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22장
나나의 아버지
[편집]1
[편집]그 이튿 날이다.
장충단 공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사헌정에 최 달근의 조그만 일본식 사택이 있었다.
황금정 六[육]정목에서 전차를 내린 애꾸눈이 박 준길이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따라 무엇이 그처럼 긴급한지 헐레벌떡 최 달근의 집을 찾아 왔다.
집은 비록 작았으나 외채 집이고 널판자로 둘러싼 뜰안에는 가을 화초가 몇 포기 펴 있었다 . 「기무라·다까오」라는 문패가 정문에 붙어 있다.
준길이가 찾아 들어 갔을 때 최 달근은 「도데라」를 입고 화로를 끼고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고 그 옆에서 그의 아내인 일녀 요시꼬가 부인잡지
「주부지우」를 읽고 있었다.
요시꼬는 최 달근의 세 번째의 여자로서 작년 만주서 나올 때에 데리고 나온 여자였다.
「아이, 어서 오세요.」
요시꼬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나갔다.
「왜 아침부터 헐레벌떡 뛰어 댕기는 거야? 오늘은 일요인인데 집에 좀 가만 못 있구?」
최 달근은 신문을 내던지고 화로불에 담배를 붙였다.
「가만 있는게 뭐요? 굉장한 뉴 ─ 스를 갖구 왔는데요.」
박 준길이도 담배를 피워 문다.
「굉장한 뉴 ─ 스?」
「그럼요.」
「뭔데? ──」
「아이 참 생각만 해두 분하다니까요.」
「대관절 무어가 그리 분하다는 말이야?」
「아, 글쎄 고 깜찍한 년이 알고 보니 김 준혁 병원에 간호부로 있었다지 않아요?」
「누구?…… 깜찍한 년이라니?」
「아, 운옥이 년을 몰라요? 허 운옥을 몰라요?」
「허 운옥이? ──」
그때 박 준길은 안타까운 듯이 자기의 애꾸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 이걸 글세…… 이걸 글세 몰라요?」
하고 외쳤다. 그때야 비로소 최 달근도 놀라며
「아, 저 백 영민의 색시 짜리 말인가?」
「글쎄 말이요. 아, 고 년이 거기 숨어 있는 줄이야 누가 알았소! 참 세상이란 넓고도 좁다더니만……」
「아니, 그런 줄은 어떻게 알았나?」
「춘심이 년에게 들었답니다.」
「춘심인 또 그걸 어떻게……」
「춘심인 영감에게서 들었지요.」
「영감은 김 준혁이에게서 듣구……」
「네, 그런데 말이요. 김 준혁이가 고 년에게 홀딱 반했었다는군요글세.
빌어 먹을 년 같으니! 고년은 상판대기가 뻔뻔해 가지구 가는 곳마다 사내 간장을 글데 다 녹이지 않아? 깍쟁이 같은 년!」
「아니, 김준혁은 오 선생 따님에게 반했을텐데…」
「아니래요. 고 년은 또 고 년대로 딴 사나이를 물었대요.」
「딴 사나이?」
「네, 춘심이 년이 말을 잘 안해서 자세힌 모르지만 그렇대요. 그건 그런데 고 운옥이 년이 지난 봄에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지 않아요.」
「나가 버렸다?」
「네. 그래 오늘 병원으로 가서 고 년의 행적을 좀 더듬어 보려구요. 난 꼭 만주 같은데로 뺑소니를 친 줄만 알았더니 글세 이 서울 바닥에서 아물거리는 줄이야 누가 알았어!」
그러면서 지난 겨울 신 성호의 뒤를 밟아 김 준혁 병원에 들어 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무척 분해 하였다.
요시꼬가 차를 끓여 들고 들어 왔다.
「부엌에서 듣자니 누구를 그처럼 욕하는 거요? 남의 아가씨 욕할 생각 말구 어서 장가를 들 생각을 해요.」
차를 권하면서 하는 말이다.
「옥상(부인)은 뭐 알지두 못하면서 가만 계세요. 나 참 고 년 때문에 장가 늦어진 생각을 하면 분해 죽겠다니까.」
「자네, 참 결혼식은 언제랬지?」
「一二(일이)월입니다.」
「그 때는 나두 한번 자네 시골 구경 가 볼까.」
「암 꼭 오시야지요. 오장께서 내려 오시기만 하면야 우리 탑골동이 떠나갈 꺼야요. 또 그래야 저두 한번 뽐내보지요.」
「색시는 교인이라지?」
「네, 야학원 선생입니다. 운옥이 년하고 그 년하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마음 속에 꼭 점을 쳐 두었읍죠.」
「흥, 박군두 출세를 했는걸. 야학원 선생을 다 아내로 맞아 들이구……」
「헤헤헷, 모두가 다 나리의 덕분입죠.」
「그런데 춘심이와 신 성호와는 배가 잘 맞는가?」
배야 잘 맞겠지만 「 …… 빌어 먹을 년이 인제 한번 뱃대기에 거랭이를 토매 봐야 정신이 들지! 아, 글쎄 세상의 오 창윤이가 무엇이 어때서 발길로 찬단 말이야? 중간에 나섰던 나리에게도 뵐 낯이 없다구, 집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년을 원망한답니다.」
「저번 영감을 만났더니 하는 말이, 모르긴 모르지만 춘심이가 다시 효자동이 그리워서 찾아 들어 올때가 반드시 올터이니 마음을 길게 먹구 그때를 기다리겠노라구 그러던 ──」
그러면서 최 달근은 찻 종지를 들었다.
2
[편집]최 달근과 박 준길이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춘심은 마침내 효자동을 뛰쳐 나온 모양이 아닌가.
「영감님이 너무 물러서 그 모양이지, 나같으면 춘심이 년의 발모가지를 보스라쳐 놓지, 그냥 두어요?」
「영감님의 말이 맞을지두 모르지. 한 반 년쯤 남비밥을 끓여 보래요. 신성혼 냄새가 안 날줄 알아 별 수 있나. 먹구야 사랑이지, 배 고픈데두 사랑 이야?」
그러다가 이번엔 아내가 모르는 조선 말로
「춘심이 년을 내가 한번 못 따 먹은게 암만 해두 서운한걸! 허허허……」
하고 아내의 얼굴을 힐끗 바라 보았다.
「가만 계십쇼. 다 때가 있는 거니까, 헤헤헷.」
「때가 무슨 때야? 자네 말 믿고 있다간 원 어느 고망년에……」
「글쎄 가만만 계시래두, 고년이 원체 미꾸라지 같아서 옌간 매끄러워야지요. 인제 옴쪽달싹도 못하게 만들어 놓을테니 안심하세요.」
「약속 어기면 자네, 이거야.」
하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흉내를 냈다.
「아, 글쎄 염려 마세요.」
오랫동안 밀려 내려오는 준길이의 부채(負債)였다. 그러나 원체 춘심이가 매끄러워서 부채는 부채대로 자꾸 밀려 내려 오기만 하는 것이다.
「그럼 나 김 준읍 병원엘 좀 다녀 오겠읍니다. 고년을 꽁꽁 묶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 와서 보고합죠.」
그러면서 애꾸눈이 박 준혁은 총총히 사라지고 최 달근은 다시 신문을 보기 시작하였다.
신문지 위에 자꾸만 춘심이의 토실토실한 몸집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최 . 달근은 힐끔힐끔 아내의 몸집을 훑어 보면서 한 三[삼] ○분 동안 그러고 앉았노라니까 현관문이 가만 열리면서
「미안하지만 이 댁이 최 달근씨의 댁이신가요?」
하는 낯설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세요?」
요시꼬가 현관으로 마중 나갔다.
「이 댁이 혹시 최 달근이라는 분이 계시는 댁이 아닌가요?」
절반쯤 열려진 현관 문 사이로 운옥의 얼굴이 안으로 들여다 보면서 일어로 물었다.
「네, 그런데 어디서 오셨어요?」
「저 잠깐 그 분을 좀 만나 뵈려 왔는데요. 계신가요?」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최 달근은 때때로 이런 여자 손님의 방문을 곧잘 받곤 하였다. 그 대개는 남편이 그 무슨 관계로 헌병대에 걸린 사람들이었다. 또 그런 종류의 사람이거니 생각하면서 요시꼬는 들어가고 대신 최 달근이가 한 손엔 신문을 들고 한 손엔 담배를 붙여 문 채 현관으로 나왔다.
「내가 최 달근이요. 어떻게 오셨읍니까?」
군인들에게 독특한 간단 명료한 어투가 담배 연기와 함께 흘러 나왔다.
「아, 그러십니까. 저는 홍 금순이라는 사람이야요. 좀 중요한 용건을 가지고 선생을 뵈러 왔읍니다. 과히 바쁘시지 않으시거든 잠깐만 저를 만나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올라 오시지요.」
「미안합니다.」
최 달근은 현관 옆 四[사]조 방으로 운옥을 안내하면서
「어이, 히밧지 못데 고이! (화로 좀 가져 와) ──」
하고 고함을 쳤다. 이윽고 아내가 화로와 함께 차를 한 잔씩 부어 놓고 나갔다.
이리하여 허 운옥과 최 달근은 조그만 일본 화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몸이 되었다.
최 달근과 허 운옥은 오늘째 두 번이나 서로 만나는 사이언만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독자제씨는 분명히 기억하리라. 지나간 겨울, 천일관으로 들어가는 컴컴한 골목 안에서 최 달근과 허 운옥은 분명히 말을 바꾼 두 사람이었다.
「오늘 제가 이처럼 선생을 찾아 뵈려 온 것은…」
「어서 말씀하시요. 조금도 어려워 하실 것 없으니까요.」
상대자가 어여쁜 여인임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 힘에 미치는 것이라면 돌보아 주고 싶은 충동을 최 달근은 느끼는 것이다.
「사건이 생겼읍니까?」
「사건이라고요?」
「헌병대로 사건이 넘어 갔읍니까?」
그 말에 운옥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아아뇨.」
「그러면……?」
「선생은 강 숙희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그 순간 최 달근은 후닥닥 놀래며
「누구, 강 숙희? ──」
하고 외쳤다.
「그렇습니다. 강 숙희라는 불쌍한 여자를 선생은 설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당신은 대체 누구요?」
「숙희의 동무 홍 금순입니다.」
「그래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 왔소?」
어투가 점점 거칠어져 간다.
「강 숙희의 유언을 전달할 셈으로 왔읍니다.」
「유언 ──아니, 유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강 숙희는 죽었읍니다.」
「오오 ──」
최 달근의 신음은 비교적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