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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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유경의 소식[편집]

1[편집]

동경을 떠나는 날 아침, 오 창윤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 역까지 전송하는 장학회 사람들을 거절하고 단신 동경역으로 나왔다. 동행인 M씨 보다 하루 앞서 떠나기로 한 것도 역시 달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장학회에서 알선하여 준 一[일]등 차표 두 장을 가지고 오 창윤은 지금 대합실에서 영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훌륭한 신시가 되어버린 영민이가 헐레벌떡 대합실로 뛰어 들어왔다.

「허어, 그만 했으면 오 창윤의 비서 자격은 충분하이! 허, 허, 허……」

오 창윤은 영민의 아래 위를 탐탁하다는 표정으로 훑어보며

「자아, 비서 노릇을 할려거든 이 가방을 들어야 격에 맞는다는 말이야.」

「네, 제가 들어야지요.」

가방을 받아 쥐며

「그런데 선생님!」

「응?」

「유경씨가……유경씨가 살아 있읍니다!」

하고, 외쳤다.

「응? ─ 유경이?……유경이의 소식을 알았소?」

오 창윤의 기쁨이 어찌 영민의 그것보다 못 하라는 법이 있으랴! 놀라움과 기쁨을 아울러 가진 일종 형언하기 어려운 뒤범벅이 되어버린 오 창윤의 얼굴이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유경씨는 살아 있읍니다! 살아 있읍니다! 하늘이 저의 뜻을 유경씨에게 전달해 주셨읍니다!」

만일 그 옆에 군중의 눈이 없었다면 영민은 어린 애처럼 오 창윤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을 것이다.

「그래 유경이가 지금 어디 있소?」

「서울에있읍니다! 어젯밤 유경씨로부터 편지가 왔읍니다. 이것입니다.」

하고, 영민이가 양복 주머니에서 유경이의 편지를 끄내려 했을 때, 오 창윤은 다시 침착한 태도로 들어가며

「백군, 그 기쁜 편지, 그 귀중한 편지는 이 어수선한 자리에서 읽지를 말고 차에 올라서 조용히 읽어 보기로 합시다. 하여튼 유경이가 살아 있다는 그 한마디로서 나는 충분히 만족하오! 자아, 백군, 악수를 합시다! 유경이의 생존을 축복하는 악수를 합시다!」

그러면서 오 창윤은 영민의 손을 덤석 잡았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유경씨를 위해서 그처럼도 간절히 생각해 주시니……」

자기 이외의 유경이의 일신을 그처럼도 골돌히 생각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 할 때 영민은 실로 뼈가 저리도록 고맙고 황송하였다.

「백군, 그것은 내가 군에게 할 말인데……군이 먼저 그런 말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건 약간 월건인걸 허허허……」

「월건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이 순간에 있어서의 저의 심정을 속일 수야 있겠읍니까!」

「음, 감사하오! 유경인 행복한 몸이요. 그리고 유경이의 아비되는 나 역시 지극히 행복하오!」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다정하게 악수를 나눈 후에 차에 올랐다.

二[이]등 차도 아직 타 보지 못한 영민은 一[일]등 차의 그 호화로운 풍경이 너무나 황홀하였다.

이윽고 기차가 「신바시」를 지나고 「시나가와」를 지날 무렵에

「어디 편지엔 무어라고 씌어 있었소?」

하고 오 창윤은 비로소 , 마음의 여유를 얻은듯이 영민을 재촉하였다.

「이것을 읽어 보십시요.」

영민은 공손히 유경의 편지를 봉투채 오 창윤씨에게 내 주었다.

「음 ─」

오 창윤은 약간 떨리는 솜씨로 편지를 펼쳤다.

나쁜 사나이!

그러나 아무리 나쁜 사나이일지라도 나의 영(靈)과 육(肉)을 일시나마 독차지 했던 사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나이가 멀지않아 가치없는 탄환의 세례를 받고 가엾게도 쓰러질런지 모를 이 너무나 악착한 민족적 비극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감정의 온갖 탁류(濁流)를 망각하고 유경은 지금 울고 있어요.

이 거창한 민족적 수난의 마당에서 사사로운 감정의 탁류가 그 존재의 이유를 주장하지 못할것 같아서 당신이 과거에 어떠한 불미로운 행동을 했건, 당신이 현재 어떠한 타락의 길을 걷건 나는 지금 그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오르지 당신이 오 유경이라는 한 여자를 사랑해 주던 그 순간 만을 골돌히 생각함으로써 당신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어요. 흐물흐물 젖꼭지를 무섭게 빨아대는 아비없는 어린것 불신의 피를 받고 험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될 사생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유경은 울고 있어요……

오 창윤은 후딱 편지에서 머리를 들면서 외쳤다.

「아아, 유경이가 해산을 했구려!」

「………」

그러나 영민은 깊은 우수에 잠긴 어두운 얼굴로 유리창이 뚫어질듯이 창 밖에 흐르는 해변 풍경을 묵묵히 쏘아보고 있었다.

2[편집]

젖먹이 어린애를 붙안고 울고 앉았는 불쌍한 딸의 모양을 얼른 환상에 그려 보며 오 창윤은 다시금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나쁜 사나이!

그러나 그것이 설사 거짓 사랑이었대도 유경은 좋아요. 그 거짓 사랑의 속삭임을 나는 지금 끝없이 그리워 해요. 거짓이라도 나를 귀해 주던 사나이를, 거짓이라도 나를 사랑해 주던 그 순간을 한없이 그리워 하던 유경은 울고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 사나이의 애정을 돌이키려는 하나의 방도로서 이 글월에 적는건 결코 아니예요 . 다만 죽음의 길을 떠나는 불신의 사나이에게 그 사나이가 진흙 발로 문질러버린 한 사람의 여인의 참된 심정을 전달해 주고 싶은 까닭이야요. 오 유경이의 마음이 이처럼 약해 질 줄을 쉑스피어는 어떻게 그처럼도 일찌감치 알아 채렸는지 신통해요.

유경은 그 무자비한 탄환이 그 불신한 사나이의 몸을 기적(奇籍)과도 같이 피해 주기를 진심으로 하늘에 빌며 붓을 놓읍니다.

─ 오 유경 ─

「주소는……주소는 없는가? ─」

겉봉에는 씌이지 않은 유경이의 주소가 혹시 편지에는 적혀 있을런지 모를 일이라고 바랬다. 오 창윤의 기대가 딱 끊지고 말았다.

「없읍니다! 일부 인이 경성 광화문국으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음 ─」

신음하는 소리가 무척 깊고 길다.

「하여튼 유경이가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안것 만이 다행이요.」

「그렇읍니다. 살아 있다는 것 만이 제게는 기적과 같이도 기쁨니다. 유경씨는 서울에 있읍니다. 저는 서울서 내리겠읍니다. 내려서 전 서울을 한집 한집 뒤져서라도 필연코 유경씨를 만나야겠읍니다!」

「그건 안될 일! 군은 하루 바삐 압록강을 건너야 할 몸이요.」

「아닙니다. 유경씨를 만나 보기 전에는 그대로 갈 수가 없읍니다.」

「안 될 말이요. 어물어물 하다가는 끌리어 나가야되오.」

「끌리어 나가도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기를 이해하야만 될 사람이 그와 반대로 가장 혹독하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뿐만 아니라, 그 어린애가 결코 불미로운 사생아가 아니라는 것을 유경씨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공포할 의무가 제게는 있는 것입니다.」

「좋은 말이요. 그러나 나는 군을 서울서 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요. 유경은 내가 찾아 낼테니, 그리고 모든 오해를 풀도록 잘 이야기를 할테니 군은 곧장 북행을 하시요. 하루 바삐 국경을 넘으시요.」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하관서 내려 연락선으로 바꾸어 탔다.

영민과 같은 목적으로 몰래 피신해 나오던 학생들이 대개는 다 이 연락선 안에서 붙잡히어 강제 지원을 하였다. 아무리 변장을 하고 아무리 일인인 체하는 얼굴을 지어 봐도 머리를 박박 깍은 사복들의 고 매서운 눈초리와 날센 후각 을 속일 (嗅覺)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영락없이 조선 학생들을 꼭꼭 골라냈다.

아니, 조선 학생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육감은 같은 피부와 같은 눈동자를 가졌건만 그것이 조선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를 또한 신통하게도 구별해 내는 것이다. 직업 의식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좃또, 기미(너 잠깐) ─」

열을 지어서 배를 탈 때나 또는 배를 타고 선실로 들어 갈 때나 그들은 그런 간단한 한 마디로서 능히 조선 학생이나 중국 학생을 열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 높은 친일파요, 一[일]등 선객인 오 창윤씨의 비서에게는 그들은 감히 손을 댈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이가 선객 명부를 적으러 들어와서 그것이 유명한 오 창윤씬 줄을 알자 그들은

「헤이· 사요오데· 고자이마스까· 헤이(아, 그러십니까)!」

하고, 수 없이 굽실거렸다. 굽실거리는 도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팁」이 후하게 나오는 줄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민이가 유 경학(柳景學)이라는 가명으로 선객 명부를 기입하고 났을 때 오 창윤은 지갑에서 五[오]십 원을 먼저 집어 주며

「이건 적지마는 넣어 두고……」

「하· 고레와· 고레와· 도오모……(아, 이건 정말 너무……) ─」

보이는 서슴치 않고 받아 쥐며

「아침 식사는 어떻걸 갑쇼?」

「아침 못 먹었는데……이것으로 무어 적당한 것을 좀 채려다 주오.」

하며, 시퍼런 백 원 한 장을 주었다.

「헤이, 가시꼬마리· 마시다(네, 잘 알고 모셨읍니다) ─」

보이는 굽실거리면서 나가버렸다.

「자아, 어때? 이만 하면 무사 통과가 될듯 싶은데……허, 허, 헛……」

오 창윤은 유쾌하게 웃었다.

「………」

영민은 그때 五[오]년 전 三[삼]등 선실에서 들은 야마모도 선생의 한 마디가 문득 생각키었다.

「아아, 『팁』없는 삶을 살아보려다가 살지 못한 야마모도· 히데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