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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2권/6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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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와 장미 부인

[편집]

「한 잔 들어 봐요.」

「아니, 정말 전……」

「삐루는 술이 아니니까 괜찮어.」

「정말 전 먹을 줄 몰라요. 어서 마담이나 드세요.」

용궁 이 층에서 저녁 상을 사이에 끼고 주고 받는 나미에와 운옥의 대화였다.

「이거 왜 그러는 거야? 이 술이 돈이람 몰라두… 사람의 성의를 너무 무시함 못 써!」

몇 잔 삐루에 얼근해진 나미에다.

「마담, 용서하세요.」

「용서는 또 무슨 용서야? 내 언제 그대에게 용서를 청했었나?」

그러나 거기에는 대답이 없이 운옥은 수저를 가즈런히 놓으면서

「이처럼 진수성찬을 베풀어 주시어 염치도 없이 양껏 먹었읍니다. 어떻거면 이 보답을 할 것인지, 생각하면 막연하기 짝이 없읍니다.」

그러면서 머리를 공손히 숙였다. 운옥의 그러한 몸가짐이 너무나 겸손하고 엄숙했기 때문에 나미에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쯤으로 나미에의 마음이 누그러질 리는 만무했다.

「흥, 그만 했음 알아 볼 법두 허이. 아지 못꿰라, 과연 장 선생이 달 뜨는 저녁, 꽃피는 아침에 오매불망(寤寐不忘)하시던 현모 양처(賢母良妻)임에는 틀림 없거든!」

나미에는 권하던 술잔을 자기가 쭉 들이켜 버렸다. 지금까지 운옥은 한낱 낯설은 길손으로서의 겸양과 감사의 념으로서만 나미에게 대해 왔었다. 그러나 그 이상 운옥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이상 참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모욕하고 내가 가장 숭배하는 장 선생을 모욕하고 또 한 걸음 나아가서는 나의 남편되는 분을 모욕하는 극히 중대한 결과를 맺을 것이 아닌가!

운옥은 단정히 몸가짐을 가지면서 곧장 정면으로 나미에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극히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담 당돌한 말일지 「 , 모르오나 한 마디 분명히 말씀 드리겠읍니다.」

「─?」

나미에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이 허술한 차림차림을 가진 센진노· 은 나(조선 여자 ─ 천대하는 말)를 덤덤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전화를 받으실 적에도 그러한 말씀을 들었읍니다만, 그리고 그것은 한낱 농담일런지 모르겠읍니다만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장 선생과 저와는 결코 그러한 종류의 친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마담과 장 선생의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계신지 그것 역시 저는 모릅니다만 다만 제가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제가 장 선생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 뿐입니다.」

「내 농담이 약간 지나쳤단 말이죠?」

「제가 오늘 장 선생을 찾은 유일한 동기는 그 어떠한 사람의 행방을 알고 저 하는데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것 뿐이 올시다.」

그 순간 나미에는 가장 유쾌한 듯이

「하하하하……」

하고, 한바탕 웃어댄 후에

「그대가 하두 어여쁘고 청초(淸楚)하기에 약간한 질투를 해본 것 뿐이야.

과히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자아, 이 술 한 잔 들어 봐요.」

그러면서 나미에는 또 한 잔의 삐루를 권한다.

「용서하세요. 저는 아직 술을 입에 대본 적이 없읍니다.」

「괜찮아. 그만 했음 괜찮어. 내가 만일 남자람 한번 열심히 꺾어 보고 싶은 얄미운 꽃이야! 호호호……」

오늘 아침 문 정우가 아니, 고지마ㆍ도라오가 외출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장 욱이라는 청년은 암흑의 대통령의 중요한 끄나풀일런지 모르는 여러 가지 증거물이 생겼다. 수단을 가리지 말고 장 욱을 유혹하여 그의 몸둥이를 당국에 넘겨라. 나는 일이 바빠서 오늘 밤은 국(局)에서 철야다. 요건이 있거던 국으로 연락하면 된다.」

국이란 두말 할 것 없이 점령군의 정보국이다.

나미에는 운옥을 혼자 남겨 두고 발코니 ─ 로 나가서 난간에 몸을 의지하였다.

저녁 여덟 시 ─ 크고 작은 수 많은 등불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이 낡은 도읍의 하룻밤을 꿈결처럼 장식할 무렵, 홀에서는 뺀드의 음률이 화려하게 흐르고 우동 장사 할아버지의 애련한 챠라멜이 뒷골목의 어듬을 구슬프게 누비는 밤이다.

왜 이리 눈물이 흐르느뇨? 하세가와· 나미에가 언제 연애를 하였더냐? 소녀인 양 감미로운 눈물 속에서 여간첩 방 월령은 지나간 二十五[이십오] 년 동안의 더럽힐 대로 더럽힌 생명의 세탁을 하여 본다.

「장 욱! 내 사랑 장 욱!」

꺼질 듯한 긴 한숨과 함께 화판인양 빨간 입술로부터 날세게 뿜어 나오는 담배 연기는 금후에 있어서의 나미에의 거치러운 인생항로를 상징이나 하듯이 캄캄한 공허 속에 오리오리 찢어져 흩어져 버리는 허무(虛無)의 밤이다.

「장 욱! 그대의 그 호탕한 성품은 오늘 밤으로 서슴치 않고 월령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온갖 긍지와 모든 자유는 오늘 밤이 한정일런지도 몰라!」

사랑이냐, 조국이냐? ─ 여간첩 방 월령의 무서운 고민의 몸부림이 거기 있었다. 그렇다 실로 장욱을 살리는 것도 장 욱을 죽이는 것도 오직 나미에의 결의(決意) 하나에 달린 오늘 밤 아홉 시다.

그러나 나미에는 종시 거기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난간을 떠났다.

「운옥씨, 조금만 더 기다려요. 아홉 시엔 온다구 그랬으니까, 오면 곧 장 선생을 모시고 올라 올테니 좀 기다려요.」

「어디 가시나요?」

「홀엘 좀 내려가 봐야지. 이래 뵈두 용궁에선 무척 바쁜 몸이랍니다. 호호호……」

「송구헙니다.」

운옥은 정말로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홀은 호화로운 샨데리와 유랑한 음률과 방염(芳艶)한 육체의 파도 속에서 성애(性愛) 직전의 감미로운 꿈으로 말미암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나미에의, 아니 용궁의 마담 방 월령의 모란꽃과도 같이 화려한 자태가 홀에 나타나자 그처럼 열광적으로 춤을 추며 돌아가던 사나이들이 짙은 추파와 미소를 던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치 관대한 여왕처럼 방 월령은 목례를 하면서 넓은 홀 안을 한 번 삥 둘러 보았으나 장 욱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나미에는 비인 식탁으로 가서 털썩 몸을 던지면서 팔뚝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아홉 시 십 분 전!

「그이가 과연 오기는 올 것인가?─」

정말 장 욱이가 오늘 밤 이 자리에 나타난다면 어떻다고 정확히 지적할 수는 없으나 그 어떤 불길한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애서 나미에는 무섭다.

그리고 그 불길의 원인이 이 편에 있던 저 편에 있던 간에 나미에는 무서운 것이다.

「차라리 그이가 나타나지 않기를 ─」

나미에는 원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실상 나미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 모르겠다. 될대로 되는 수 밖에 없잖은가.」

마침내 나미에는 모든 것을 그때 그때의 있어서의 감정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무 ─ 란!」

춤이 끝나 스테이지에서 돌아 오는 목란을 나미에는 불렀다.

「아이 마담, 어느새 내려 오셨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대답을 않고

「나 오늘 밤 무슨 꽃을 꽂을까?」

나미에의 눈 앞에 놓인 화병에는 타오르는 듯이 새빨간 장미꽃이 한다발 탐스럽게 꽂쳐 있었다.

「장미는 가시가 있어서 손님들이 싫어허니까 백합이나 동백꽃으로 하세요.」

식탁마다 꽂친 꽃이 전부 다르다. 그래서 로 ─ 즈· 테이블, 캐멜리아·테이블 ─ 하고 꽃을 따라 테이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것은 나미에의 창안이다.

「장미는 가시가 있으니까 사내들이 싫어한다?─」

나미에는 처음 듣는 말처럼 신통하게 음미를 하여본다.

「그럼요. 자아, 오늘 밤은 동백꽃을 꽂으세요.」

그러면서 목란은 옆에 놓인 식탁에서 흰 동백꽃 한송이를 따다가 나미에의 가슴에다 달아 주면서

「자아, 오늘 밤엔 듀머 ─ 의 캐멜리아· 레디 ─(춘희 ─ 椿姬[춘희])가 되세요. 호호호……」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목란의 이러한 호의가 오늘 밤의 나미에게는 가슴 아픈 한 마디었다.

그렇다. 한 사나이에게로 향하는 애끓는 사랑을 끝끝내 안고 오랜 병상에서 피를 토하면서 이슬같이 슬어진 가엾은 춘희, 마르그리트가 되라는 말이냐?

목란아, 또다시 묻노니, 정열에 타오르는 새빨간 장미가 되어, 그 정열이 학대를 받음으로서 그 정열이 가시로 변해 버리는 장미부인(薔薇夫人)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냐? 목란아, 대답을 하여라.

「목란아, 대답을 하여라!」

「네?─」

「목란아, 대답해 봐라!」

「마담, 무엇을 말씀이야요?」

「아, 참,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마담은 갑자기 잠고대를 하시나 봐요.」

「그래, 참 잠고댄지두 몰라.」

그러면서 나미에는 그 무엇인가를 골돌히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이윽고 음성을 낮추며

「무 ─ 란!」

하고, 목란을 불렀다.

「네?」

「내 말을 잘 귀담아 들어요.」

「네.」

목란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오늘 밤, 만일 내 가슴에 핀 이 동백꽃이 장미꽃으로 변하는 일이 있거 든……」

「장미꽃으로요?」

목란은 의아스럽게 물었다.

「응, 장미꽃으로 변하거든 二九五○[이구오공]번에다 전화를 걸어 지배인 문 선생을 불러 가지고, 귀중한 손님이 오셨으니 지체 말고 돌아 오시라구……」

「귀중한 손님이……」

「응, 그렇게 여쭈면 알아 들으니까. 알겠지?」

「네, 분명히 ─」

「전화는 몇 번이지?」

「二九五○[이구오공]번.」

「항상 내 가슴을 주의해 봐요.」

「네, 염려 마세요, 마담.」

「그럼 됐어. 저리 가요.」

마담의 이 중대한 분부를 철저히 알아 모셨다는 듯이 목란의 영리한 눈동자가 한 번 반짝 빛나면서 저편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유달리 빛나는 눈초리와 함께 귀중한 손님 장 일 수가 선뜻 용궁 홀에 그 호탕한 자태를 나타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