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5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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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광고[편집]

1[편집]

유경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대가 이 서울에 있는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대가 돌아 오기를 이처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줄을 그대는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안 돌아온다는 것은 선량한 부모를 너무도 학대하는 행동이 아니냐. 모든 것은 오로지 그대 혼자만의 오해이니 만나기만 하면 오해는 풀릴 것이다.

유경아. 그대에게는 하등의 책임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이는 훌륭한 인물이다. 그러한 훌륭한 청년을 그대가 발견하였다는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히 여기는 바이다. 그대가 지금 부모 앞에 책임을 지겠다고 입을 악물고 노력하는 그 노력이야말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헛된 노력일 뿐이다. 그 청년은 그대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주책없는 인간이 아니다. 아니, 그대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좀더 훌륭한 인격을 우리는 발견한 것이다.

유경아.

아무 말 말고 하루 바삐 집으로 돌아 오너라. 아니, 오늘부터 너의 어머니는 종로 종각 앞에서 매일처럼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다.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달이구 두 달이 구 네가 나타날 때까지 종각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한다. 만일 그대가 이 글을 보고도 그래도 선뜻 어머니 앞에 나서지 않고 배길 그러한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차라리 그 용기를 가상타 하여 영영 그대를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을테니 그리 알고 선처하여라.

二[이]월 十[십]일 ─ 아버지로 부터 ─ 그 순간 유경은

「흐, 흐, 흣……」

하는 격렬한 울음 소리와 함께 들었던 신문으로 얼굴을 탁 덮어 버렸다.

「어머니!」

유경은 어머니를 불렀다.

「아버지!」

유경은 아버지를 찾았다.

「아아, 어머니, 어머니!」

유경은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젖꼭지를 물었던 어린애가

「으악 ─」

하고 울어 댔다.

벌떡 일어서서 유경은 흐르러진 머리카락을 연방 추켜 올리면서 다시금 신문 광고를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二[이]월 十[십]일 ─ 二[이]월 十[십]일이면 벌써 사흘 전이 아닌가!

그럼, 그럼 사흘 동안을 어머니는 종각 앞에 꼬박 서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셈이 아닌가!」

사흘 전 것은 낡은 신문이다. 주인 집에서 보는 신문을 이렇게 때때로 빌려다 보는 유경이었다.

「사흘 동안이나……사흘 동안이나……」

눈물이 뭉클뭉클 쏟아진다. 아침 여섯시 부터 밤 열시까지 사흘 동안을 꼬박 한길 가에 서서 기다리는 어머니의 가엾은 모습이 가슴 아프게 유경의 그 모난 성격을 드디어 쳤다.

「어머니를 너무나 학대하누나!」

하는 생각이 유경에게 들었다.

오뚝이처럼 방 한가운데 오뚝 서서 병후의 종잇장같이 새하얀 얼굴이 자꾸만 쏟아져 내리는 눈물속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유경은 불이 붙는 것처럼 울어 대는 금동이를 재빨리 뒤집어 업었다.

「아주머니, 지금 몇 시예요?」

방을 나서서 함박 눈이 부슬부슬 쏟아져 내리는 뜰 안으로 내려 서면서 유경은 안채를 향하여 시간을 물었다.

「아이유, 이 밤중에 어딜 나가시유?……아홉 시가 넘었는데……」

방문을 탁 열어 재치며 주인 마누라가 어둠 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주머니, 잠깐 나갔다 오겠어요.」

「아직 몸도 채 추세지 않았는데 이 눈 길을……」

그런 말을 등 뒤에 들으면서 유경은 눈 내리는 어두운 개천 가 길을 삼선교 다리 목을 향하여 꿈결처럼 허둥지둥 걸었다. 걷는 것이 아니고 절반은 달리는 유경이었다.

서주에서 띄운 영민의 편지를 받고 오 창윤씨 내외는 생각다 못하여 이상과 같은 장문의 신문 광고를 내었던 것이다.

2[편집]

그리운 사람 영민을, 금동이의 아버지 백 영민을 어쩌면 만나 줄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막연한 희망을 품고 폭포수와같은 감정의 격류(激流)속에 휩쓸리고 딩굴면서 四十[사십]도의 고열의 몸을 이끌고 경성 역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던 오 유경이었다.

그러나 요행을 바랬던 유경의 한 줄기 희망은 그냥 한 줄기 희망 대로 남았을 뿐, 고열의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을 때는 생사의 경지를 오락가락 하는 중태에 빠진 유경의 병세였다.

의사는 병인의 간호를 소홀히 한 운옥을 나무라며

「오늘 밤이 고빕니다. 그러나 오늘 밤만 무사히 지내면 열은 계속하여 쭉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이튿날 점심 때부터 유경의 신열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여 사흘 만에는 三十七[삼십칠]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닷새채 잡히는 날은 마침내 평온으로 내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유경의 병환은 고비를 넘겼지만 그것은 동시에 짖궂은 풍랑 속에서 처녀 항로의 뱃사공이 된 오 유경으로 하여금 운명의 고비를 넘어 서게 한 결과를 맺었던 것이다.

二[이]월 달에 접어 들면서부터 운옥이가 한사코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유경은 자리를 떴다.

「금순 언니, 내가 이처럼 삶의 길을 다시 찾은 것은 오직 언니 때문이야요. 언니는 내 일생의 은인이야요.」

「혜경이가 이처럼 나아 준 것만이 그저 기쁘고 신기해서 눈물이 날 지경 이야요.」

모진 광풍 속에서 고락을 같이 한 과거 七十[칠십]일 동안의 혹심한 고달픔을 기꺼운 눈물로 회상하는 순간을 운옥과 유경은 가져 본다.

고달픈 과거도 회상만은 즐겁다. 두 여인은 쓸쓸한 웃음을 가볍게 입 가에 지으며 이제부터 또다시 걸어 나가야 할 갱생의 길을 제각기 저대로 마음속으로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어떤 날 저녁 무렵이었다 . 저녁을 먹고 유경의 최후의 재산인 손목 시계를 가지고 혜화동 로 ─ 타리 옆에 있는 전당포엘 갈려고 집을 나섰던 운옥이가 十[십]분도 못 되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헐레벌떡 뛰쳐 들어 왔다.

「언니, 왜 그러슈?」

유경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히며 놀라물었다. 그러나 운옥의 그 새파랗게 질린 얼굴빛 보다는 운옥의 목소리는 비교적 침착하였다.

「혜경이, 잘못하면 가택 수색을 받을지 몰라!」

「가택 수색?」

유경은 또 한번 놀라며

「가택 수색을……왜? 무슨 일이 생겼수?」

「전차 길에서 애꾸눈일 만났어!」

「애꾸눈이?……아, 그 지긋지긋한 헌병?……」

「동리 밖 개천 가까지 따라 왔었는데……바루, 바루 이 집이라는 건 똑똑히 모를꺼야. 하지만……」

「아이머니나! 그럼 어쩌나?……빨리 다른 데로 도망을……」

운옥 보다 유경이가 더 서둘렀다.

「가만 있어요! 너무 서둘다간……」

운옥은 방 한복판에 오뚝 버티고 서서 그 무엇을 골돌히 생각하다가 후딱 문 옆으로 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었다.

3[편집]

시계를 가지고 운옥이가 개천 가 넓은 길을 삼선교 다릿 목으로 나가서 바로 전차 길에 다달았을 때였다.

혜화동서 성북동 고개를 넘어선 전차가 쏜살같이 내려 와서 삼선교 정류장에서 승객을 부리고 다시 돈암동을 향하여 출발한 바로 그 전차 속에서 운옥은 애꾸눈이 박 준길의 얼굴을 보고 그 전차 속에서 운옥은 애꾸눈이 박준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은 혁대에 매달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섰던 박 준길이가운옥의 얼굴을 다릿목에서 발견한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운옥이 보다 못지 않은 놀람을 가지고 애꾸눈의 얼굴이 번쩍 빛나면서 휙 들리었을 때는 운옥은 벌써 가던 길을 도로 홱 돌아서자 쏜살같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달음박질을 . 치면서 운옥은 후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단 정류장을 떠났던 전차가 미친질을 하듯이 十[십] 여간 길이를 미끄러져 가다가 뚝 멎지를 않는가. 국민복이 뛰어 내린다.

「아아 ─」

석달 전 동대문 거리에서 하던 그 악착한 운명의 경주가 또다시 운옥을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단 떠났던 전차가 다시 멎을 동안에 운옥과 준길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것이 불행중 다행이랄까. 동리 밖까지 따라 오는 준길을 최후로 돌아다 보고는 집으로 뛰어 들어 온 운옥이었다.

운옥은 문에 귀를 기울이고 바깥의 인기척을 잠시동안 살피다가

「혜경이!」

하고 가만히 불렀다.

「언니?」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어 버릴 두 여인의 긴장한 얼굴이다.

「이번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것 같애요.」

여전히 귀를 기울이면서 하는 속삭임이었다.

「언니, 어디루……어디루 가요?」

「먼 데루……」

「먼 데가 먼 데가 어디요?」

유경은 운옥이 발 밑에 꿇어 앉아서 운옥의 싸늘한 손목을 와락 더듬어 잡았다.

「저 머언 북쪽 나라로……」

「북쪽 나라라고요?……언니, 만주로 가슈?」

「만주 보다 더 먼 데루 갈는지두 몰라.」

「아아, 언니 금순 언니!」

「혜경이!」

금동일 붙안은 유경은 무릎 걸음으로 다가 서면서 한 손으로 운옥의 두 다리를 쓸어 안았다.

운옥은 연방 대문 밖의 인기척을 살피며 한 손으로는 문 고리를 잡고 한 손으로는 유경이의 머리를 안타깝게 쓰다듬어 주었다.

「운이 좋으면 오늘 밤으로……운이 나쁘면 지금이라도 뒷 문으로 내빼야 해요! 저 놈은 며칠을 두고라도 이 근방을 이 잡듯이 뒤질테니까.」

「언니.」

「가만 있어요.」

운옥은 부리나케 방 구석으로 가서 조그만 보따리를 끄내 들었다.

「언니, 대문은……대문은 잠겼어요?」

운옥이 대신 유경이가 발딱 일어서자 문고리쇠를 잡으며 가만히 외쳤다.

4[편집]

「잠겼어. 아, 혜경이 ─」

「네?」

운옥은 자기 손목에 찼던 유경이의 시계를 끌렀다. 재작년 가을, 영민이와 함께 은좌에 나갔다가 「핫도리」에 들려서 한 시간 동안이나 골른 「푸라치나」 四[사]각형이다.

운옥은 시계를 도로 유경에게 내주며 빠른 말씨로 「내일 아침 주인 아주머니더러 좀 잡혀 달라구 부탁해요. 그리구……」

「아아, 금순 언니, 정말 가슈?……」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응, 갈 수 밖에 ─」

운옥은 유경의 손목을 힘있게 잡으며

「혜경이의 몸이 좀더 추센 담에 떠났으믄 좋겠지만 사정이 이처럼 되고 보니……」

유경은 억하여

「언니, 갈램……정말 갈램 이 시계 갖구 가세요.」

「아이유, 혜경이두!」

굳이 사양하는 것을 유경은 달려 붙어 운옥의 손목에다 시계를 채워 주면서

「날 생각할 때, 이 시계를 들여다 보세요. 이 시계를 들여다 볼 때, 날 생각해 주세요.」

「그럼 혜경인 내일부터 어쩔려구?……무얼루 쌀을 팔려구……」

「그런건 염려 마세요.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 하지않았지만, 이 서울엔 대궐 같은 내 집이 있어요. 내 생각만 돌아 섬 그런 건 문제 아냐요.」

「그럼 혜경이, 기념으로 이 시계를 고맙게 받을테야요. 그리구 하루 바삐 집으로 돌아 가요!」

「언니, 그런데 노자가 없어서 어떻게 해요? 그런 먼 델 갈램……」

유경은 운옥의 얼굴을 뚫어지게 잠깐동안 바라보고 섰다.

「괜찮아요. 어떻게든 될테지.」

「가만 계세요.」

유경은 어쩔 줄을 모르고 비둘기처럼 방안을 도록도록 돌아다 보다가 가만히 문을 열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갔다.

사실 운옥에겐 노자가 필요했다.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방 한가운데 우뚝 서서 운옥은 가만히 눈을 감아 보았다.

「운옥이다! 운옥이다!」

물결치는 깃발, 아우성 치는 함성 가운데서 운옥은 분명히 그 한 마디를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들었다고 운옥은 생각하는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영민은, 그때 확실히 돌 기둥뒤에서 손수건을 흔들고 선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무섭게 손을 내 젔던 광경이 눈 앞에 알알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안방에서 한참 동안 주인 아주머니와 둥얼둥얼 이야기하고 있던 유경이가 돈 五[오]백 원을 장만해 가지고 건너왔다.

「자아, 언니, 암 말 말구 이걸 갖구 가세요.」

「아, 이런 대금을……」

운옥은 놀랐다.

「암 말 말구……」

운옥은 눈물이 폭 쏟아지도록 고마웠다.

「그럼 혜경이. 이 돈을 당분간……」

운옥은 재빨리 돈을 손수건에 싸서 허리춤에 쓸어 넣었다.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던 바깥이 인젠 완전히 캄캄해졌다. 그 캄캄한 장막을 뚫고 운옥은 뒷문으로 살그머니 빠져 나가서 금동이 볼에다 입을 맞추고 유경의 손을 꼭 잡으며

「그럼 혜경이! 또 다시 만날 때를……」

「금순 언니!」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속삭인 작별의 인사를 눈물로 남겨놓고 유경의 시야에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운옥이었다. 너무도 허무한 작별이다.

「고달픈 언니!」

유경은 자기 자신의 환경을 망각하고 금순 언니의 그 삭막한 고달픔만을 골똘히 생각하며 금동이를 안은채 언제까지나 어둠 속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러나 애꾸눈이는 그 이튿날 동리 초입에서만 가택 수색을 하였을 뿐 유경이가 있는 데까지는 다행히 손이 뻗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