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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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검은 손길[편집]

1[편집]

동편 유리 들창 가에 산아용 침대가 세 개 놓여 있고 흰 벽 밑에 환자용 침대가 하나씩 놓여 있다.

침대 하나는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임신부인 듯 싶은 젊은 여자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다가 호닥닥 놀래면서 이 돌연한 침입자를 의아스런 표정으로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었다.

임신부 옆에서 체온기를 들여다 보고 있던 나 어린 간호부가

「무어야요?」

하고 놀래 물었을 때, 운옥이 대신 대답한 것은 간호부장의 엄숙한 목소리었다.

「떠들지 말아요! 이 분은 그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잠간 관헌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니까, 그리 알고 나 하라는대로 잠자코 하면 돼요!」

「네에.」

젊은 간호원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빨리 「면회사절」이라는 표를 문 밖에 내다 걸어요!」

젊은 간호부는 바로 문 안에 걸려있는,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면회 사절」이라고 씌인 표를 재빠르게 내다 걸었다.

거기서 부장은 방안을 돌아보며 잠간동안 무엇을 망서리다가 오들오들 떨고 섰는 운옥의 손목을 홱 잡아 끌며

「빨리 이 침대에 누으시요!」

하고, 절반은 명령하듯이 외쳤다.

운옥은 명령하는대로 구두를 벗고 한편 쪽 비어 있는 침대에 올라가 누었다.

부장은 재빠른 솜씨로 이불을 끌어 올려 운옥의 머리 위까지 푹 씌워주면서 당신은 임신부요 임신부로서 「 . 순산을 할려고 이 병원에 입원한 환자요!

알겠소?」

부장은 다지듯이 말했다.

「네에!」

운옥은 모기 소리처럼 가는 대답을 하였다. 눈물이 핑 돈다. 감사한, 정말 감사한 어른이었다.

「벽을 향하여 돌아 누시요. 절대로 얼굴을 돌려서는 아니 되오! 이 방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버러지더래도 얼굴을 돌리면 아니 되오!」

「네에 ──」

운옥은 벽을 향하여 돌아 누었다. 이불을 너무 푹 씌우는 것이 도리어 의심을 살까보아 부장은 운옥의 새까만 뒷머리만을 약간 보이도록 손질을 하였다.

「이 구두를 약장 속에 감추어 두어요!」

「네.」

젊은 간호부는 운옥의 벗어 놓은 구두를 머리맡에 놓인 조그만 장 안에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래 층으로 내려가서 헌병이 올라 오나 살피고 와요.」

「네.」

「그리고 지금 숙자가 이 방안에서 보고 듣고 한 이야기를 누구한테도 입 밖에 내면 안 돼요!」

「네.」

「그럼 빨리 내려가 봐요.」

이리하여 숙자라는 간호부가 다람쥐처럼 밖으로 새어 나갔을 때, 이 침착한 부인은 저편쪽 환자 옆으로 걸어가서

「떠들어서 미안합니다.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잠시만 참아 주시요.」

「아이, 무슨 말씀을………그런데 부상, 나두 저이처럼 이불을 쓰고 벽을 향해서 누워 있어야지 않아요? 한편만 그렇게 하면 도리어 의심을 살지 모르지 않아요?」

아직 스물을 갖 넘은 어린 산부로서는 실로 총명한 한 마디였다.

「아, 참 그렇게 좀 해주셔요!」

부장은 만족한 얼굴로 이 영리한 산부를 마음 속으로 칭송하며 벽을 향하여 돌아 누운 그에게 이불을 귓 밑까지 씨워 놓았다.

그지음 아래층에서는 ── 뒷문으로 빠져나간 운옥이가 병원 안에 숨었을 리는 만무하지 않느냐고 굳이 만류하는 최 달근의 의견에 반대하여 준길이는 준길이대로 한사코 병원 안 수색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모른게 다행이지 , 만일 최 달근과 허 운옥이가 동행을 하던 사실을 알았더라면 준길은 최 달근의 그 애매한 태도를 결정적으로 의심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준길은 그것을 몰랐다. 전차에서 내리는 순간, 최 달근과 허 운옥을 같은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달 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일이 이렇듯 공교롭게 되고 보니 최 달근으로서도 동행하든 사실을 상대자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준길은 마침내 주저하는 최 달근의 앞장을 서서 서무부 책임자와 면회를 하여 잠간 병원 안을 조사하겠다는 말을 하고

「그럼 오장께서는 아래층을 조사해 주시요. 나는 二[이]층을 뒤져 보겠읍니다.」

「그럼 그래 볼 수 밖에 ──」

최 달근은 하는 수 없었다.

「운명이다. 순간의 생사이다. 운옥의 운이 좋으면 아래층에 숨었을 것이요, 운이 나쁘면 二[이]층에 있을 것이다!」

최 달근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준길은 二[이]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가고 최달근은 하는 수 없이 아래 층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2[편집]

그때 층층대 위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숙자라는 간호부가 뚜벅뚜벅 올라오는 애꾸눈이의 구두 소리를 등 뒤에 들으면서 三[삼]호실로 뛰어 들어 갔다.

「부장, 지금 올라 와요! 한 사람은 아래층을 조사하고 한 사람은 이리로 올라 와요!」

「그래?」

「그런데 애꾸눈이야요.」

「애꾸눈이?」

「네, 이리로 올라오는 사람이 애꾸야요.」

그 순간 이불 속에서 운옥은 치를 부르르 떨었다. 최 달근이면 자기와 직접적 관계가 없을 뿐더러, 아까 만나본 인상으로는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을 하면 어떻게 될상 싶었던 운옥의 최후의 일루 희망이 거기서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

「아, 아버지!」

운옥은 마음 속으로 합장을 하고 아버지의 영혼을 구슬피 찾았다.

「숙자는 암말 말고 그저 잠자코만 있어요!」

부장은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침착한 태도로 극히 엄숙히 명령을 한 후에 문으로 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었다.

한방 한방 뒤지면서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이다.

이 三[삼]호실을 중심으로 하여 외인편 쪽으로 다섯 방이 있고 오르편 쪽으로 두 방이 있다. 이방과 외인편 쪽 다섯 방은 모두 입원실이고 오른편 쪽 두 방은 바로 옆방이 산실(産室)이고 그 다음 방이 수술실이다.

그런데 준길이가 한방 한방 더듬어 오는 쪽은 외인편 입원실에서 부터였다.

준길은 외인편 입원실 다섯 개와 그 맞은 쪽 입원실 다섯 개를 죄다 뒤지고 마침내 三[삼]호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면회사절 ──」

하고, 중얼거리는 사나이의 굵다란 목소리가 일순간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똑, 똑, 똑 ──」

하고, 마침내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왔다!」

바로 문 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섰던 간호부장의 얼굴빛이 일순간 무섭게 긴장 되었다가 다시 풀리면서

「누구세요?」

하고, 문을 방싯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무서운 얼굴이 ── 한편 눈이 메꾸워진 무서운 얼굴이 방싯하니 열어 잡고 선 문 틈에서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누굴 찾으세요?」

될 수 있는 최대한 엄숙한 얼굴을 부장은 지었다.

「잠깐 병실을 좀 보여 주시요.」

다른 데는 모두 젊은 간호부였는데 이 방에만 유달리 중년 간호부인 것이 준길의 행동을 약간 둔하게 하였다.

「「면회사절」이라는 표가 붙은 것이 안 보이십니까?」

정중한 말씨이면서도 날카로운 한 마디었다.

그 말에 준길은 일순간 멈칫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면회사절」의 표가 안 보이느냐는 말에 자기의 메꾸어진 눈을 비웃는 것 같아서

「나는 헌병대에서 온 사람이요!」

하고, 어깨를 들었다.

「헌병대에서 오셨건 어디서 오셨건 면회를 사절하는 데는 다름이 없읍니다. 헌병대에도 규칙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병원에도 규칙이 있읍니다.」

「어째서 면회를 안 시키는 거요?」

「중병환자에게는 면회를 엄금한다는 것 쯤 당신과 같은 분이 모를 리는 없을 텐데요?」

「나는 환자를 면회하려는 것이 아니고 잠깐 방안을 보려는 것이니까 면회 사절이라는 말이 나에게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소.」

하면서, 직권을 가지고 방싯열어 잡고 있는 문을 손으로 잡아 댕겼다.

「안 됩니다! 그건 더욱 안 됩니다!」

하고, 부장은 외치면서 막아 섰다.

「면회가 아니요! 나는 그 어떤 중대 범인을 찾고 있는 것이요!」

「안 됩니다! 범인이건 뭣이건 안 됩니다! 이 방안엔 산부의 남편조차 들어 올 수가 없읍니다.」

그러면서 부장은 열심히 막았다.

「산부라고요?」

「그렇습니다. 산부는 지금 무서운 진통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는 줄을 당신이 안다면 이런 몰상식한 행동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요? 남편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이 신성한 산실을 그래 당신이 함부로 출입하겠다는 말이요? 몰상식에두 분수가 있을 것이지, 빨리 문을 닫으세요!」

그러면서 부장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문을 닫았다.

그러나 완력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부장이 아닌가. 일단 닫혔던 문이 다시금 홱하고 열리면서 이 무지몽매한 침입자를 막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선 간호부장의 연약한 몸뚱이가 짚오락처럼 옆으로 밀리어 나갔다.

「안 돼요! 안 됩니다. 당신은 산실의 신성을 모욕하는 무서운 사람이요!

빨리 나가요! 빨리 나가세요!」

그러나 그때는 벌써 준길이의 그 더러운 구둣발이 이 신성한 방안을 더럽히었을 때였다.

「오오, 하늘이여!」

운옥은 이불 속에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조용히 하늘의 가호를 구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