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5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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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는 오 유경[편집]

1[편집]

그날 밤 어머니와 딸은 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지나간 반 년 동안의 쌓이고 쌓였던 긴 이야기로 밤을 꼼빡 새웠다.

영민이가 동경서 나와서 모든 것을 솔직히 아버지에게 이야기 하였다는 말과 어렸을 적에 허씨 딸을 민며누리로 데려다가 길렀으나 종시 마음에 들지 않아 집을 쫓겨 나오면서까지 유경을 좋아하였다는 말과 모든 것은 춘심이 년의 조작이라는 말과 그리고 그 춘심이 년도 인제는 제물에 물러가 버렸다는 말과 학병 권고차로 동경에 갔던 이버지가 영민을 데려 내다가 만주로 몰래 탈출시키려다가 운이 나뻐서 헌병에게 붙들리어 마침내 북지로 출정하였다는 말을 하였을 때 발딱 자리 위에 일어나 앉으면서

「북지요?」

유경은 물었다.

「응 ─」

「그럼 아버지두 그날 정거장에 나갔었어요?」

「어디가? 용산 부대에서 엽서가 왔었지만 아버지는 그때 온천에 가구 없었구……」

아아, 그럼 그날 역시 그이는 경성역에서 현지로 출정했었구나 ─ 그런 것을, 조금만 더 일찌감치 나갔더라면……하는 강렬한 뉘우침으로 가슴이 터져나 갈 것 같은 유경이었다.

자기의 편지를 보고 서울에 내려서 그리도 안타깝게 자기를 찾아 헤매이었다는 영민을 생각할 때 유경은 정말 안절부절을 할 수가 없었다.

「신문 광고에두 그런 말을 썼었다지만 너이 아버지는 그런 훌륭한 사람을 남편으로 택한 유경이 너를 어떻게나 칭찬하는지 모른단다. 그처럼 진실한 사람을 네가 글쎄 왜 그렇게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다구……모두가 다 그저 그 춘심이 년 때문이지 뭐야.」

그러면서 어머니는 경대 설합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유경에게 주면서

「어서 네가 좀 읽어 보아라. 서주든가 어디라든가 하는 데서 보낸 편진데……」

(전략) ─ 그리하여 선생님의 그 지극하신 배념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오늘날 이 명예롭지 못한 운명의 길을 거닐고 있는 몸이 급기야 되고 말았읍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자기 자신이 개척할 줄로만 믿었던 소생의 인생관에 조그만 틈사리가 생겼음을 분명히 깨달았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동시에 두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없는 데서 출발하는 불가항력의 사실이오니 뉘우쳤댔자 뉘우쳐질 문제가 아니었읍니다. (중략)……선생님, 유경씨를 찾아 주십요. 유경씨는 틀림없이 서울에 있사오니 유경씨를 꼭 찾아내 주십시오. 그리고 소생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도록 힘써 주십시요. 유경씨의 오해를 풀어 드리기 전에는 죽어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할 영민이올시다. 변변치는 못하오나 이미 유경씨의 사랑 앞에 바친 이 몸이요 언제 죽어도 아깝지 않은 목숨이오니 유경씨의 오해 없는 깨끗하고도 따사로운 한 마디를 이 귀로 듣고 죽고 싶소이다. 유경씨를 만나보기 전에 죽는다는 말 쓰고 싶지 않사오나 사람의 운명을 어찌 감히 예측하오리까. 살아 보다 살아 보다 불행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몸이 되올 때는 원컨대 선생님, 부디부디 소생의 소원 하나만 들어 주십시요. 그것은 다름 아니오라, 유경씨의 허약한 몸을 괴롭힘으로써 이 세상에 생을 받은, 그 어두운 운명을 지닌 어린애로 말하면 선생님과 사모님 내외분의 귀여운 손자인 동시에 탑골동 제 향리에서 삼대 독자 외아들을 싸움터로 내보내고 매일처럼 독한 약주로 벗을 삼는 제 늙으신 아버지와 매일처럼 눈물로 벗을 삼는 제 가엾은 어머니의 귀여운 손자이기도 하옵니다. 선생님, 소생이 이러한 청원이 분에 넘친다 생각치 않으시거든 여생이 얼마 되지 않는 제 늙으신 부모님으로 하여금 하루 바삐 손자와 며누리의 얼굴을 보시도록 선도하여 주옵시옵기 바라오며……(후략)……

유경은 후딱 편지에서 머리를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 그 이상 더 계속해 읽을 수가 없었다.

2[편집]

서주에서 띄운 편지였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황량한 벌판을 정처없이 끌리어 가고 있는 영민의 처량한 모습이 안타깝게 뼈가 저리도록 유경은 그리워졌다.

「아, 영민씨!」

유경은 발딱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어머니가 곁에 없었던들 유경이의 목소리는 좀더 자연스럽게 사모하는 내 남편의 향기로운 이름을 거침없이 불렀을 것을……

갑자기 젖꼭지를 잃어버린 금동이의 입술이 잠시 동안 흐물거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자기의 그 뾰족한 성품이 영민의 진실성을 너무도 혹독하게 학대한 것을 생각하니 유경은 정말 하늘이 무서워지고 신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유경아, 어서 자려므나.」

그러면서 어머니도 따라 일어났다. 일어나서 유경의 여윈 어깨와 까칠한 목덜미를 다정스레 쓰다듬어 보며

「글세 네가 벌써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됐구나.」

눈물이 글성글성하면서도 어머니는 반 년 동안의 딸의 성장이 한편 신기하기도 했다.

「어머니 ─」

유경은 자리 위에 가만히 꿇어 앉아서 두 눈을 조용히 감은채 부드러운 음성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오냐, 나 여기 있잖느냐?」

「어머니.」

「글쎄 왜 그러느냐?」

「아버지는 정말루 그이를 좋아하세요?」

「암, 좋아하시구 말구! 너의 아버지가 그만 홀딱 반하셨단다. 하늘 아래 땅 위에 둘도 없는 그런 훌륭한 사위를 맞을 줄은 정말루 모르셨다구……」

「어머닌?……」

「응?……」

「어머니두 그이를 좋아하세요?」

「좋아가 다뭐냐? 그런 훌륭한 사위가 굴러 들어 올 줄이야 글쎄……」

조용히 감은 유경의 두 눈시울에서 더운 눈물이 주르루 흘러 내렸다.

참회의 눈물인가, 감사의 눈물인가, 유경은 그저 자꾸만 울기만 한다.

「어머니.」

「응?」

「어떻검 좋아요?」

「무엇을……?」

「인제부터 전 제 생각을 모두 버리겠어요.」

「모두 버리다니……?」

그것은 어머니의 대답이 아니고 방문을 드르렁 열고 들어 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오 창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죽었던 딸이 살아 들어온 것 같은 이 기꺼운 밤을 홀로 사랑방에서 지낼 수가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중얼중얼하는 안방의 말소리가 그리워서 찾아 들어온 것이다.

「술상을 채릴까요?」

어머니도 기쁘시다.

「한 잔 주우.」

오 창윤은 만족한 안색을 지으며 금동이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음, 고 녀석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번듯번듯 잘두 생겼다.」

「아이구 맙수사.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늦바람 피면 큰일 날라.」

「또 쓸데없는 말만……」

춘심이 이야기만 끄내면 움쭉달싹도 못하는 어제 오늘의 오 창윤이다. 아니, 적어도 표면만으로는 그러했다.

「쓸데없긴 왜 쓸데 없어요? 우리 집안 망쳐 놓은 게 누구게? 모두가 다고 방정 맞은 년 때문이지뭐야요?」

「아, 글쎄 누구가 안 그렇대나?」

손수 술상을 채리려 나가는 마누라의 뒷모양을 힐끗 바라보며 오 창윤은 소리 없는 웃음을 혼자서 싱긋이 웃어 본다.

3[편집]

「그래 무엇을 모두 버린다는 말이냐?」

몇 잔 술에 얼근해진 오 창윤은 그러면서 조용히 꿇어 앉은 딸의 얼굴을 문득 들여다 보다가

「음 ─」

하고 다시 술잔을 들면서

「울고 싶을 땐 싫건 울어보는 것도 좋아. 눈물은 모든 설음을 씻어 버린다고 했어. 너처럼 울고 싶은 때두 입을 악물고 울지 않는 애두 있더라면 그건 의사의 말을 들으면 아조 몸에 나쁘다던데. 울고 싶을 땐 울고 웃고 싶을 땐 웃고 제 힘에 벅찬 일이 생기면 그리 잘나지 못한 아버지지만 아버지의 힘을 빌리는 것도 무방한 일일텐데……」

「아버지!」

유경은 그때 눈물 어린 얼굴을 들며 아버지를 정면으로 쳐다 보았다.

「오냐, 말을 해 보아라.」

「저는 이제부턴 제 생각을 모두 버리겠어.」

「무슨 뜻인고?」

「저는 혼자서 이 세상을 걸어 가기가 무서워 졌어요.」

「음 ─」

「아버지, 저를 부축해 주세요, 그렇지 않음 저는 또 쓰러질 것 같애요.」

날카롭게 모가 난 오 유경의 성격이 드디어 꺽어저 나가는 순간이다.

유경은 아버지 앞에 마침내 머리를 숙였다. 지나간 날의 발랄한 의욕과 투지(鬪志)는 다 어디로 갔는고?…… 그 힘없이 숙으린 딸의 목덜미가 어쩌면 저처럼도 여위고 가냘프뇨? 음푹 들어간 눈이며 살이 쪽 빠진 볼이며 핏기 없는 얼굴이며…… 오오, 가엾은 내 딸 유경아, 너는 인제야 인생을 알았느뇨?……

오 창윤 내외는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저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손바닥이 닳도록 딸의 수척한 등골만 쓰러주고 있다.

「오냐, 오냐, 좋은 말이다. 네 입으로부터 좀더 미리 그 한 마디를 들었던들 너는 오늘날의 그 혹독한 인생의 풍량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지 않고 다시 내 앞에 돌아 왔다. 죽지 않은 이상 네가 겪은 그 혹도한 인생고(人生苦)는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비료 ─ 귀중한 인생의 거름이 될 것이다.」

「아버지.」

「오냐.」

「아버지는 정말루 그 사람을 좋아 하세요?」

「그 사람이라니, 저……저……백군 말이야?」

「……네 ─」

「아따, 이게 무슨 말인고?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이 아버지는 백군을 좋아한다.」

「아버지!」

유경은 그만 감사의 정에 억하여 방바닥에 업드려저 흐늑흐늑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그저 딸이 죽지 않고 살아 온 것만이 신통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때 유경의 긴장한 얼굴이 후딱 들리었다.

「아버지, 그럼 저는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무엇을 하다니?……」

「그이를 위해서……」

옛날의 유경은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허심탄회 하기를 노력하는 유경이었다.

「음, 그이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 말이지?」

오 창윤은 팔짱을 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어요. 저는 한시 바삐 그이를 만나야겠어요.」

「만나서는……?」

「만나서 저의 모든 오해와 과오를 전해야겠어요.」

「그러면 네가 전지(戰池)로 그의 뒤를 따라 가겠다는 말이냐?」

「네!」

유경은 분명히 대답하였다.

「야, 네가 어디로 따라 간다는 말이냐?」

어머니는 깜짝 놀란다. 아버지는 그때

「잘 알겠다. 네 뜻을 이 아버지는 잘 알겠다. 그러나 그것은 백군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만 한다.」

「…………?」

「백군의 유일한 소원은 서주에서 띄운 편지에도 적혀 있지만 삼대 독자 외아들을 본의 아닌 전쟁터로 내보내고 향리에서 외로히 고달픈 여생을 보내고 있는 백군의 양친에게 유일한 낙이 될 며누리와 손주의 얼굴을 뵈이는 것이다.」

「…………」

유경은 대답이 없다.

너는 인제 방금 네 입으로 「 아버지의 부축을 원했었다. 아버지의 힘을 빌고 저 했다.」

「네.」

「그렇다면 내 말대로 해 보아라. 그러한 위험한 곳으로 어린 것을 다리고 백군을 따라 갔대자 백군을 만날런지도 의심쩍은 일이고…… 어쨌던 무엇보다 먼저 백군의 양친을 만나 뵈는 것이 인간의 상도(常道)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백군의 유일한 소원일진대 그 소원을 풀어 주는 것이 한 그 지아비의 안해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알아 들을까?」

「알아 듣겠어요. 제 욕망과는 다소의 차이가 계시지만 유경은 아버지의 지시대로 움직이겠읍니다.」

「좋아! 유경은 영리해. 유경은 인생을 배웠어!」

오 창윤은 저윽히 만족한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