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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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새양쥐[편집]

1[편집]

전차를 몰아 박 준길이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자기가 어떤 행동을 취할런지 최 달근 자신도 확실히 몰랐다. 다만 한 가지 최 달근의 의식에 떠오른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다만 볼 수 없는 그 어떤 형용하기 어려운 격정에 휩쓸린 것 밖에 없었다.

준길을 도와서 운옥을 체포하느냐? ── 그렇지 않으면 운옥을 도와서 준길이를 물리치느냐? ── 하는 중대한 인생의 분기점에 선 자신을 의식한 것은 전차를 잡아 타고

「저 녀석은 쓰리다!」

하고, 아무런 의식 없이 외치고 났을 그때였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계산을 초월한 부르짖음이었다. 최 달근의 인생으로선 도저이 있을 수 없는 아름다운 외침이었다. 이러다가는 출세의 층층대를 올라가지 못하고 낙오의 길을 걸을는지도 몰을 최 달근이 아닌가?

그것은 지나간 날, 오 창윤의 정원에서 대통령을 쏘았을 때 느끼던 피의 항의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지나간 겨울, 천일관에서 중대한 정치범인 대통령을 은익한 백 영민과 신 성호를 그대로 놓아주던 그 관대한 감정과도 비슷하였다.

바라다보니, 운옥의 감실거리는 필사적인 자태가 동대문 앞에서 고양이에게 쫓기는 궁소(窮鼠)인 양 나불거리고 있었고 거기서 약 二十[이십] 메타를 떨어진 간격에서 맹수처럼 ─ 달려가는 준길이의 뒷모양이 무섭게 꺼풀 거리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빨리!」

최 달근은 마치 자기 자신이 그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저 무지몽매한 박 준길이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운옥의 인생은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운옥의 운명의 거리는 二十[이십]메타 ─ 에서 점점 좁아져만 간다.

최 달근이가 휙 하고 다시 전차에서 뛰어내린 것은 바로 그때 ── 준길이 보다 한두 걸음 앞섰을 때였다

「박군, 저 년을 놓치지 말고 붙들어야 한다!」

최 달근은 박 준길이와 나란이 서서 뛰어가면서 고함을 쳤다.

「그렇습니다! 저 년이……저 년이 내 눈깔을……저 년이 애국가를 불렀읍니다!」

박 준길은 헐떡거리면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저 년이 뛰면 얼마나 뛰어요! 손아귀에 든 새양쥐지요!」

그때 운옥은 후딱 뒤를 돌아다 보다가 두 사나이가 무섭게 쫓아 오는 것을 발견하자 절망에 가까운 표정으로 어린애처럼 두 손을 몇 번 허공에 내젔다가 기진맥진한 듯이 청량리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만 한길 가에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저 년이 뛰면 얼마나 뛸텐가!」

하는, 준길의 기쁨에 넘치는 소리와 함께 그 순간 최 달근의 입으로부터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것은

「아 ──」

하는, 절망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일단 쓰러졌던 몸을 다시금 발딱 일으키자 운옥은 방향을 고쳐서 동대문 부인병원을 향하여 비탈길을 새양쥐처럼 뛰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끝없이 뻗쳐 있는 한길을 그대로 달린댓자 조만간 붙잡힐 허 운옥의 연약한 발목이 아닌가! 그래서 운옥은 마침내 일시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아, 저 년이 쥐구멍을 찾는구나!」

준길이가 여유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을 때, 최 달근의 머리는 시간과 거리를 번개같이 계산하고 있었다.

그렇다 .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새끼는 구멍을 찾는 법이다.

허 운옥이가 필사의 힘을 다하여 병원 정문을 들어섰을 때는 박 준길과 최달근은 비탈길 중턱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네 이년 쥐구멍을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다구……」

바로 그 순간이었다. 최 달근이가 돌뿌리를 차고 비틀비틀 쓰러지는 척 하다가 한편 쪽 발로 준길이의 두 다리를 넌지시 걸었다.

「아, 앗 ──」

비탈길 가장자리를 뛰어 올라가던 준길이의 몸뚱이가 픽 하고 쓰러지면서 밑으로 딩굴딩굴 보기좋게 굴러 떨어졌다.

「앗, 박군, 다치지 않었나?」

최 달근은 고함을 치면서 밑으로 따라 내려가서 준길이의 몸뚱이를 일으켜 안았다.

「아이구, 다리를 뼛나 봅니다. 빨리, 빨리 저 년을 따라 가 주시요!」

최 달근은 하는 수 없이 쩔룩쩔룩 기어 올라오는 준길이를 내버려두고 정문 안으로 뛰어 올라 갔을 때, 운옥의 최후의 그림자가 병원 현관 안으로 후딱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음 ──」

하고, 최 달근은 의미 깊은 신음을 하였다.

그러나 최 달근은 분명히 운옥이가 병원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건만 그는 현관으로는 달려가지 않고 병원 옆으로 뻗은 정원을 꿰어 병원 뒤로 돌아갔다.

이 병원에는 뒷문이 있다는 것을 최 달근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박 준길이가 쩔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정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2[편집]

「어디로……고 년이 어디로 갔읍니까?」

헐레벌떡 뛰어 올라온 박 준길은 그 험상궂은 애꾸눈이를 희번득거리며 물었다.

「박군, 빨리 날 따라오게! 고 년이 새양쥐처럼 이 뒷문으로 새 나갔네!」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최 달근은 준길이를 꽁무니에다 달고 불이나케 뒷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뒷문 밖은 좁다란 골목이다. 그리고 그 좁다란 길목이 두서너 개 합쳐진 데가 됐기 때문에 운옥이가 어느 길로 도망을 쳤는지 설명이 막연하여도 준길이에게 의심을 받을 리는 조금도 없었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최 달근이가 들락날락 뛰어다니고 있을 때 박 준길이가 쩔룩거리며 달려왔다.

「어느 골목으로 도망을 쳤소?」

「글쎄 어느 골목인지 분명치가 않네. 하여튼 군은 그 골목으로 가 보게.

나는 이 골목으로 가 볼테니까 ──」

그러나 병원으로 자취를 감춘 운옥이가 거기 있을 리는 만무하였다.

얼마동안 골목 안을 들락날락 하다가 두 사람은 다시금 병원 뜰 안으로 돌아 왔다.

「아이, 분해 견딜 수가 없읍니다. 고 년을…… 고 방정맞은 년을 놓치다니……에잇, 재수가 없어서 참……왜 글쎄 하필 남의 앞에서 넘어지긴 왜…」

준길이는 최 달근을 무척 나무래는 것이다.

「음. 재수가 없는 날인상 싶으이.」

「그런데 분명히 뒷문으로 샜읍니까?」

「아, 분명히……」

「어디 병원 안을 한번 뒤져 봅시다! 고 년이 새양쥐처럼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또 누가 알아요?」

「……」

최 달근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뒷문으로 샌 사람이 병원 안에 있을 리야 만무하지 않은가?」

「아니야요! 샅샅이 뒤져 봐야 맘이 놰요!」

그러면서 박 준길은 눈이 벌개서 병원 안으로 들어가질 않는가.

「아아 ──」

최 달근은 혼자 속으로 절망을 부르 짖었다.

그지음 허 운옥은 ── 그렇다. 만일 운옥이에게 좀더 참을성이 없었던들 한길 가에 쓰러져서 기진맥진한 몸을 다시 일으킬 기력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운옥의 체력이라기 보다도 오로지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최후의 일순간까지 고통을 참고 넘으려는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성실 문제에 귀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만일 오 유경이었던들, 그리고 그것이 만일 박 춘심이었던들 그처럼 기진맥진하여 일단 쓰러졌던 몸을 다시 일으킬 정신적 강인성이 부족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찬찬히 생각할 여유는 물론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오늘 찾아갔던 나나의 아버지 최 달근이와 자기의 삶을 위협하는 박 준길이가 설마 같은 직장에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그러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줄은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하나는 헌병오장이요 . 하나는 헌병 보조원이니 찬찬히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한 일이지만 어쩌면 운명의 실마리가 요처럼도 공교롭게 얽혀 버렸을까 하였다.

그러한 무서운 범의 굴속인 줄도 모르고 최 달근의 집을 찾아갔던 것을 생각하면서

「아아, 최 달근도 박 준길이와 함께 나를 따라오는구나!」

하였다. 이미 각오는 하였으나 최후의 기력을 다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교훈에 어그러지는 것 같아서 다시금 몸을 일으키었던 허 운옥이었다.

운옥은 이 병원에 뒷문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알았더라면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포대에 든 쥐새끼의 격이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오랫동안 간호원 생활을 하여 온 운옥으로서는 이 커다란 병원 안 풍경이 처음 들어서는 관청처럼 낯설지는 않았다. 그것을 다행으로 약국, 진찰실, 간호원 휴식실들이 쭈루루 달려 있는 복도를 곧장 벗어 나가서 복도 막바지까지 뛰어 갔다.

달리 피해 나갈 길은 아무리 보아도 없었다. 거기서 운옥은 하는 수 없이 二[이]층으로 뛰어 올라 갔다. 二[이]층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좌우 옆으로 입원실이 쭉 연달아 있었다.

그때 외인편으로 셋째번 입원실인 三[삼]호실 문이 열리며 四十[사십]의 고개를 한두 살 넘어선 중년 간호부 한 사람이 나오다가 운옥이가 뛰어 오는 것을 보고 얼굴 빛을 변하였다. 운옥은 제 육감으로 그가 간호부부장임을 짐작하였다.

「부장 어른, 저를 잠간만 숨겨 주세요! 자세한 사정은 후에 말씀 드릴 테니, 잠간만 저를 숨겨 주세요!」

운옥은 부장의 손목을 와락 부여잡으면서 그렇게 애원하였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부장은 놀라 물었다.

「헌병이 저를……저를 붙들을려구 따라 와요!」

「헌병이라고요?」

「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빨리, 빨리 저를 숨겨 주세요!」

헌병이라는 말에 간호부장은 처음엔 놀랐으나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헌병대에 관계된 일이라면 보통 범죄와는 달라 그 어떤 종류의 사상관계인 줄을 직각적으로 깨닫자 자기의 오빠가 三一[삼일]운동 당시 헌병대에서 옥사(獄死)한 사실을 문뜩 생각하면서 인제 방금 나선 문을 다시 홱 열어 재쳤다.

「빨리 이리로 들어 가요!」

낮은 목소리이었으나 힘있는 외침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운옥은 회오리바람처럼 입원실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