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65장
거룩한 사랑 앞에 이 몸을 바치리니
[편집]1
[편집]자나 깨나 잊을 수 없었던 허 운옥은 물론 아니었다.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광영(光榮)을 위하여 청춘의 정열을 송두리채 바쳐 온 혁명의 아들 장일 수는 일개 시정(市井)의 연애인(戀愛人)으로서의 연연 우유(戀戀優柔)를 일삼을 수는 전혀 없었다.
허나, 가열한 싸움의 터에서 돌아와 일두루옥(一斗陋屋)에 피곤한 몸을 던질 때마다 한 사람의 이성으로서, 한 사람의 스승으로서, 한 사람의 동지로서 파출부 허 운옥을 생각하며 하룻밤의 안식을 장 일수는 일수 잘 찾았다.
그러한 허 운옥이가 오늘 날 장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화중(畵中)의 미인이나 성모를 바라보듯이 바라만 보고 있던 허 운옥이가 시적인양 장 일수 앞에 나타난 오늘 밤이다.
「운옥씨,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장 선생님을 꼭 찾아뵐려구……」
「반갑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기억에서 없애버리지 않고 이처럼 먼 길을 찾아 주시니…… 신군은 아직도 서울에 있는가요?」
「네, 계실꺼야요. 뵙지는 못하지만 때때로 잡지 같은데 글을 실리시니까.」
「김 준혁 박사도 안녕하시지요?」
「네, 저……」
「아직 독신인가요?」
「네, 아직…… 그러나 저는 벌써 병원을 나왔으니까 자세한 것은……」
「그러서요.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먼 길을 떠나셨읍니까?」
「네, 사정이 좀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후로 밀고……」
장 일수는 말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나미에는 유리 들창을 통하여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이라도 세는 것처럼 하염없이 창 밖의 어둠과 우뚝 마주 서 있었다.
마담 그러면 우리는 「 ,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낯서른 길손에게 안식의 하루를 제공하여 주신 덕택, 운옥씨를 대신하여 치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 미안한 말씀, 뭐라고 여쭐 바를 모르겠읍니다.」
운옥도 일어설 차비를 하면서 장 일수와 같이 중국어로 인사를 하였다.
나미에는 그냥 들창 밖 어둠과 우뚝 마주선채 싸늘한 어조로 톡 내쏘듯이
「괜찮소. 당신네 말을 다행히도 내가 알아 듣지 못하니 나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고 그립던 말 마음 놓고 해도 좋소. 나의 두 눈은 억지로라도 당시 네 자태를 시야(視野)에 들이지 않을 테니 나의 눈을 두려워 하지 말고 싫건 다정해도 무방하오. 이 방이 과히 누추하다 생각치 않거든 하루밤의 침구를 빌려 드릴 아량도 갖었소.」
그러면서 나미에는 무척 초조한 듯이 팔뚝 시계를 들여다 본다.
열 시 오 분!
「마담, 오해를 마시요.」
「변명은 없어도 좋소.」
「이 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여인이 아니요.」
「영양과 땐써어 ─ 신분이 달라서 미안합니다.」
이처럼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는 한이 없을것 같어서
「자아, 운옥씨, 빨리 이 자리를 떠납시다.」
「네.」
운옥은 어른 트렁크를 들고 장 일수를 따라 도어를 향하여 걸어 갔다.
그러나, 그렇다. 문은 장 일수가 열었으되 그 문을 사용한 것은 장 일수가 아니었다.
문이 열리자 바람처럼 쑥 방으로 들어선 것은 중국 옷에다 중절모를 쓴 용궁의 지배인 문 정우의 표정 없는 얼굴이었으며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 한 자루의 신경(神經) 없는 권총뿌리었다.
2
[편집]「대체 이것이 어찌된 연고인고? ─」
문 정우가 돌아오거든 그를 정확히 저격하는 동시에 스윗치를 눌러 용궁을 암흑의 세계로 만들어 버리라는 장 일수의 지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장 일수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일순간을 전신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간 날의 모든 노력과 앞 날의 온갖 사상(砂上)의 누각(樓閣)처럼 힘없이 허무러지려는 무서운 순간이다.
장 일수는 두 손을 벌려 자기 등 뒤에 선 운옥의 몸을 방지하며 후딱 머리를 돌려 나미에를 바라보았다. 그 쏘는 듯한 장 일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나미에는 삼면경 화장대의 상반신을 의지한채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새빨간 입술을 모아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고 있었다.
「음 ─」
장 일수의 입으로부터 한 마디 깊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대는 종시 나를 팔았다!」
그러나 나미에의 입술로부터는 여전히 담배 연기가 뿜어 나왔고 그의 윤택 있는 두 눈동자는 허공각을 꿈꾸는 사람처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밤만은 무사히 돌려 보내 주겠다던 그대의 약속이 이것이었던가?」
그래도 대답이 없는 하세가와· 나미에다. 뾰족하게 모은 두 입술로부터 머나먼 수평선 위에 둥실 뜬 한 조각 증기선인양 동그라미 연기가 한가스레 폭폭폭폭 허공에 흩어질 따름이다.
끝끝내 대답이 없는 나미에를 장 일수는 단념하였다. 단념하는 그 찰나, 장 일수는 홱 돌아서면서 재빠르게 주머니에다 손을 쓰러 넣었다. 그 순간,
「위험 천만, 위험 천만!」
문 정우의 입으로부터 비로소 무거운 한 마디가 흘러 나오며 총뿌리가 바싹 장 일수의 가슴 앞으로 다가들었다.
「어린 것이 그런 걸 갖구 있으면 위험 천만, 위험 천만!」
문 정우는 그러면서 장 일수의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앗아 자기의 주머니에다 쓰러 넣으며
「귀중한 손님을 이처럼 총뿌리로 대접을 해서 민망하오. 운수가 막히면 항우도 달싹을 못하는 법이니 하물며 대통령의 끄나풀쯤 가지구야 될 법한 말인가? 자아, 조용히 손목을 내밀고 포승을 받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문 정우는 한 손으로 쇠수갑을 끄내어 장 일수 앞에 내밀었다.
「…………」
장 일수는 대답이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 섰다.
「다이니뽕· 데이고꾸노· 호이리츠와· 소노· 츠미워· 니쿠미· 소노· 히도워· 니쿠마즈쟈!(대일본 제국의 법률은 그 죄를 미워하되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
문 정우는 비로소 가면의 중국어를 버리고 일본말을 썼다.
「비록 적국의 간첩일지라도 그 죄상을 참작하여 관대히 처분하는 것이 제국의 정신이다. 그대의 영도자 장 개석으로 말하면……」
그때 나미에가 홱 시선을 돌리며
「간져가히· 시데와· 고마루와· 센진나노요!(잘못 생각하면 안돼요. 선인(鮮人)이야요.) ─ 」
「응?…… 소오까(그런가)!」
문 정우의, 아니 고지마· 도라오의 놀라움은 실로컸다.
「소오닷다까! 쟈, 기미노· 슈료으므· 한또오징까?(그랬던가! 그럼 그대의 수령도 반도인(半島人)인가?)─」
고지마는 또 한 발 다가 섰다.
「…………」
장 일수는 또 한 발 물러 섰다.
「음, 지츠니· 게시카랑! 소오레· 오오꾸모· 헤이까노· 세끼시· 다루워· 와스레· 소고꾸니· 유미워히꾸또와· 난따루· 꼬도쟈!(음, 괫심하다! 황송하옵게도 폐하의 적자(赤子)인 것을 망각하고 조국에 총뿌리를 댄다는 게 무슨 노릇이냐?)─」
고지마는 또 한 걸음 다가서며
「네가 아무리 뒷걸음질을 했댔자 이 방은 좁다. 그 뿐인가, 용궁은 지금 너를 체포하기 위하여 관헌의 포위 속에 있는 것이다. 정문에도 뒷문에도, 그리고 바로 이 발코니 ─ 로 통하는 층층대 아래도 사복한 헌병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으면 조용히 수갑을 차는 것이 좋와!」
장 일수는 또 한 걸음 뒤로 움직이면서 이번에는 극도의 위험을 느꼈는지 뒤에 선 운옥을 방 한편 구석으로 떠밀어 놓았다. 총뿌리 앞에 두 사람이다 함께 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장 일수는 손을 들었다.
고지마· 도라오가 목란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네 사람의 사복 헌병을 대동하고 용궁에 도착하자 한 사람은 홀 안에다 배치하고 한 명은 정문에다 배치하고 한 명은 발코니 ─ 층층대 밑에다 수배를 하고 또 한 명은 뒷문에 다 세워 놓았다. 그리고 자기는 뒷문으로 들어가서 북쪽 층계로 올라 갔었기 때문에 장 일수가 박군과 송군에게 내린 명령은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3
[편집]운옥은 처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이 용궁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마담 방 월령이가 어째서 그처럼 자기의 이야기를 파고 들어 물었는지, 그 이유를 운옥은 지금이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한 사람의 동지로서 존경의 념으로 멀리 우러러 보던 장 일수는 역시 현재에 있어서도 우러러 보아야만 할 장 일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나간 날 명망과 권력을 아울러 지닌 오 창윤의 서재를 협박하여 땅개와의 결투를 감행한 장 일수가 오늘 날 또다시 이 무서운 곤경에 처하게 된 그 유달리 굵다란 생활면을 직접 눈 앞에 보는 순간, 인간 허 운옥은 지금까지 고요히 상상은 하였으나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어떤 중대한 가치 발견(價値 發見)의 도정(道程)에 선 자기 자신을 인식하였다.
내 영원의 그 지아비인 백 영민에게서는 아직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한 줄기 웅대하고 장엄한 몸서림을 운옥은 장 일수의 생활면에서 느끼는 것이다.
백 영민에 대한 연연한 애정 가운데서 일생을 마칠수도 있는 허 운옥인 동시에 좀더 넓이와 영원성을 가진 애정 ─ 한 민족에의 부어지는 거룩한 애정 가운데서 일생을 마칠 수도 있는 허 운옥일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반드시 우생학적인 견해를 묵수할 필요는 없을런지 모르되 지사 허 상진의 순국(殉國)의 피를 운옥이가 전해 받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운옥은 모든 것을 망각하였다. 자기가 멀리 고국을 떠나 삭풍 속에서 유달리 거세인 풍설을 무릅쓰고 남편 백 영민의 안부를 염려하여 이국을 찾아온 그 애당초의 소원을 잊어버릴 만큼 운옥의 온 정신은 오로지 한 민족의 일부분으로서의 자신을 싱싱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만일 이 자리에서 장 일 수가 죽는다면 비록 일개 연약한 몸일망정 장일수가 못다이루운 그 뜻을 배수하여 일생을 그 위대한 사업에 바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인간 허 운옥이가 쓴 이 「무방하다」는 한마디는 결코 이 세상의 모든 가치(價値)와 비교해서 씌어진 그것이 아니고 한 지어미로서의 한 지아비에게 바치는 그 개체적(個體的)인 정열보다 못하지 않은 가치성(價値性)을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어도 좋다! 장 선생을 이 궁지에서 구출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가능하다면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내 남편에게 바치는 정성 보다 더 큰 정성을 가지고 나는 그것을 감히 실행할 수가 있다!」
「죽어도 좋다 ─ 는 이 한 마디가 운옥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이 순간이야말로 오랜 침체(沈滯)하였던 허 운옥의 인생관이 좀더 크고 넓은 단계로 비약하려는 귀중한 모멘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몸을 닦은(修身[수신]) 후에 집을 돌보(齊[제])라 했다. 집을 돌본 후에 나라를 다스려(治國[치국])라 했다.
운옥은 비록 이러한 선인(先人)의 교훈을 의식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운옥의 건전한 애정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순서를 밟으려는 것이 아닐까? ─ 운옥은 트렁크를 움켜안고 방 한 모퉁이에서 오들오들 키질 하듯이 몸을 떨고 있었다.
장 일수는 손을 든채 약 한 간의 거리를 두고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좁은 방이다. 마치 개미가 체바퀴를 돌듯이 방의 가장자리를 삥삥 돌고 있었다.
「소용 없어.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팔다리가 상하고 결국은 우리의 손에 체포될 그대의 운명이다.」
새양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여유를 가지고 고지마는 장 일수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