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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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비극[편집]

1[편집]

다른 학생들과 헤어져 여관을 나오려 했을 때 오창윤씨는 따라 나오다가

「백군.」

하고, 영민을 불렀다.

「………」

「잠깐 이리로 들어 오시요.」

오 창윤씨는 영민을 아래층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앉으시요.」

두 사람은 조그만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몸이 되었다. 옆에는 양실용 키다리 화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백군, 어떻걸 작정이요?」

영민은 한참동안 대답이 없다가

「선생님의 생각으로는 어떡거면 좋을것 같습니까?

제 생각으론 이미 결정한 바가 있읍니다만……」

「음 ─」

오 창윤은 깊은 신음을 하면서

「단 한 길 밖에 없는것 같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 한 길 밖에 취할 방도가 없읍니다.」

「음, 군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나?」

「그렇읍니다. 선생님께서도 그것을 생각하여 주시었읍니까?」

「그럴 수 밖에……목적지는?─」

「대륙입니다. 만주나 북지로……제일 안전하기는 하와이로 빼는 건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선편(船便)을 얻을 수가 없을것 같아서요.」

「음, 항만경계(港灣警戒)가 심한 때라, 밀선을 타기도 용이한 일이 아니고……」

「네, 그래서 연락선의 경비와 압록강의 경비만 잘 돌파하면 그 편이 역시 수월할 것 같읍니다.」

「집에는……집에는 들리지 않고?……」

「네에. 마음 같아서는 부모님을 뵙구 떠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더욱 행로가 거치창 스러워서요. 일단 고향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다시는 발을 뺄 수가 없을것 같읍니다. 더구나 운옥이의 일도 있구 해서 집의 아버지는 상당히 주목 받는 몸이예요.」

「집에서 뭐라고 편지 같은 건 온 적이 없소?」

「없읍니다.」

「한번두?……」

「한번두 없읍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노하신 모양이로군.」

「원체 좀 완고하신 편이어서요.」

「그러나 이처럼 학병문제로 세상이 뒤끓고 있는데, 그래두 그럴 수야 있나?…… 그래 군은 소식을 전하는가?」

「저는 한달에 한번씩은 꼭꼭 문안을 드리지만 회답은 한번도 없었읍니다.」

「허어! 아들 하나 정말로 버리실 셈이신가? 허, 허, 허……」

「그러나 학병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더욱 편지를 안 하실 것입니다.

「어째서? ─」

「제 생각으론 지금 집의 아버지는 당국의 압박으로 상당한 단련을 받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쉽사리 승인서에 도장을 칠 것 같지가 않아요. 돌아 와서 지원하라는 편지도 쓸 수 없고 내 빼라는 편지도 쓸 수 없는 그런 곤경에 처해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군이 내 빼면 부친께 대한 당국의 압력이 상당할텐데……」

「그러나 집의 아버지께서는 그 편을 취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여 내가 순순히 돌아 가서 지원을 하겠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의 자신이 끌려 가면 끌려 갔지 저를 지원시키지는 않을 것이예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허어!」

오 창윤은 다시 한번 놀랬다.

「그러니까 아버지 생각으로선 제가 고향엔 얼신도 하지 말고 이대로 어디론가 내빼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만 했으면 알았소. 그러면 우선 현해탄을 무사히 통과할 방도를 생각해 보기로 해야겠소.」

「─『나가사끼』에서 밀선을 타고 여수(麗水)로 가는 방법도 있답니다.」

「가만 있으오.」

오 창윤은 그 무엇을 한참동안 골돌히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이윽고 얼굴을 들며

「한주일 후에 동경역에서 만납시다. 내주일 오늘, 아침 여덟 시 차요. 그리고 이것은……」

오 창윤씨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돈 천 원을 꺼내 주며

「그 학생복은 벗어 버리고 이것으로 우선 신사복을 한 벌 지어 입고 나오시오. 동경을 아주 떠나는 것이니까 짐 같은 건 적당히 처분 하시요. 말하자면 백군은 친일파 오 창윤의 비서(秘書)로서 여행을 하는 것이니까.」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번엔 사양 않고 후의를 받겠읍니다. 그리고 저번 오셨을 때 제빵소에 맡기고 가신 그 돈도 제가 사양치 않고 받아 썼읍니다.」

「아, 핫, 핫, 핫……그만 눈치를 채었군 그래!…」

「그렇지 않고는 그처럼 후한 대우를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여튼 써 주었다니 고마우이.」

「그럼, 후일 다시 뵙겠읍니다.」

「자중 하시요. 유경일 위해서라도 자중해 주시요.」

「잘 알아 모셨읍니다.

2[편집]

그날 밤 영민이가 「도츠카」하숙으로 돌아와 보니 근 一[일]년 동안이나 소식이 두절 되었던 아버지에게서 서류 편지가 한 장 와 있었다.

고양에서 면장이니, 군수니, 서장이니, 부락연맹 이사장이니 하는 사람들로부터 어서 지원하라는 전보나 편지가 매일처럼 들어 닿아도 꼼짝달싹도 안 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아니였던가.

「만일 지원을 하지 않으면 그 보다 더 무서운 징용이 온다고 하니 곧 답장을 하여라 ─」

이런 재촉의 편지를 아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되던 부모네의 입장이었다.

「아아, 아버지께서 종시 편지를 주셨구나!」

영민은 형용키 어려운 커다란 감동에 사로잡히며 봉서를 움켜 잡았다. 一 [일]년 동안 통 보지 못하던 아버지의 낯익은 먹글씨가 아닌가. 늘상 하시던 것처럼 백지 겹을 정성껏 접어서 손수 만드신 황송한 봉투였다.

영민은 우선 내용을 뜯어 보기 전에 지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꿇어 앉았다.

글씨만 보아도 흠모의 정이 사모치는 그 거룩하신 봉서를 자기 볼 위에 갖다 대고 가만히 부비어 보았다. 육친의 따사로운 정이 영민의 전신을 흐뭇하니 적시어준다.

이윽고 영민은 봉함을 뜯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전처럼 한발 가웃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는 나오지 않았다.

봉투를 만든 것과 꼭같은 조그만 백지 조각에다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집안 염려는 일체 말고 동봉한 금자(金子), 소용될것 같으니 선용(善用)하여라…… 가부(家父)로부터 ─ 」

단지 이 한 마디와 三[삼]천 원 짜리 은행 위채 한 장 뿐이다.

그순간 영민은 오주주하니 , 달려드는 감격의 전률을 온 몸에 느꼈다. 위채 조각을 잡은 영민의 손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눈시울이 뜨거워 오다가 마침내, 감사의 눈물이 몇 방울 툭툭툭 하고 위채 조각에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소자는 송구하여 너무도 송구하여 울고 있읍니다!」

영민은 마음의 눈물로 멀리 태극령 고개를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여 이 보람없는 자식과 손수 끊으셨던 인연을 다시금 맺고자 하십니까?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굽히시고 이 불효 자식에게 이처럼 져(負[부]) 주십니까? 아버지의 그 지극하신 기원과 욕구를 끝끝내 배반한 이 불초 소자로 하여금 이 김(勝[승])의 길을 무슨 까닭으로 차지하게 하여 주십니까?……」

뜨거운 눈물이 영민의 봄을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식을 세상에 창조하여 주신 위대하신 어버이, 추우면 추울 쎄라, 더우면 더울 쎄라, 애지중지 안타깝게 사랑하며 길러 주신 어버이, 당신네 자신들은 자실 것을 못 자시고 입을 것을 못 입으시면서도 훌륭한 사람 되라 교육을 시켜 주신 어버이!

세상의 자식들은 대답을 하여라!

이러한 어버이에게 그대들은 과연 무엇으로써 보답을 하였느뇨?

……무엇으로써 보답을 할테뇨?

「영민이여, 그대 대답을 하여라! 끝끝내 너 혼자의 욕망을 추궁하여 마지않는 그대는 이 위대한 어버이의 사랑을 무엇으로서 보답할 심사인고? 끝끝내 그대는 이기고야 말테냐? 끝끝내 그대는 어버이를 지워 버리고야 말 테냐? ─ 그대가 훌륭하여 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손 치드래도 한 사람의 사랑을 배반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한사람의 사랑을 배반하는 자는 결단코만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

는, 애정의 이 보편성을 그대로 시인함으로써 자식된 사람들은 과연 벼개를 높이 베고 잘수가 있을 것인고?……

「아니다! 만일 자식 된 사람이 애정의 자연발생성(自然發生性)을 무조건 하고 그대로 인정한다면 대지(大地)는, 아니 우주(宇宙)는, 아니 인류(人類)는 영원한 희생을 어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며 영원한 불로소득권(不勞所得權)을 자식에게 부여하는 결과를 맺을 것이다. 사랑의 채무불이행자 (債務不履行者)라는 낙인(烙印)을 찍히는 불명예를 자식들은 영원히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비극인 동시에 인류의 죄악이디!」

이 인류의 비극을 영민이가 다시 연출하느냐? 이 인류의 죄악을 영민이가 다시 범하느냐? ─ 이 순간에 있어서도 영민의 번민은 실로 컸다.

「너를 위해서는 이 아비는 죽어도 좋다. 그러니까 아비 걱정은 아예 말고 이 돈을 가지고 어디로든지 도망을 해라!」

편지의 내용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三[삼]천원을 장만하기 위하여 아버지는 쥐꼬리만큼 남은 토지를 또 팔았을 것이다.

「유경이가 뭐냐! 유경이의 사랑이 뭐냐! 이 위대한 사랑 앞에 유경이의 사랑이 대체 무엇이냐 말이다!」

지나간 겨울 방학, 너무나 가벼운 어머니를 엎고 태극령을 넘던 때 부르짖던 말과 똑같은 한마디를 영민은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 전 우주를 비추워 주는 저 위대한 태양 앞에 한낱 조그만 인광(燐光)과도 같은 오 유경의 존재가 아니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