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49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탈주 음모자[편집]

1[편집]

기무라의 호의가 영민의 허전하고 삭막하던 가슴속을 따사롭게 적시어 주었다.

「고슴도치 만은 아니었다.」

기무라의 그 무뚝뚝하면서도 은근한 호의와 그 굵다란 신경이 어딘가 장일수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는것 같았다.

「이리로 오시지요.」

뒤통수에서 기무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돌아다보니 기무라의 바로 앞자리가 비어 있었다. 영민은 자리를 옮겨 기무라와 마주 앉았다.

기무라는 들었던 신문을 말없이 영민의 무릎 위에 얹어 준다. 필요 이상의 말을 기무라는 하지 않는다. 어떤 학생처럼 떠들어 대지도 않고 어떤 학생처럼 침울한 얼굴도 짓지 않는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는 그러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마음의 창(窓)인 그의 두 눈동자 만은 언제든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용히 견뎌 배겼군요.」

기무라는 영민의 가슴패기에 달린 창씨를 하지 않은 성명 표를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예……」

그런 서투른 대답을 하면서 영민은 기무라의 성명표를 바라보았다. 황촌실성(黃村七星), 본명이 황칠성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리고는 또 둘이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마주앉아 있었다. 기무라의 그 말없는 품이, 그리고 그 이글이글한 눈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영민 자신과 똑같은 마음의 비밀을 갖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무라도 탈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영민은 육감으로서 그것을 거의 단정하다 시피 하였다.

「탈주를 하려면 기무라 보다 먼저 해야만 된다. 아니, 적어도 기무라와 동시에 하지 않으면 영영 탈주의 기회를 놓칠 것이다.」

이 부대에서 탈주병이 생겼다면 수송 지휘관들의 감시가 어마어마하게 심해질 것은 정한 이치였다. 그렇게 되면 탈주의 기회가 좀처럼 도래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영민은 기무라 보다 먼저 탈주할만큼 자유가 있는 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무라가 먼저 일을 해 치울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에는 지휘관도 없고 한데 한번 더 뛰어내려 보시지요. 경성역에선 장관이던데요.」

낮이막한 우리 말로 기무라가 돌연 그런 말을 하였다. 그것은 결코 동정의 말도 아니고 장하다고 칭찬하는 말도 아니었다. 어딘가 일종의 조소를 띤 한마디였다. 그순간, 영민은

「아차, 실수였구나!」

하는 후회가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경성역에서 취한 자기의 행동을 적어도 일종의 비웃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이런 위험한 인물에게 편지 부탁을 한 것이 몹시 뉘우쳐 지기 때문이다.

벌써 지휘관에게 매수되어 자기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는 스파이가 아닐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민의 기우였다.

꾹 참으시요 기회가 「 . 올테니까. 이 무연한 눈보라 치는 벌판에 뛰어 내렸댔자 중국 게리라 부대에 총살을 당하지 않으면 얼어 죽는게 고작이지요.」

그러면서 기무라는 영민의 손을 무릎 위에서 가만히 더듬어 잡고 힘차게 한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표정없는 얼굴로 돌아가 신문을 묵묵히 펴 들었다.

「동지를 얻었다!」

그 일념이 영민의 침체한 기력을 일시에 소생시켰다. 기무라의 그 무뚝뚝한 태도와 돌부처님처럼 표정없는 얼굴, 그리고 굵다란 로이도 안경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눈동자가 영민에게는 무한히 믿음직 하였다.

기무라는 자기처럼 단순한 탈주 욕망자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어디까지나 계획성을 가진 용의주도한 인물임을 깨닫고 영민은 자기의 무계획성을 부끄러워 하였다.

2[편집]

그때까지 영민은 유경이와 운옥에 대한 애정의 극심한 타격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적막을 느낄 만큼 온갖 실재성(實在性)을 승화(昇華)시킨 철학적 세계에서만 헤매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과 자기 자신을 돌아 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기무라의 그 계획성을 지닌 침착한 태도에 접하는 순간, 영미은 비로소 그때까지 잃어 버렸던 자기 자신을 도로 찾지 않을 수 없으리만큼 주위의 환경은 절박해 있었다.

「그렇다. 당분간 유경과 운옥을 생각하는 시간을 버리고 오로지 탈주만을 생각해야 한다.」

일단 그러한 결심을 하고 나니 영민은 어지간히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있었다. 계획성에 있어서는 자기도 결코 기무라에게 지지 않을만한 치밀한 머리를 갖고 있을 것 같았다.

중학시절에 있어서 감상주의자 콘사이스의 우유부단한 행동을 격려하고 영웅주의자 대통령의 탈선적 행동을 제지하여 학생간에 벌어진 온갖 「트러 불」을 적당히 조정하던 영민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수송 열차가 , 천진에 도착하였을떄, 기무라가 영민의 편지를 띄울려고 포옴으로 어정어정 내려 가는 것을

「아, 잠깐.」

하고 영민은 기무라를 불러 편지를 도로 달랬다.

「왜요?」

「좀 사정이 있어서 그 편지는 그만 두겠읍니다.」

영민은 편지를 도로 찾아 조각조각 찢어 버렸다.

「군이 가장 가까이 하는 미모의 여성에 주의를 하시요. 그는 모국의 스파이라고 하오.」

이 대목이 암만해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운명은 재천」이라고 오창윤씨를 본받아 보려 하던 자기 자신의 과오를 영민은 깨달았던 것이다.

잘못하면 그것은 조국을 위하여 날뛰는 귀중한 친구의 일신을 망치는 결과를 맺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력을 하자. 벌써부터 운을 바라는 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열차는 다시 천진을 떠나서 진포선을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고 가도 가도 즈음이 없는 이러한 천문학적인 넓이를 가진 광대한 평원이 땅 위에 있다는 것을 직접 눈 앞에 볼때, 영민의 사색은 또다시 탈주의 계획에 분망하기 보다도 자연과 싸우고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의 한도(限度)를 측량하기 시작하였다.

제남(濟南)에서도 학병들은 부리우지를 못하고 또 다시 남쪽으로 끌리워 가고 있었다. 이렇게 자꾸만 남으로만 달린다는 것은 탄환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최전선으로 끌어 내어 총알 막이를 하려는 얄미운 그들의 계획임을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광막한 지역을 지배할 능력이 과연 일본에게 있을까요?」

기무라와는 그동안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에 영민은 낮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물었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했다고 떠들지만 그것은 지역(地域)이 아니고 점(點)과 선(線)일 뿐이지요.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 연선 뿐이지요. 연선에서 조선 리수로 四[사], 五○[오공]리만 떨어져두 거기는 벌써 게리라 부대의 세력 범위랍니다. 철도 경비대가 매일처럼 몇명씩 쓰러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한 사정까지 기무라는 알고 있었다.

영민은 일종의 놀람을 가지고 물었다.

「그런 자세한 사정을 어떻게 다……」

기무라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떠나기 전에 「 공부를 좀 해봤지요, 이쪽 사정을 모르고야 어떻게……」

도망을 하겠느냐는 의미의 말이었다.

영민은 또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막연한 생각으로 탈주를 꿈 꾸고 있던 자신이 맹랑하기도 하였다.

3[편집]

「천진서 낼려면 편지는 왜 그만 뒀어요?」

얼마 후, 기무라가 문뜩 그런 말을 물었다.

「좀 위험해서요.」

「무슨 편진데요?」

「북경에 있는 내 친구한테 하는 편진데, 나의 탈주를 외부로부터 좀 도와 달라는 편지었지요.」

그때 기무라의 눈이 번쩍 빛나며

「아, 그런 친구가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이제라도 다시 편지를 내서 응원을 청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 편지가 본인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들어 갈 것 같아서 그것이 무섭읍니다. 더구나 나 보다도 그 친구 자신의 입장이 위험해요. 열렬한 애국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다년간 중국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니까요.」

「음, 그렇다면……그러나 아까운 걸요!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기무라는 무척 구미가 동하는 모양으로 달려 붙는다.

「그래서 영어로 써 보았지만 역시 안되겠어요.」

「그러나 그런 좋은 끈이 있는 걸 놓치기는 아까운대요.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다른 사람은 알아 보지 못할 그런 무슨 암호 같은……」

그순간 영민은 저도 모르게

「앗, 그렇다!」

하고 외쳤다.

「좋은 수가 있읍니다! 아, 무척, 무척 좋은 수가 있어요. 아, 그걸 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고!」

영민은 자기 목소리가 조금 높았던 것을 뉘우쳤으나 기차의 소란한 괴음은 영민의 그 흥분한 음성을 완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슨 좋은 방도가 있어요?」

기무라의 얼굴이 그 어떤 커다란 기대와 함께 긴장을 하였다.

있읍니다 아주 신통한 「 ! 방도가 있지요. 절대로 다른 사람은 절대로 알아보지 못할 교묘한 통신 방법이 있지요!」

「그게 무언데요?」

「가만 계세요.」

영민의 흥분은 대단히 컸다. 그리고 그것을 주위에 보이지 않기 위하여 보다 더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궁즉통야(窮則通也)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영민은 서간지를 끄내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보통 편지와는 달라서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다.

그동안 기무라는 지휘관들이 앉아 있는 쪽을 한두번 힐끗힐끗 돌아 보고 나서 영민이가 서간지에서 펜을 떼기를 긴장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영민은 좀체로 서간지에서 펜을 떼지 못한다. 그 무엇을 골돌이 궁리하면서 한자한자 편전지에다 열심히 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민이가 사뭇 회심의 웃음을 입가에 지으면서 머리를 들었을 때, 그의 편전지 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상야릇한 숫자의 나열이 기입되어 있었다.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