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33장
민족의 고달픔
[편집]1
[편집]요도바시 경찰서에 「 」 검속 된 백 영민은 본적, 주소, 성명 기타 간단한 문초를 받고 그날 저녁 무렵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석방이 되었다. 얼려서 잡자는 판이라, 고문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지원하는 길 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으니 선봉 서서 지원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요.」
석방 될 때 영민은 그런 말을 경관에게 들었다.
전차를 타고 영민은 신숙에서 내렸다. 오 창윤씨의 숙소는 「츠노하즈」 뒷골목에 있었다.
영민이가 찾아 들어 갔을 때 사오 명의 학생이 M씨와 오 창윤씨 앞에 공손히 꿇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영민의 조속한 석방을 모다 눈과 안색으로 반겨 맞이 하는 것을 보니, 아까 강연회에 참석했던 학생들 임에 틀림 없었다.
「한 이삼 일 동안은 유치장 생활을 할줄로 알았는데 벌써들 나왔소?」
오 창윤의 호탕한 음성이 었다.
「네.」
영민도 한편 옆에 꿇어 앉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M씨가 과자 그릇을 영민의 앞에다 가만히 밀어 놓으며
「시장할텐데 드시요.」
하였다. 그 은근한 호의가 반가워 영민은 아까 회장에서 취한 자기의 태도가 약간 부끄러워 졌다.
「M선생, 아까는 그만 정에 격하여 장소를 가릴 바 없이 지나치는 말을 했읍니다.」
「상관 없읍니다. 인간성(人間性)의 약점을 당신은 예리하게 비판했을 따름이요.」
거기서 다시금 좌석은 조용해 졌다. 누구 하나 뭐라고 화제를 끄집어 내는 사람이 없다. 다섯 명 중에 세 명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나머지 두 학생도 벙어리처럼 묵묵히 다 식어빠진 차만 마시고 있었다.
유리창에 방공 커 ─ 튼을 깊숙히 내린 六[육]조 방에는 희미한 전등 불빛과 함께 무거운 침묵이 자즈러 들것 처럼 도사리고 있을뿐, 가끔 가다 들려 오는 꺼질것 같은 긴 한숨 소리만이 이 정적을 깨뜨리는 유일한 음향이다.
선생님 우리는 정말 「 , 어떻거면 좋겠읍니까? 저희들의 갈 길을 진심으로, 꾸밈없이 단 한 마디만 깨우쳐 주십시요!」
차를 마시던 학생 하나가 얼굴을 들면서 M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현재는 친일파 노릇을 하지마는 과거에 있어서는 그처럼 이름 있던 이 민족주의자의 입으로부터 단 한 마디 꾸밈 없는 단 한 마디, 가슴속 깊이 간직해 두었던 비장(悲壯)의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그렇다! 그것은 五[오]천명의 학도병 전체의 유일한 소망이었으며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 소원만 이룬 다면 소새끼나 돼지새끼처럼 끌리어 나가는 발걸음에는 동요가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처음에 예기하던 것 처럼 이 개죽음에 대한 무슨 깊은 철리라던가 기상천외한 논리 같은것이 있으리라고는 인젠 기대 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지 못할 바엔 솔직한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다 그 한 마디를 입 밖에 내기를 회피하였다.
「나가지 않으면 그럼 무슨 신통한 수가 있읍니까?」
학생들의 질문에는 대답을 피하고 도리어 저편에서 거기 대한 대답을 듣고 자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도 거기 대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질문을 받는 사람이나 똑같이 그 한 마디를 입 밖에 내어 무서운 언질을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M씨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하라는 것입니까? 하지 않아도 잘 생각하면 다 알 것이니까 선처 하시요. 내 마음이나 학생의 마음이 다를 리가 있겠소?」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M씨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어물어물 넘겨버리는 대답에는 인젠 정말 구역이 났다. 존경하던 선배이기 때문에 어머니나 아버지의 말과 같은 살뜰한 한 마디를 듣고 싶었던 만큼 학생들의 실망은 컸다.
질문 했던 학생이 또다시 머리를 숙이고 깊은 우수의 얼굴을 지었을 때 영민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선생의 마음이나 저희들의 마음이 다를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그 한 마디를 분명히 이 귀로 듣고 나가고 싶습니다.」
「들으나 안 들으나 서로가 다 알면 그만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크건 적건 적어도 三[삼]천만이라는 민족을 배후에 지닌 우리 학도병이 三[삼]천만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의 입으로 부터도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한채 죽으러 나간다는 사실은 너무나 슬픈 일이며 너무나 허무한 일이 아니옵니까? ──」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 같은 한 마디가 영민의 입으로 부터 힘차게 튀어 나왔다.
이야기는 마침내 올 데까지 온 것이다.
2
[편집]막다른 골목에 이야기는 다달았다.
오 천 명 우리 학병이 「五[ ] 그처럼도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그 한 마디를 끝끝내 듣지 못하고 죽어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三[삼]천만 민족이 그처럼 도 모두가 하나 같이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는 말씀입니까? 단 한 사람의 입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
예리하고도 심각한 한 마디였다. 그러나 여전히 M씨는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어물어물 넘겨 버리지 못할 학생임을 M씨는 알아보았기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닫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생각하였다.
「인생의 길이 애당초부터 다른 오 선생이면 또 모르겠읍니다만 그러나 M 선생님이 그처럼 끝끝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올시다!
三[삼]천만 우리 민족이 하나 같이 다 벙어리였다는 사실을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보았읍니다! 분명히 깨달았읍니다!」
「백군, 너무 흥분한것 같소! 오늘 밤은 돌아가 편히 쉬시요.」
그것은 오 창윤씨의 부드러운 만류의 한 마디였다. 그 이상 더 영민의 입에서 어떠한 위험한 소리가 튀어 나올지 몰라서 오 창윤은 무척 당황한다.
「제가 들은 여러 사람의 강연 가운데서 오 선생의 논지는 가장 명확하였읍니다. 그 논지는 오 선생님의 인생관을 대표한 것이기 때문에 저희들은 용이하게 그것을 수긍할 수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서 M 선생이 끝끝내 벙어리였다는 사실을 문제 삼으려는 것입니다. 저희들의 무모(無謀)한 정열을 억제하고 정리해 주시려는 노파심에는 감사의 념을 금치 못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노파심은 우리가 매일처럼 펼치는 신문지에서도 너무나 많이 들어 왔읍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왔읍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좀더 종류를 달리하는 한 마디를 듣고자 하는것입니다.」
「듣지 않아도 잘 안다면서 또 들을 필요는 없지않소?」
오 창윤은 그렇게 말하여 M씨의 곤란한 입장을 옹호하여 주었다.
「압니다. 그러나 듣지 않고도 안다는 것과 듣고 안다는 것은 중대한 차이가 있읍니다 진실한 . 민족주의자, 진실한 애국자라면 같은 민족적 비극(悲劇)에 당면한 오늘날 자기의 의사를 끝끝내, 그리고 단 한 사람에게도 표시하지 않고 견데 배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견데 배길 수 있다면 아까 오 선생께서 솔직히 말씀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의 잇속을 도모하는 장사아치 밖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민은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학생들, 갑시다! 돌아 갑시다! 우리는 이 자리에 울려고 온것이 아니요!
귀를 가지고 입 있는 사람을 찾아 온 것이요! 그러나 그들은 불행히도 벙어리였소!」
다른 학생들도 모두 일어 섰다.
「잠깐!」
하고, 그때 M씨가 손을 들어 영민을 불렀다.
「벙어리가 되신 분이 우리에게 또 무슨 말씀이 있다는 것이요? ──」
「단 한 마디 이야기가 있소.」
「말씀을 하시요! 우리들은 다행히 귀머거리는 아니요.」
「군이 말한것 처럼 잇속만을 도모하는 장사아치는 분명히 아니었소.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하오. 진정한 애국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는 깨달았소. 과거에 있어서 내가 애국자라는 영예를 일시적이나마 차지했었다면 그것은 정말 과분한 명예였소. 내가 생각하던 애국주의는 내 일신이 안일하고 여유가 있으면 하겠다는 애국주의 ── 말하자면 한 개의 도락(道樂)으로서 해 보자는 애국주의였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솔직히 고백하오!」
그러면서 M씨는 그때까지 까치다리를 하고 앉았던 자세를 고쳐 영민이 앞에 조용히 꿇어 앉았다.
「자아, 학생! 학생의 그 정열에 넘치는 젊은 손길로 나의 뺨을 갈겨 주시요! 나의 시들은 볼에 청춘의 정영이 용솟음치도록 한 번 힘차게 후려 갈겨 주시요!」
「…………」
영민은 물러 섰던 한 발을 덥썩 앞으로 내밀었다.
「자아, 어서 내 뺨따구를 보기좋게 갈겨 주시오!」
M씨는 한층 더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실로 계산에 넣지 않은 뜻밖의 광경이었다. 학생들도 그렇고 오 창윤도 그렇고 모두들 이 뜻하지 않은 정경에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선생님!」
감격의 부르짖음이 일동을 대표하여 영민의 입으로부터 튀어 나왔다.
아무 말 말구 후려 「 갈겨 주시요. 벙어리가 되어 버린 약삭빨른 이 가짜 애국자의 입이 열리도록 호되게 한 번 갈겨 주시요!」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말씀을……」
후닥닥 달겨들어 영민은 M씨의 손목을 와락 부여 잡았다.
「선생님, 용서 하십시오! 그만 제가 지나쳤읍니다! 용서 하십시오!」
영민은 영민 대로 M씨 앞에 머리를 숙였다.
「천만에요. 내 시들은 정열이 어찌 학생의 그 발랄한 정열을 용서할 수 있겠소? 그러나 나도 젊었을 때는 학생에게 못지않은 정열이 있었던 것이오. 아아, 그러나, 그러나……」
M씨의 주름살 진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스루루 흘러 내렸다.
「아아, 선생님!」
그러면서 M씨의 가즈런히 꿇어 앉은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영민도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선생님, 제 뺨을 갈겨 주십시요! 저는 선생님을 지나치게 학대를 하였읍니다!」
「학생!」
M씨는 그 어떤 격정에 사로잡히여 영민의 어깨를 와락 부둥켜 안았다.
「선생님!」
이리하여 영민과 M씨는 서로 부등켜 안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는 듯이 자꾸만 자꾸만 울고 있었다.
옆에 앉았던 다섯 사람의 학생들도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오 창윤도 후딱 눈에 손길이 갔다.
흙흙 느껴 우는 울음 소리를 누비 듯이 신숙역을 번질나게 지나 다니는 상선의 궤음이 옭옭 먼 발로 들려오는 밤이다.
오오, 이 절절한 민족의 오열(嗚咽)이여, 민족의 고달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