어 방안을 삥삥 돌아 다니며 좋아라고 손벽을 친다.

「그렇게 좋으냐?」

「좋지 않구, 좋지 않구! 아버지 있는건 다 나혼자 뿐인데 ──. 좋지 않구, 좋지 않구!」

신이 나서 방안을 뛰어 다니는 나나를 바라보며 운옥이도 숙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어쩌면 한번두 우리집엘 찾아 오질 않아요?」

「언니, 남자란 어쩌면 그처럼 무정하우? 어쩌면 이처럼 여자의 일생을 진흙 발로 혹독하게 문질러 주우? 언니, 나 이런 말 누구한테도 하지 않구 그냥 죽어 버릴려구 했지만 나나가, 나나의 장래가 불쌍해서……」

그러면서 숙희는 운옥의 손을 놓고 나나의 조그만 손을 끌어 댕기며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한 불쌍한 여인과 한 무정한 사나이의 피묻은 애정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2[편집]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五[오]년 전, 숙희가 열 여덟 살 먹는 해 봄의 일이었다. 늙은 홀어머니가 삯 바느질을 하여 간신히 외딸인 숙희를 평양 ××여학교 三[삼]학년까지 보내다가 그만 학비를 감당치 못하여 중도 퇴학을 하고 모 백화점의 여점원이 되었을 때였다.

그해 봄 중학을 갓 졸업한 어떤 청년과 눈이 맞아 달콤한 속삭임속에서 백년해로를 언약하면서 숙희는 자기의 순정과 아울러 자기의 정조를 고스란히 청년에게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숙희의 순정의 가치를 몰라 주었다. 달콤한 속삭임 속에서는 백년해로의 언약을 서슴치 않고 한 청년이건만 일장의 춘몽처럼 정열이 식어버린 후에는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던가 싶게 얼굴을 가다듬었던 것이니, 독자여, 기억하는고? ──

「학교에서는 정의가 이길는지 모르나 사회에서는 정의 만으로는 잘 안 될 껄!」

중학 졸업식이 끝난 날 밤, 부벽루 앞 마당에서 콘사이스네 패와 마주 섰을 때, 배앝은 최 달근의 이 한 마디가 순정의 처녀 강 숙희의 일생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실천될 줄이야 뉘 알았으랴!

독자여, 작자도 지금 독자와 함께 새삼스레 놀라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것이니 땅개 최 달근이가 , 자기의 인생 철학을 실천하는 도상에 있어서 강 숙희의 순결한 정조를 한낱 티끌처럼 무자비하게 문질러 버리고 출세의 층층대를 대담하게 기어 올라간 줄이야 뉘 알았으랴!

오호라, 임종의 여인 강 숙희의 이야기에 잠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그 사나이는 마침내 울며불며 부여잡는 나를 뿌리치고 그 해 여름 만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나 그때는 벌써 나는 임신을 한 무거운 몸이 되어 있었지요.」

「그럼 그 최 달근이란 사나이는 숙희가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갔어요.」

「왜 몰라요?」

「아이, 어쩌면!」

그것은 실로 운옥이와 같은 인생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행동이었다.

「그 이듬 해 정월에 나나를 해산하고 그해 사월에 나는 늙은 어머니와 함께 그이를 찾아서 만주로 따라 갔었어요. 바람 결에 들으니 그는 관동군에서 무슨 일을 보고 있다는 거야요. 어머니의 말씀이, 아무리 무정한 사나이라도 제 혈육을 버릴 수야 있겠느냐고, 그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신경으로 그를 찾아 갔었으나 그러나 그때는 벌써 그 사나이는 다른 어떤 젊은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을 때랍니다. 나는 참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젖먹이 나나를 업고 대문 밖에 섰고 어머니 만이 안으로 들어가서 약 한 시간 동안은 말다툼을 하다가 나와 버렸답니다. 나와서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얘, 암말 말고 돌아 가자, 그런 사나이에게 철없이 걸려 들은 네가 불찰이지, 잘못 굴다가는 도리어 우리의 몸이 위태하다. 뉘 아이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왜 그러느냐고, 날보구 도리어 협박을 한다구, 뒤집에 씌우려는 그런 사나이를 찾아 댕겼댔자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냐?

── 그러면서 손아귀에 구겨 쥐고 나온 十[십]원 짜지 열 장을 쭉하고 찢어서 행길에 내 던졌지요. 반 동강이가 되어 펄럭펄럭 행길 가에 날아 떨어지는 지폐 장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나는 허리를 굽혀 묵묵히 그것을 도로 줏었답니다. 그런 더러운 돈을 왜 줏느랴고, 꾸짖는 어머니에게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을 했었지요. 어머니, 이거라도 주는 것이 고맙지, 지금 당장 고국으로 돌아갈 노자가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어머니도 하는 수 없이 눈물을 씻으면서 네 년은 밸이 빠졌느니라 그런 사나이를 그래두 잊어 버리지 못하고 밤낮 눈물만 짜고 있는 네 년이 밸이 빠졌지, 뭐야? ── 언니, 어머니 말대로 사실 나는 밸이 빠졌나 봐요. 그런 나쁜 사나이건만 나의 첫 사랑을 고스란히 바친 그를 끝끝내 미워하지를 못하겠어요 나쁜 사나이 못 쓸 . , 사나이, 하고 원한에 사모치는 부르짖음 끝으로는, 그래두 제가 나를 영영 돌아 보지 않을라구? 언젠가는 제 잘못을 깨닫고 나를 찾아 주려니, 하는 생각만 자꾸 나는걸요. 언니, 그처럼 다정하게 나의 몸과 마음을 귀해 주고 사랑해 주던 사나이가 그렇게 마음이 싹 돌아 섰을까요?…… 언젠가 한번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내 곁으로 꼭 돌아올 것만 같은 걸요」

「글쎄!」

운옥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정이 운옥과 비슷도 하였다. 돌아오지 않을 사나이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었건만 그러나 숙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지 않은가. 사나이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의 곁으로 돌아 오리라는 희망이 숙희에게는 있지 않는가.

그러나 운옥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한 희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영민에게는 깨달을 만한 하등의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있는 강 숙희의 삶이 자기의 그것보다 행복하다 하였다.

영민에게는 애정의 부채(負債)가 없다. 있다면 단지 그것은 인습의 부채일 따름이다.

3[편집]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하는 수 없이 평양으로 돌아 와서 한 일 년 동안 어떤 피복공장에 들어가서 군복을 만들다가 폐병에 걸렸어요. 그때 마침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되시는 이 고아원 차 원장이 평양에 내려왔다가 우리 집안의 딱한 사정을 보시고 어머니는 침모로, 나는 보모로 채용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작년 여름에 서울로 돌아 왔어요. 그러던 것이 어머니는 올 봄에 돌아가시고 그 대신 언니가 들어온 것이지요.」

「그래 그이가 서울에 있는 줄을 어떻게 알우?」

「작년 겨울 어머니가 문안에 들어 갔다가 그이를 거리에서 보았대요. 군복을 입구 댕기는데 어머니가 몰래 뒤를 따라가서 집을 알아 두었대요. 뭐 뭐해두 그이는 나나의 아버지니까 결국은 나나를 거둘 사람은 그이 밖에 없다구 하면서 집을 알아 두었대요. 나중에 알구보니 헌병 오장이라는데 서사 헌동 二十七[이십칠]번지 사택에 들어 있더라구요. 이런 말, 언니 보구만 해요 원장 보구두 하지 . 않았어요. 언니, 나 죽으믄 나나를 제 아버지한테 좀 데려다 줘요, 네?」

「염려 말아요. 꼭 아버질 데려다 줄테니 염려 말아요. 그리구 애 아버지가 끝끝내 나나를 거절한다면 내가 나나를 기를테니 걱정 말아요.」

「언니, 고맙수!」

불우한 두 여인은 손과 손을 꼭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엄마, 울지 마! 아주머니, 울지 마!」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나도 그만 저절로 서러워져서 콜작콜작 울면서

「엄마, 아버지한테 가. 나 아버지 보구 싶어!」

「엄마가 죽어야지 아버지를 볼 수 있단다.」

「싫어. 엄마 죽으믄 난 싫어!」

「엄마가 이쁘냐, 아버지가 이쁘냐?」

「엄마두 이쁘구 아버지두 이쁘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 운옥은 나나를 업고 언젠가 한번 왕진을 왔던 역 근처에 사는 의사를 청해 왔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나서 운옥을 밖으로 불러 내다가 오늘 밤을 지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리 알라고 전하고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숙희는 운옥의 품안에서 영원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엄마의 싸늘한 품안에 매어 달려서 나나는 무섭게 울어 댔다.

「엄마, 왜 죽어? 죽음 싫어! 나 엄마 말을 잘 들을께 엄마 죽지 말어! 엄마 눈 감음 나 싫어! 감지 말어! 감지 말어! 아아, 엄마아 ──」

아무리 울어 대도 이전처럼 흘겨 주지도 않고 웃어주지도 않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을 흐늑흐늑 느끼면서 잠깐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나가 그만 갑자기 무서워져서 팔을 벌리고 운옥의 품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나나!」

「응?」

「엄마는 영영 돌아 가셨다. 그처럼도 애달프게 보구 싶어 하던 아버지를 종시 보지 못하구 영영 돌아 가셨단다. 나나!」

「응?」

「여자의 일생이란 그처럼도 가엾은 것일까? 한 사나이에게 바친 그 일편단심(一片丹心)이 그처럼도 보람이 없었단다! 엄마도 그랬고 저 불쌍한 도라지도 그랬단다.」

「아주머니, 도라지가 누구나?」

「옛날 옛날, 엄마처럼 불쌍하게 죽은 색시의 이름이란다.」

「아주머니, 인젠 울지 말아요.」

「글쎄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떻거니? 아주머니두 엄마처럼, 도라지처럼 기다리구 기다리다가 배리배리 말라 빠져서 죽을 몸이란다.!」

「아이, 싫어! 아주머니 꺼정 죽음 나도 죽을테야요!」

「아이 귀여워라!」

운옥은 나나를 숨이 막힐 듯이 꼭 껴안으며

「아이, 가엾어. 나나는 커서 엄마처럼 아주머니처럼 기다리구 사는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은행 잎 보다 먼저 떨어져 버린 불쌍한 숙희를 생각하며…… 도라지탑 앞에서 一○[십]년 동안을 기다리다가 죽어버린 불쌍한 도라지를 생각하며……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의 운명과 똑같은 서글픈 운명을 걸머진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운옥은 나나를 안고 하룻밤을 눈물로 새웠다.

이튿날 아침, 남선으로 출장을 나갔던 차 원장이 돌아 왔다. 그리고 그날 낮쯤 해서 숙희는 원아들의 서글픈 울음소리와 함께 망우리 묘지에 묻히는 몸이 되었다.

「나나, 아버지가 정말 보구 싶으냐?」

「응, 아버지 보구 싶어.」

「아버지 한테 갈까?」

「응, 가, 가, 빨리 가!」

「그래 내일 나하구 아버지 한테 가 보자!」

「아이, 좋아! 아이, 좋아!」

묘지에서 돌아 오면서 나나는 운옥의 등에서 좋아하고 손을 내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