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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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의[편집]

1[편집]

── 전장(戰場)은 그대들을 부른다!

── 황은(皇恩)에 느껴 울며 지원하는 학도병!

── 승인서(承認書)에 도장을 치고 부모네는 기다린다. 일각도 주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 기일은 박두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 한을 천추에 남기지 말라!

기일이 점점 절박해 짐을 따라 신문지는 눈이 벌개서 부르짖었다. 시국은 나날이 무시무시해 지고 인심은 더할 나위 없이 흉흉해 졌다.

민중은 입이 있으되 벙어리처럼 무거워만 갔고 민중은 눈이 있으되 자라나 거북이처럼 갑옷(甲羅[갑라])속에서만 유난히 빛났다. 민중은 생각이 있으 되 그날 그날의 의식주(義食住)에 한정이 되었고 민중은 행동이 있으되 총 소리에 놀란 병아리 새끼들처럼 호닥닥 호닥닥 뛰기만 했다.

학교 선배들이 권유를 온다. 그 뒤로 순사가 온다. 그 뒤로 헌병이 온다.

본인 보다 부모네가 더 말라 죽을 지경이다. 안 가면 그 보다 더 무서운 학대가 가족에게 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도 「지원」이라는 말에

「지원 안 하면 되지 않느냐.」

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부모네와 법이론적(法理論的)으로 생각했던 학생들의 눈이 번쩍띠여 왔다. 그 「지원」이라는 두 글자의 배후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총검이 감추어져 있음을 깨달을 때 학도들은 눈 앞이 아찔해졌다.

이리하여 가장 유위한 지식 계급의 청년들이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리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황천에서 모시러 온 일직사자(日直使者), 월직사자(月直使者)에 끌리고 밀리어 활찍같이 굽은 길을 삿대 같이 달려 간 격이다.

十一[십일]월에 미국 육군 항공부대 사령관 「아 ─ 놀드」는 十[십]톤 내지 十五[십오]톤의 적재능력(積載能力)을 가지고 대서양을 무착륙(無着陸)으로 왕복할 수 있는 「B29」라고 불리우는 초중(超重) 폭력기가 멀지 않아 대일 공습을 떠나리라는 것을 전 세계에 발표하였다.

十二[십이]월 중순에는 미군이 「─ 뉴부리텐」섬「마 ─ 카스」에 상륙을 했고 「마킨타라와」에서 일본군 수비대 三[삼]천 명이 전멸했다는 사실을 대본영은 발표하였다.

「판국은 글러가지 않는가?」

그러한 생각이 신국(神國) 일본의 정신력을 좀먹기 시작하였다. 물질력의 위대한 힘이 귀신 나라 백성들에게도 차츰차츰 인식이 되었을뿐 아니라, 지나간 五[오]월의 「아츠」섬의 전멸이래 국민의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층 더 열심히 천조대신(天照大神)에 고사를 드렸다.

十二[십이]월이 잡혀 들면서부터 유학생들의 지원률이 나쁘다 하여 총독부는 사회 명사나 또는 학교 선배들을 학도병 권유차로 차차 일본 각지로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각지에서는 적고 큰 강연회가 수 없이 열렸다.

학도들은 열심히 강연회에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권유 연설을 들었다. 그것은

「어째서 내가 일본 제국을 위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냐?」

하는, 죽엄의 의의(意義)를 발견해 보자는 때문이었다.

죽는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다. 무섭고 싫고 가증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젊은 몸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안일하게 자란 그들의 혈관에도 죽엄의 참된 의의만 발견한다면 ── 오로지 그것만 발견한다면 한낱 우모(羽毛)처럼 목숨을 가볍게 바쳐버릴 용솟음치는 청춘의 피는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지원병들과는 달랐다. 허울 좋은 대의명분 ── 내선일체, 황은에의 감격, 공영된 형성 따위의 구호로 만은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의 포기(抛棄)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개론(槪論)만이라도 철학(哲學)의 세계 속에서 호흡을 한 인간들이다. 삶의 가치, 죽엄의 가치를 규정해 놓지 않고는 그처럼 홀홀히 목숨을 바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총검을 내대면 할 수 없이 끌려는 가마. 그러나 돼지나 소새끼처럼 무자각하게 끌려가기는 싫다. 내 발로, 내 자신의 의사로 내 스스로가 걸어 나가고 싶다. 그럴려면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음의 가치를, 죽엄의 의의를 발견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백 영민의 골돌한 생각이었다.

「누구야! 나의 생명의 가치를 너희들이 마음대로 농단하려는 자는 누구냐?…… 너희들이 보는 내생명은 한낱 쓰레기통에 구데기 같을런지 몰라도 내가 보는 내 생명은 우주(宇宙) 그 자체와도 같이 크고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나의 지극하신 어버이도 이것을 농단하지 못할 것이며 나의 사랑하는 오 유경이도 이것을 강요하지 못한다! 나에게 죽엄을 권유하는 자여, 그대들은 어이한 대철리(大哲理)를 품었기로 나에게 생명의 포기를 강권하느뇨? 말을 하라!」

영민은 주먹을 들고 허공을 치며 「요도바시」조선 장학회의 정문을 들어섰다.

교육자 M씨와 실업가 오 창윤씨의 강연이 있기 때문이다.

2[편집]

저번 날 「간다」명치 대학 강당에서 조선의 유명한 문학자요 민족주의자이던 씨의 강연을 들었으나 R 거기서도 마침내 죽엄의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심각한 정신적 허탈 속에서 헤매이던 영민이었다.

그러한 백 영민이가 오늘 유경이의 부친 오 창윤씨의 강연을 들으려 온 것이다.

어제 아침 동경 역에서 만나서 유경이의 걱정을 잠깐 하고 나서는 오 창윤과 M씨는 장학회 사람들과 분주스레 가버렸기 때문에 별로 이렇다할 사담을 바꾸어 보지 못한 영민이었다.

회장에는 수十[십]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고 시간이 좀 늦은 관계로 M씨는 벌써 강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영민은 맨 뒷줄 비인 좌석을 하나 발견하고 그리로 앉았다.

M씨는 조선에서도 고명한 교육자였고 과거에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민중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한 유명한 민족주의자가 오늘날 타민족의 이익과 번영을 위하여 자기 민족의 유위한 청년 학도들의 목숨을 요구하는데는 필시 그 어떤 중대한 이유 ── 전문학생이나 대학생의 머리로서는 감히 상상치도 못할 그 어떤 심오(深奧)한 철리(哲理)가 없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 어떤 실로 기상천외한 논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M씬들 별 말이 있으랴. 들어 봐야 결국 마찬가지의 이야기다. 그들은 누구나 다 신문지상에서 떠들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였다.

「대군이 부르시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치는 날에는 한을 청사에 남길 것이니, 우리 반도 三[삼]천만 민중의 앞 날을 위하여, 우리들의 후손의 복리를 위하여 제군은 이 비상국가의 절실한 요청에 흠연히 나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오로지 그 한 길 밖에 우리 민족을 살리는 방도는 또 달리 없을 것이니, 제군! 일 각도 주저 말고 한시 바삐 고향으로 돌아 가라. 제군의 부모 형제는 제군이 돌아와 용감한 국가의 간성이 되어 민족의 행복을 영원히 누리기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에헴 ──」

거기서 잠깐 M씨는 기침과 함께 말을 끊었다. 그때

「M선생, 한 가지 중대한 질문이 있읍니다!」

하고,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맨 뒷줄에 앉았던 백 영민이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토론회가 아니니 질문은 중지하시요!」

강단 좌우 옆에 섰던 형사대가 뒤로 뚜벅뚜벅 걸어 오면서 하는 제지의 소리다. 험악한 공기였다.

그러나 영민은

「M선생, 한 가지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요.」

「뭡니까?──」

M씨는 순간 얼굴빛을 달리하며 그러나 무척 침착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선생에게도 우리와 같은 아드님이 계십니까?」

「응?……」

M씨는 갑자기 무슨 뜻인지를 헤아릴 바 없어서 얼굴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에게도 내일 모레 싸움터로 끌리어 나가 총알에 맞아 무가치하게 쓰러질 우리와 같은 아드님이 계십니까? 대답을 해 주시요.」

「그렇소, 대답을 하시요!」

「분명히 대답을 하시요!」

백 영민의 한 마디는 마침내 힘찬 도화선을 이루워 여기 저기서 질문의 화살이 몰려 들었다.

「중지!질문 중지!」

형사들의 제지의 소리가 궥하고 커지면서 다가 왔다.

「만일 선생에게도 우리와 같은 학도가 있다면 우리는 조금도 주저없이 선생의 아드님과 함께 지원서에 도장을 찍겠읍니다! 대답을 하시요!」

「그렇소. 대답을 하시요!」

「만일 선생에게 학병으로 나갈 아드님이 없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선생의 공염불에 귀를 기우릴 필요는 없는 것이요!」

M씨는 대답을 못했다. M씨에게는 사실 학병으로 나갈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영민의 몸뚱이는 형사들의 제지로 말미암아 자유를 잃어 버리고 있었다.

「경찰관 여러분!」

강당 앞에 앉았던 오 창윤이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부르짖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경찰관 여러분, 미천하나마 이 몸은 황송하옵게도 대군의 부르심을 받아 이 자리에 임석한 사람이요. 멀지 않어 목숨을 내걸고 국난을 막으려는 귀중한 학도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말아 주기를 바랍니다!」

대군이라는 한 마디에 형사들의 행동이 멈칫 하였다. 멈칫 하다가 그들은 마침내 백 영민의 몸뚱이에서 손을 뗐다.

그것을 보자 오 창윤은 다시

「학생 제군, 앞서 경찰관이 말한 바와 같이 이 회합은 토론회가 아니니 자중해 주시요. 질문이 있거든 후각 저희들의 숙소를 찾아 주시요.」

오 창윤의 이 임기응변책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학생들도 조용해 지고 형사들도 조용해 졌다.

3[편집]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M씨의 강연은 활기를 띠지 못하고 어물어물 끝막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니 백 영민의 한 마디는 확실히 M씨의 심장을 찔렀던 것이다.

영민의 질문은 일견 평범한것 같이도 보였으나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실로 후추알 같은 한 마디였다. 내 살이 아프지 않고 내 뼈가 저리지 않을 때는 사람이란 곧잘 커다란 소리를 탕탕 하는 법이다.

오 창윤도 그러 하였다. 유경이가 만일 딸 자식이 아니고 사내 자식이였다면 그는 총칼이 자기의 목을 베기 전에는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기를 무슨 구실로서라도 회피 했을 것이다.

오 창윤이가 강당에 올랐다. 오 창윤의 연설의 내용도 역시 다른 이들의 그것과 대차가 없었으나 그러나 영민으로서는 가장 호감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었다. 그것은 결코 유경을 통한 호감이 아니고 논리(論理)가 명확하여 다른 사람들처럼 쓸데없는 잡음(雜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꺼집어 내는 동근동조론이라든가 억지로 줏어 붙이는 철학적이요 정신적인 결합론 같은 것은 약에 쓸래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자리에 서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사람입니다. 어째 그러냐 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치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고 문학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나는 실업가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다소나마 알고 있는 것은 장사 속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 보다 나이를 좀 더 먹었기 때문에 세상 풍파를 좀더 많이 겪었을 따름이요. 어떻거면 나에게 이익이 되고 어떻거면 나에게 손해가 오는지, 그저 그런 정도 밖에 모르는 하나의 현실주의자입니다. 어떻거면 우리 민족이 이롭고 어떻거면 우리 민족이 해로우냐? ── 원래 강사라는 것은 주고 받는 것입니다. 상품을 주고 대금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날 피를 흘려 주면 그 피의 대가를 우리의 후손이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기 전에는 받지를 못한다는 이 지극히 속된 한 마디를 여러분이 잘 씹어 생각하여 몸을 그르치지 않도록 선처해 주기를 바랍니다.」

실로 너저분하고 아니꼬운 말은 한 마디도 끼우지 않는 간단 명료한 이야기였다.

선생은 우리들의 「 피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 주시겠읍니까?」

한편 구석에서 또 흥분에 찬 질문의 화살이 하나 들어 왔다. 형사들이 또 중지를 명령하였다.

「경찰관, 이 회합은 토론회는 아니나 인제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를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한두 마디의 응답을 묵인하여 주시면 좋겠읍니다.」

오 창윤의 그 자신만만한 침착한 태도에 형사들도 안심하고 머리를 끄덕이었다.

「인제 그 질문에 대답하겠읍니다.」

「하시요. 피의 대가를 받아 주시겠읍니까?」

「학생, 내가 그 대가를 받아 들일 필요조차 없읍니다.」

「어째섭니까?」

「신상(紳商)은 상품의 대금을 짤라 먹지는 않습니다!」

실로 암시(暗示) 많은 공교로운 답변이었다.

「그러나 신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그 순간,

「중지! 질문 중지!」

하고, 고함치는 형사의 목소리 보다 못지 않게 큰 오창윤의 음성이 꿱 하고 소리를 쳤다.

「학생 말을 삼가시요!」

형사대가 학생의 주위에 삥 둘러 섰다. 그러나 감히 손을 대지 않었다.

이윽고 오 창윤의 강연이 끝나고 M씨와 함께 장학회 간부들의 인도로 회장을 나섰을 때, 형사대는 욹하고 달려 들어 백 영민을 비롯한 사오 명의 학생을 손쉽게 검속하였다.

회장 안은 벌둥지를 터치른 것 처럼 웅성거리고 떠들썩 하였다.

「빨리 해산 하시요. 그렇지 않으면 죄다 검속해 버릴테요!」

형사 하나이 기가 차서 고함을 쳤다.

일시 불온한 공기가 장내에 떠 돌았다. 그러나 결국은 뿔 잃은 황소격으로 학생들은 하나 둘 뿔뿔이 흐터지기 시작하였다.

영민은 형사들어게 끌려 정문을 나섰을 때 M씨와 함께 자동차에 오르려던 오 창윤씨와 시선이 마주 쳤다.

「…………」

「…………」

두 사람은 말이 없었으나 오 창윤씨가 먼저 싱긋이 웃어 보이는 얼굴에 보답하기 위하여 영민도 빙그레 한번 쓴 웃음을 웃어 보이면서 형사들에게 조용히 끌리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