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5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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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의 길손[편집]

1[편집]

그런 일이 있은지 나흘 후의 일이다. 그것은 三[삼]월 초순 어떤 날 정오였다.

밤에는 그처럼 화려하던 조무장 용궁 홀도 낮이면 허연 먼지와 꺼먼 매연 속에서 피곤히 잠들고 있었다.

홀에는 마담 방 월령의 비서격인 목란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원들과 쿡들도 모다 영화 구경을 간 모양이다.

나미에는 요지음 며칠 동안 좀처럼 외출을 하지않았다. 혹시 장 욱으로부터 전화라도 걸어 주기를 심중 깊이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나미에는 「밴드」로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텅 비인 홀 안에 나미에의 「시나노 . 요루 」(지나의 밤)가 과히 서투르지 않을 정도로 흘러 나온다.

목란은 머리가 아파서 놀러 나가지 못한 나 어린뽀이 녀석 하나를 붙잡고 드넓은 홀 안을 제 멋대로 붙안고 돌아 갔다.

「마담, 다른 곡조를 쳐 주세요. 좀 더 기분이 나는 걸루……」

목란은 뽀이 녀석 가슴에다 얼굴을 파묻고 두 손으로 뽀이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마담, 왈츠, 왈츠를 처 주세요. 돌았어요. 돌았어요, 기분이 한창 돌았어요!」

「저년이 대낮에 기분을 막 내네!」

뽀이 녀석은 머리 아픈 것도 잊어 버린 듯이 싱글벙글이다.

왈츠가 흘러 나왔다. 나미에의 피아노는 볼 것이 없었으나 그래도 제법

「라 . 파로마」가 두 젊은 남녀의 청춘을 그럴 듯이 감미롭게 장식을 한다.

뽀이 녀석은 자기 가슴에 다정히 파묻은 목란의 흑칠(黑漆)의 머리털 속에 코를 깊숙히 파묻으며 눈을 스루루 감아 버린다. 상반신을 서로 껴안은 채 두 사람은 눈을 찔끔 감고 드넓은 홀 안을 화창한 봄날의 잔물결처럼 천천이, 리드미칼한 걸음 걸이를 계속하고 있을 때다.

현관 문이 방싯 열리면서 흰 얼굴 하나가 조용히 나타났다.

돌아 앉아 피아노를 치는 나미에도 물론 알 바가 없었지만 눈을 감고 청춘의 일각을 즐기고 있는 목란과 뽀이 녀석도 그 흰 얼굴의 존재를 인식할 수가 없었다.

문 틈으로 조심성 스럽게 나타난 그 희고 갸름한 얼굴은 홀 안의 풍경에 약간 당황한 듯이 얼굴을 일단 움츠렸다가 다시금 용기를 낸 듯이 이번에는 상반신을 문 틈으로 살그머니 들여 밀면서

「저…… 저…… 잠깐 미안하지만 말씀 한 마디…」

그러나 나미에의 피아노 소리는 그 흰 얼굴의 가는 목소리를 그들의 귀에까지 전달하지를 않았다.

희고 갸름한 얼굴은 이번엔 용기를 낸다는 듯이 한번

「에헴 ─」

하고, 인위적인 기침 소리를 냈다. 그 기침 소리에 목란이가 눈을 번쩍 떴다.

「누구야?」

하면서 뽀이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었다.

「저, 저, 미안하지만 말씀 한 마디……」

흰 얼굴은 부끄러운 듯이 안색을 붉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언어계통(言語系統)을 달리하였던 것이니, 목란은 그 흰 얼굴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약간 일본 말을 할 줄 아는 목란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일본 말도 아니었다.

목란은 혼자서 춤추며 돌아가는 뽀이 녀석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문깐을 향하여 걸어 갔다. 얼굴만 먼데서 바라 보았을 땐 몰랐었지만 가까이 걸어가서 문 틈으로 조심성 스럽게 내민 상반신은 분명히 한국옷이었다.

「저 미안하지만 말씀 좀 물어 보겠읍니다.」

흰 얼굴은 한국 말로 그렇게 물어 보았으나 상대자가 알아 듣지 못하는 사실을 얼른 깨닫고 이번에는 중국 말로

「저 미안합니다만 말씀 한 마디……」

「네, 무슨 말씀인지……?」

「여기 혹시 장 일수씨라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장 일수?……」

목란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런 분 없는데요.」

「아, 참 ─」

하고, 그때 그 흰 얼굴은 생각이 난 듯이

「저, 장 욱씨라는 분 말씀이예요.」

「오오, 쨩위(장 욱)!」

목란은 아주 표정을 크게 지으면서 멀리 피아노를 치고 있는 매담의 뒷 그림자를 핼끗 바라보다가

「어떻게 찾으세요?」

「그런 분 계시나요?」

「네, 계시지만 지금은…… 잠깐 계세요, 내 마담에게 여쭈어 볼테야요.」

목란은 토끼 새끼처럼 깡충깡충 「밴드」로 달려갔다.

흰 명주 저고리에 자주색 세루 치마를 입고 조그만 트렁크 하나를 든 그 희고 갸름한 얼굴을 가진 여인은 ─ 오오, 그의 이름 허 운옥!

2[편집]

거창하고도 황량한 이 어지러운 사바를 걸어 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뭇 인생의 도정(道程) 가운데서도 수난의 여인 허 운옥의 걷는 길이 어이하여 이처럼 도 가혹할 수 있으랴.

오늘날 이곳에서 백 영민에게 땐스를 가르처 주던 하세가와· 나미에를 허운옥은 왜 만나지 않으면 아니 되는고?…… 이것은 독자의 흥미를 위하여 작자가 미리부터 운옥의 인생에다 치(.穽[함정])를 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어째서 그러 하느냐?

허 운옥은 영원의 남편인 영민을 위하여 간호원을 지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외로운 신세인 오 유경의 병환 때문에 응모 할 기회만 놓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경에게서 보조를 받은 五[오]백 원이란 금액은 허운옥으로 하여금 단신 중국 행을 결심짓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압록강 다리를 건는 허 운옥은 남편 백 영민이가 어느 방향으로 출정을 했는지, 그 종적을 좀처럼 더듬을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역(驛)마다 학병 출정의 도정(道程)을 캐물어 보았으나 누구 한 사람 분명한 대답을 주는 이는 없었다.

궁한 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지푸라기는 아니다.

뗏목은 못될지언정 운옥이의 무게쯤은 간신히라도 붙들고 흘러갈 수 있는 아름들이 기둥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다. 운옥이가 장 일수를 찾게 된 것은 자기 몸을 의지하려는 생각은 결코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불가능하여도 영민이가 출정한 방향만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나간 날 걸핏 기억에 남았던 정양문 밖용궁을 찾게 된 것이며 거기서 다시 이 동장안가로 더듬어 온 운옥이었다.

이윽고 방 월령이 아니, 하세가와ㆍ나미에가 허 운옥이 앞에 섰다.

한국 옷을 입은, 그리고 나미에가 과히 우러러 보지 않는 한 민족의 구성원(構成員)인 이 초라한 여인을 눈 앞에 보는 순간, 그리고 현재 자기의 청춘을 불살리고 있는 장 욱이란 인물을 찾아 온 이 보잘 것 없는 식민지(植民地) 민족의 한 사람을 나미에는 결코 기이(奇異) 이상의 호의를 가지고 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미에는 중국어로

「누굴 찾으세요?」

하고 물었다.

「저 장 욱 선생을 좀 뵙고 싶은데요.」

운옥의 중국어는 나미에의 그것처럼 유창하지는 못했다. 벌써 十三[십삼] 년 동안이나 운옥은 중국어를 통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선생의 친척이세요?」

「아뇨.」

「그럼……?」

「제가 잘 알아 모시는 분이예요.」

「당신은 조선 사람이예요?」

「네.」

아아, 그러면 장 욱도 이 여인과 종족(種族)을 같이 하는 인물이었던가?……

「장 선생과는 동향이세요?」

「네.」

그랬던가! 나미에의 놀람은 실로 컸다.

「어떻게 찾으세요?」

「잠깐 만나 뵙고 싶어서요.」

나미에의 가슴 속을 한 점의 검은 구름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 간다. 이양과 같이 온순한, 이 배 꽃과 같이 청아하고 어여쁜 여인이 이처럼 돌연히 자기와 장 욱 사이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던 나미에였다.

이유 모를 질투의 불길이 나미에의 격렬한 심정을 자극하였다. 나미에는 좀 더 이 여자와 장 욱의 사이가 궁금해서

「이리 올라 오세요. 장 선생을 만나게 하여 드릴테니 ─」

「고맙습니다.」

운옥은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나미에를 따라 홀안으로 들어 섰다.

3[편집]

「밴드」가 있는 데로 가서 나미에는 피아노 앞에 앉고 운옥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의자에 권하는 대로 조용히 걸터 앉았다.

풍요한 두 젖가슴이 알린알린 들여다 보일 듯이 팽팽하게 감싼 화려한 중국 옷을 입은 나미에와 흰 저고리 자주 치마의 시굴 소학교 선생과도 같은 운옥과의 기이한 대조였다.

「누구신지…… 제 이름은 허 운옥입니다.」

운옥 편에서 먼저 인사를 청했다.

「허운옥 ─ 나는 방 월령, 이 집 마담이예요.」

「아, 그러십니까. 바쁘실텐데 이처럼 시간을 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바쁜 것 없어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마침 잘 오셨어요. ─ 무 ─ 란!」

「네.」

「커피 두 잔!」

「네.」

이윽고 두 잔의 커피가 왔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언제 여길 오셨어요?」

「아침 차에 내렸읍니다.」

「그럼 아직 여관두 못 잡았겠군요.」

「네, 아직……」

「여기 오면 장 선생 만날 줄 어떻게 알았어요?」

「一[일]년 전 장 선생이 서울 오셨을 무렵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리 찾아 오면 만난다구요.」

「一[일] 년 전이면 어느 때지요?」

「그러니까 재작년 겨울이예요.」

그렇다. 재작년 겨울 장 욱은 약 석 달 동안 나미에의 눈 앞에서 자취를 감춘 적이 분명히 있었다. 나미에의 호기심이 점차로 높아져 간다. 여간첩방 월령으로서의 날카로운 촉수(觸手)가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장 선생을 그처럼 잘 아신담 미스터 . 고마도 잘 아시겠군요?」

나미에는 마침내 한 수를 떴다. 면밀한 관찰력과 대담 무쌍한 행동 ─ 그것은 밀정(密偵)으로서의 필수 조건이다.

「미스터 . 고마?……」

운옥은 비들기처럼 눈알만 깜박거린다.

「고마라는 사람 모르세요? 장 선생이 가장 신임하는 둘도 없는 친군데요.」

장 선생이 가장 신임하는 둘도 없는 친구라면 신성호씨와 자기 남편 백 영민이가 아닌가.

그 순간 후딱 운옥의 머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개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장일수가 언젠가 백 영민의 별명이 꼬마, 혹은 미스터 꼬마라고 불렀다는 장 일수의 한 마디었다.

운옥은 입 가에 반만큼 웃음을 띠우며

「고마가 아니고 꼬마겠지요.」

「꼬마? ─」

네 그러나 「 . 그건 별명이구 본명은 백 영민이라는이예요.」

「백 영민? ─」

「네. 장 선생의 중학 동창이예요.」

「백 영민!」

나미에의 놀라움은 또 한 번 컸다. 자기의 구두코를 연방 문질러 주던 시굴뚜기 백 영민!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놀라움을 그리 쉽사리 표정에 나타내지를 않는 나미에었다.

「그 백 영민이란 사람, 중학을 졸업하고 어디 가 있었어요?」

「동경 유학 가셨어요.」

「오오, 동경 유학!」

「그이를 아시나요?」

「아뇨. ─ 그래 그이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세요.」

「이번 학도병으로 출정을 했어요.」

「오오, 출정 ─ 일본 제국주의의 불쌍한 희생자!」

나미에는 그런 말을 하여 상대자를 안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 꼬마한테서 장 선생께 편지가 왔죠. 보여 들여요?」

「편지라고요?」

운옥은 눈이 번쩍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