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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2권/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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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주인공들

[편집]

자아 연락선은 「 , 무사히 통과가 되었는데, 남은 것은 압록강 다리야.」

그날 밤 열 한 시 차로 봉천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은 오창윤은 마주앉은 영민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영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처럼 염려해 주는 압록강 다리가 영민은 별로 걱정이 되지를 않았다. 영민은 서울서 내릴 결심을 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를 저주하며 눈물짓고 있는 유경이의 곁으로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 가고 싶은 맹열한 욕망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자아, 식당으로 가서 저녁이나 먹기로 합시다.」

영민은 묵묵히 오 창윤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 갔다.

식당은 만원이었다. 넷씩 앉는 식탁에 둘 밖에 앉지 않은 식탁 하나를 발견하고 오 창윤과 영민은 그리로 가 앉아서 저녁을 청했다. 그 둘 밖에 앉지 않은 손님이란 대학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며칠 후에는 죽을 목숨이다. 먹어라 먹어!」

영민은 후딱 얼굴을 돌려 두 학생을 쳐다보았다. 하나는 S대학 학생이고 하나는 T대학 학생이었다. 얼굴이 시뻘개진 두 학생은 비상한 흥분과 함께 술을 물처럼 들이키고 있었다.

「흥, 죽는게 그처럼 무서운가?……아무렴 죽지 않을 목숨인가?……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 그래서 우는 거야. 죽는 게 무서워서 우는 건 아니야!」

얼굴이 둥글둥글한 S대학 학생은 흥분한 어조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술을 쭉 들이키었다. 술을 쭉 들이키고 나서는 주먹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다.

「여보게 너무 흥분하지 말게. 남이 부끄러우네.」

안경 쓴 학생이 만류를 하였다.

「남이 부끄러운 게 다 뭐야? 내가 죽는데 남 부끄러운 것 쯤이 뭐라는 말이야? 내 슬픔을 남이 어떻게 알아 줘?」

하면서 그 학생은 흴끗 영민과 오 창윤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그 눈에는 일종 이유 모를 반항의 빛이 알알히 떠돌고 있었다.

「흥, 특별지원병! 명목이야 좋지. 무엇이 지원이야? 등골에 총칼을 대 놓고도 지원병야? 나에게 만일 늙은 부모만 없다면 죽어도 지원을 안 한다, 안 해 아아 불쌍한 ! , 아버지! 불상한 어머니! 글세 내가 왜 왜놈들을 위해서 죽는단 말이야! 으흐흐흐……」

그 학생은 마침내 식탁 위에 업드려져 흐늑흐늑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창피하네. 저 놈들이 보네, 저 놈들이 봐.」

그러면서 안경 쓴 학생은 힐끗 옆 식탁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일인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며 때때로 이편을 바라보다가는 홱 시선을 돌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다.

「반항을 하지 못할 바엔 온순한 양처럼 끌리어 가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 같으네. 울고 불고 하는 꼴을 저 놈들에게 보이기는 정말 싫네. 저 놈들이 지금 뱃속으로는 우리들을 무엇으로 알고 있겠나 말이야?」

그 말에 업드려 졌던 학생은 벌떡 머리를 드며

「무엇으로 알든 무슨 상관이냐 말이야? 이놈들, 말해 보아라! 아무래도 나는 죽는다! 이왕 죽는 목숨이면 네 놈들의 가슴을 찌르고 죽을테다!……

흥, 그래 자네는 언제부터 그처럼 점잖아 졌나? 언제부터 그처럼 온순한 운명론자가 되었나?」

눈을 꺼벅거리며 그 학생은 동료에게 대드는 것이다.

「자네는 부모가 없으니 아주 마음이 편하겠네. 그러나 나에겐 늙은 부모가 있어. 부모가 불쌍해서 나는 끌리어 나가는 거야.」

같은 말을 자꾸만 되풀이 하다가

「내가 아무리 비겁한 인간이라도, 내 부모가 아무리 불쌍하다 하더라도 내 조국을 위해서는 바칠 목숨이 있다, 있어! 그러나 내가 왜 일본 놈들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건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고 좀 조용하게. 이 커다란 비극 앞에 우리 三[삼]천만 민중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 완전히 허탈(虛脫)된 민족으로서의 낙인(烙印)을 찍혀버린 셈이니까.

─」

안경 쓴 학생의 태도는 무척 침착하다. 아니, 그러한 침착은 확실히 하나의 철저한 체념(諦念)에서 오는것 같았다.

그때 둥글둥글한 얼굴을 가진 학생이 머리를 후딱 영민에게로 돌리며

「형도 보아하니 우리들과 비슷한 연세인데, 형이 만일 우리와 같은 비참한 입장에 섰다면 대체 형은 어떻게 행동하겠읍니까?」

그 말에 영민은 오 창윤의 안색을 잠간 쳐다보고 나서 물었다.

「어떻게 행동하다니, 무슨 뜻입니까?」

「이 학생처럼 온순한 양이 되겠읍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흥분하여 울겠읍니까? ─」

영민은 대답을 안하고 잠자코 한참동안 앉았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다 나는 하지 않겠읍니다.」

「그러면……그러면 어떻거시겠읍니까? ─」

「………」

영민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식사가 와서 오 창윤과 영민도 한 잔 술을 나누고 있을 때 울고 불고 하던 학생이 다시금 물었다.

「그럼 어떻거면 좋을것 같읍니까?」

「어떻거면 좋다구……각자가 생각하는데 달렸겠지요.」

영민은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아니, 그러니까 만일 형이면 어떡허실 작정입니까?」

「그럼 제가 묻겠읍니다. 당신처럼 발버둥을 치면서 나가는 사람이나 또 이 분처럼 조용히 끌리어 나가는 사람이나 ─ 결국 싸움터에 나가서는 누구의 가슴에다 총부리를 댈 셈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문젭니다!」

하고, 그 학생은 흥분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어째서요?」

「三[삼]천만이 다 벙어리가 되어버린 무기력한 오늘날, 당신은 총부리를 꺼꾸로 돌려가지고 쏠만한 용기가 있을 리 만무하지요. 설마 있었댔자 그것은 조직없는 개인의 영웅주의적 행동에서 더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최후의 발악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좋건 싫건 당신의 총부리를 저편으로 댈 수 밖에 없을 것이 아닙니까? ─ 저편으로 대고는 대체 누구를 쏘겠다는 말씀이요? 중국인을 쏘겠다는 말이요? 미국인을 쏘겠다는 말이요? 중국인이 우리의 땅을 먹었읍니까? 미국인이 우리의 땅을 먹었읍니까? 三十[삼십]여 년 동안 우리 땅을 먹어 온 사람에게도 못 대는 총부리를 대체 어디로 대보겠다는 말이요?」

「그렇습니다. 남은 길은 단 두 길 밖에 없읍니다. 하나는 자살하는 길이고……」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안경 쓴 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자살을 「 못할 바엔 결국 빼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하고, 둥글둥글한 학생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영민은 잠자코 대답이 없다가

「그건 물어서 무얼 하겠읍니까?」

「좋은 길이 있다면 나도 그 길을 걸을까 하고요.」

「그러나 아까 잠간 듣자니 당신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다지 않습니까?」

「있읍니다. 나는 그 가엾은 부모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울었읍니다. 내가 도망을 가면 우리 가족은……아아, 그래서 나는 가족을 위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지원을 했읍니다! 검사에도 합격이 되었읍니다. 두 주일 후에는 나는 입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까요? 당신의 부모되시는 분은 당신을 무의미한 싸움터로 내 보냄으로써 과연 고통이 덜어질까요? ─」

그러나 안 내보내고 버팀으로써 받는 온갖 고통보다는 역시……」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의 허울 좋은 구실이라고 밖에는 더 해석할 수가 없읍니다.」

「무엇이라구요? 허울 좋은 구실이라고요?」

그 한 마디가 자기의 효성을 모독하는 것 같았음인지, 학생은 발악을 하듯이 영민에게 대들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생각해서 지원했다는 당신의 효성은 말하자면 하나의 허위의 윤리(倫理)로써 가식(假飾)된 효성이지요. 무기력하게 끌리워 나가는 자기 자신을 변명하려는 하나의 아름다운 구호(口號)이겠지요. 그렇게 함으로서 밖에 더 죽음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하나의 자위 (自慰)의 변일 따름이지요.」

「으음 ─」

하고, 학생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면서 꺼질듯 한 신음을 하였을 때

「좋은 말씀을 하시었읍니다. 결국은 그것입니다!」

하고, 안경 쓴 학생이 침착한 어조로 동의를 표하였다. 영민은 다시금

「물론 부모네의 딱한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것으로써만 죽음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큰소리는 못 할 것입니다.」

그대 머리털을 잡아뜯던 둥글둥글한 학생이 얼굴을 들면서 그렇습니다 결국은 하나의 「 ! 허위의 윤리었읍니다. 우리들이 지원한 데는 단 한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막연한 희망 ── 죽지 앟고 살아 돌아올 수도 있다는 단 한 가지 그 희망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은 지원을 한 것이며 부모는 지원을 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야릇한 인간성의 약점 ─ 총알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려도 자기 만은, 그리고 자기의 아들 만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그 희미한 한 줄기 희망 때문에 지원을 하고 지원을 시킨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출정한 학병이 영낙없이 죄다 죽어 버린다면 제 아무리 총칼을 등골에 갖다 대인대도 그 무가치한 도살장으로 끌리어 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원을 한 우리들의 허세를 버린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영민의 대답과

「옳소! 맞았소!」

하는 오 창윤의 대답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자아, 두 분 학생, 내 술을 한잔 받아 주시요. 생면부지인 사이지만 두 분이 다 내 아들처럼 생각키오.」

그때까지 돌부처처럼 벙어리가 되었던 오 창윤이가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고맙습니다. 사양없이 받아 먹겠읍니다.」

둥글둥글한 학생이 시언시언히 술잔을 받아 쭉 들이키면서

「자아, 선생님도 한잔……」

하고 술을 따랐다. 오 창윤은 술을 마시고 나서

「오늘밤 이 자리에서 두 분 학생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감동과 감격을 나는 얻었소. 생각키우는 많은 것을 나는 비로소 얻었소.」

그리고는

「음 ─」

하고 깊은 신음 소리를 지으면서

「내가 권하는 이 한잔 술이 당신네 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무운(武運) 이 장구하여 다시 돌아와 부모님을 뵙도록 진심으로 빌고 있소.」

그러나 그때 안경을 쓴 침착한 학생이 오 창윤의 말을 받았다.

「무운 장구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무고한 사람에게 총을 쏘아서 내 운명의 길이를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에 오 창윤은 손으로 한번 자기의 이마를 툭 쳐 보이며 아차차 이놈의 「 ! 혓바닥을 잘라 버릴 수는 없을까?……매일처럼 보구 듣는 소리가 무운 장구라, 이놈의 혓바닥이 그만 미친질을 한 모양이요. 용서하오! 음 ─」

지나간 겨울. 자기 집 응접실에서 헌병 오장 최 달근과 대통령 장 일수가 정열의 곡예(曲藝)를 연출하던 날 밤부터 오 창윤의 인생에는 「후회」라는 두 글자가 때때로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하여튼 내 혓바닥은 미친질을 했건 어쨌건 이 술만은 진심이니 쭉 들이키시우.」

「네, 먹습니다.」

하고 안경 쓴 학생은 잔을 따르며

「선생님, 저희들의 이 심각한 문제를 제 三[삼]자로서는 한낱 강 건너 화재 쯤으로 밖에는 더 생각키지 않을런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학도병 문제로 말하면 당자인 우리들 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三[삼]천만 민족 전체의 문젭니다.」

「그렇소. 동감이요.」

「그런데 보십시요. 이 식당 안에도 태반이 우리 조선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일인들은 물론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을 수 밖에 없겠지만 같은 민족인 우리들의 겨레인 조선 사람들이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떠들어도 모두들 하나같이 모르는 척하고 시치미를 딱 떼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강 건너 화재를 팔짱 끼고 구경하는 사람들 뿐이지요.

누구 한 사람 이 문제에 참견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읍니다. 저는 눈물이 납니다! 서글퍼서 울고 싶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개인이 있을뿐 민족은 없읍니다! 아니, 민족은커녕 린인(隣人)도 없읍니다!」

침착하던 학생의 어조가 점점 격하여 갔다.

「알겠소! 잘 알겠소!」

오 창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학생의 말을 꾸중 듣는 어린애처럼 듣고 있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영민이가 학생 앞에 불쑥 손을 내밀며 악수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있는 것은 다만 온 몸에 바늘을 심어 놓은 고슴도치 뿐입니다. 고슴도치는 그 바늘로 자기 일신을 보호도 하거니와 린인(隣人)을 찌를 줄도 압니다 그 바늘이 . 없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린인을 가질 수 있고 민족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을 가지 줄 아는 민족은 만방인(萬邦人)을 또한 가질 수 있읍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민족의 비극은 어디서 왔읍니까? 한 사람의 린인을 갖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모두가 다 고슴도치였기 때문에 생긴 비극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수 많은 고슴도치를 지금 이 식당 안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오 창윤은 조용한 말씨로 입을 열었다.

「잘 알겠소! 나도 그 고슴도치의 한 사람이었소. 우리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자기 가슴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자기 자신을 가만이 반성해 본다면 어째서 오늘날의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는가는 묻지 않아도 잘 알 것이요. 다른 사람이 강하다는 것을 원망하고 한탄하기 전에 내 힘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요. 내 힘이 약하다는 것만을 한탄하지 말고 내 약한 힘을 기르도록 노력을 합시다.」

「노력합시다!」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한 마디가 세 젊은이의 입으로부터 감격적인 흥분과 함께 힘차게 튀어 나왔다.

밤 차는 달린다. 비극의 주인공들을 실은 무신경한 밤 차는 쉬일 새 없이 자꾸만 자꾸만 북쪽으로 달린다. 캄캄한 황야를 거대한 괴물인 양 운명의 궤도를 무섭게 달린다.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