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23장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편집]1
[편집]강 숙희의 부음(訃音)을 듣고 무의식 중에 흘러나온 최 달근이의 신음 소리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비교적 길었다는 그 사실이 허 운옥을 적지 않게 기쁘게 하였다.
「어디서 죽었읍니까?」
「청량리 밖에 있는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죽었어요. 오래 전부터 폐가 나뻤어요.」
그런 여자는 전연 모른다고 머리를 흔들줄로만 알았던 최 달근이가 아닌가 그 최 달근이가 한 걸음씩 . 이야기에 접근하여 오는 것이 운옥이는 기뻤다.
거기서 운옥이가 지나간 날의 이야기를 쭉하고 났을 때, 팔장을 끼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최 달근이가 후딱 머리를 수그리며
「숙희, 미안하다!」
하는, 한 마디를 거침없이 토했다.
「숙희는 나를 저주하면서…… 끝없이 원망하면서 죽었읍니까?」
최 달근은 숙였던 머리를 들고 이번에는 똑바로 운옥을 바라보았다.
「아아뇨. 죽으면서도 선생을 잊지 못하고 죽었읍니다. 불쌍한 동무였읍니다.」
「그렇습니까!」
깊은 감동의 한 마디였다.
준길이와 같은 인물과는 역시 다른데가 있었다.
「황송합니다! 이처럼 보잘것 없는 저 같은 인간을 그래도 사람이라고 믿고 찾아주신 수고로움이 황송합니다.」
운옥은 마음 속으로 적지 않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극악무도한 도배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왔던 자기의 계산이 빗맞아 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숙희가 죽었다면 그것은 필시 나 때문에 죽었을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있어서 숙희를 너무도 학대하였읍니다. 나는 출세가 하고 싶었읍니다. 중학교 교문을 나서면서 부터나는 무엇 보다도 힘을 길러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맹세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나와 접촉하는 모든 인간을 단지 나 자신의 출세를 위한 하나의 사다리로 밖에는 더 생각할 줄을 몰랐읍니다. 모든 것을 냉정하게 발로 문질러버리고 일어 서자! 조그만 인정, 구구한 가치 평가는 나의 행동과 출세를 더디게 한다는 굳세인 신념을 갖고 왔읍니다. 그 맨 첫 출발에 있어서 나는 강 숙희라는 하나의 발판을 밟고 올라섰던 것입니다. 단지 나의 야욕을 채우는 대상으로 밖에 더 강 숙희를 생각하지 못했읍니다.」
최 달근은 잠깐동안 말을 끊었다가
「그러한 내가 오늘 날 강 숙희의 영전에 머리를 숙이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읍니다.」
「이유라고요?」
그렇습니다 만일 강 「 . 숙희가 나를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죽었다면 나는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학대에 대한 저주 ──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뺨을 맞은 자가 같이 뺨을 때리는 것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니까요. 외인편 뺨을 얻어 맞은 강 숙희는 바른편 뺨을 또 갈겨 달라고 내밀면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순정이 강 숙희에게 있을 줄은 나는 정말 몰랐읍니다.」
최 달근은 다시 한번 머리를 깊이 숙였다가 들면서
「홍 선생, 그와 같은 무자비한 나의 인생관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한마디로 말씀 드리겠읍니다. 홍 선생, 나는 백정(白丁)의 아들로서 뭇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자라난 인간입니다!」
「………?」
그 한 마디에 운옥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뵙는 홍 선생께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것은 죄송스럽읍니다만 백정의 자식으로서 뭇 사람의 흰 눈동자와 손가락 끝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사람 위에 올라설 힘을 길러야 했읍니다. 조그만 시골 읍에서 소대가리를 까고 돼지 멱을 따던 내 아버지의 불명예를 어째서 내가 그대로 상속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입니까! 힘을 기르자, 그리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나는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가 있었읍니다. 나를 모욕하고 나를 천대하는 뭇 사람에게 대하여 나는 반드시 그 모욕과 그 천대를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 줘야만 마음이 편했읍니다. 그러나 과거 내가 접촉한 뭇 사람 가운데서 오로지 강 숙희만은 나에게서 받은 모욕을 나에게 돌려보내지 않은 단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선생의 그러한 인생관은 숙희의 순정을 계기로 해서 변해질 수가 있을까요?」
이 독특한 인생관의 소유자를 허 운옥은 일종 헤아릴 수 없는 충동과 함께 바라보면서 그런 말을 물었다.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나는 강 숙희 한 사람의 순정에만 머리를 수그릴 따름입니다. 나의 인생은 아직 젊읍니다. 벌써부터 나의 마음이 눅으려지고 약해진다면 나는 도저히 사람 위에 올라 서지를 못할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짓밟은 모든 인간에게 나는 반드시 복수를 할 것입니다!」
「복수라고요?」
운옥의 인생관으로서는 「복수」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뭇사람의 머리를 진흙 발로 짓밟고 올라서야만 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최대의 욕망인 동시에 유일한 기원입니다!」
「………」
운옥은 또 한번 눈을 크게 떴다.
2
[편집]운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어렸을 때 만주에서 「 예배당엘 다녔읍니다. 그때 어떤 미국인 선교사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읍니다. 갑이 을에게 복수를 하고 을이 갑에게 복수를 하고 또 갑이 을에게 복수를 하고 을이 또 갑에게 복수를 하는 동안 복수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쓰노우·볼 ── 눈으로 만든 공처럼 이리굴고 저리굴고 하는 동안에 공은 자꾸만 커질 뿐이지 작아질 때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어느편이 한 사람 공 굴리기를 정지해야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강 숙희는 공 굴리기를 처음부터 정지한 사람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읍니다! 내게로 굴러 온 공은 반드시 굴려 보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공을 굴려 보내야만 합니다.」
거기서 최 달근은 후딱 생각이 난 듯이 말머리를 돌렸다.
「나나는 지금 어디 있읍니까?」
「고아원에서 아버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홍 선생을 따라 고아원으로 가서 나나를 이리로 데려오겠읍니다. 나나에 대한 정은 나에게 조금도 없읍니다만 나는 숙희의 유언을 실천해야만 되겠읍니다.」
그러면서 최 달근은 의복을 갈아 입을 셈으로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나나에 대한 정은 없으나 숙희의 유언을 실천 해야겠다는 최 달근의 그 차디찬 마지막 한 마디가 허 운옥에게는 끝없이 서운하였다. 무섭기도 하였다.
이윽고 군복으로 갈아 입은 최 달근과 허 운옥은 집을 나서서 황금정 六 [육]정목으로 걸어 나왔을 때, 거기에 한 가지 무서운 광경이 운옥의 눈 앞에서 전개되었다.
김 준혁 병원으로 허 운옥의 행적을 더듬으러 갔던 애꾸눈이 박 준길이가 전차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최 달근과 허 운옥이가 전차길을 건느려 한 것이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아, 박군!」
하고 최 달근은 소리를 쳐서 박 준길을 불렀다.
그 순간 ──
「악!」
목구멍이 찢어져나갈 것 같은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운옥의 입으로부터 튀어 나오지를 않는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캄캄한 일순간을 운옥은 느꼈다.
「응?」
하는, 최 달근의 얼빠진 놀람과 함께
「앗, 저게……운, 운, 운옥이 년이 아닌가……」
하는 박 준길이의 고함 소리가 동시에 튀어 나왔을 때는 벌써 운옥의 그림자는 일로 동대문 쪽을 향하여 다람쥐처럼 줄달음을 치고 있을 때였다.
「뭐, 누구?」
최 달근의 귀에도 낯 익은 이름이다.
「운옥이?」
하고, 놀라다가
「아, 저 아까 이야기하든 백 영민이의……」
이것이 대체 어찌된 운명이뇨? 그것이야말로 최 달근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믿지 못할 하나의 위대한 기적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박 준길이의 우쭐거리는 뒷 모양이 운옥의 뒤를 따라서 날쎄게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때는 오정이 거의 가까운 무렵이었다. 통행인이 어지럽게 물결치는 서울 운동장 앞 거리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명의 무서운 손아귀에서 벗어 나려는 수난의 여인 허 운옥의 애처로운 자태가 사람의 틈사리를 감실감실 수놓으면서 새어 나간다.
박 준길은 약 백 메타 ─ 쯤 간격을 두고 어린 양의 뒤를 따라가는 맹수의 여유를 가지고 따르고 있다.
그러나 박 준길과 허 운옥은 경주의 대적이 될 리는 만무한 일이다. 간격은 점점 좁아져 간다. 그대로 가다가는 동대문 앞 쯤에서 운옥의 끌채는 五[오]년 전 태극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준길이의 손아귀에 독수리처럼 움켜잡힐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닌가.
그때까지 얼빠진 사람처럼 머엉하니 바라보고만 섰던 최 달근의 몸뚱이가 홱 하고 움직이면서 박 준길의 뒤를 비조처럼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거리를 재어 보아도 준길이가 운옥을 붙잡는 것 보다 먼저 최 달근이가 박 준길을 붙잡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 순간, 최 달근은 지나가는 전차에 휙 몸을 실었다.
「차장 운전을 빨리, 빨리! 저기 가는 저 녀석은 쓰리다! 저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헌병이다!」
하고, 그 어떤 격정에 휩쓸리어 최 달근은 외쳤다.
「그러세요?」
운전수는 위잉 하고 전차를 몰았다.
「빨리, 빨리, 좀더 빨리!」
그것은 참으로 최 달근의 인생관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는 본연(本然)의 부르짖음 이었으며 생리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