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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3권/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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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바람이 부는 밤

[편집]

준혁이가 이층 서재로 올라 갔을 때 유경은 피아노 앞에 걸터 앉아서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아 ─」

유경은 약간 놀란다. 호물거리는 어린애 입에서 젖꼭지를 살그머니 빼며 가벼운 부끄럼과 함께 앞 가슴을 거두었다.

「오빠, 무슨 이야기가 그처럼 길었수? 난 아까부터 여기서 기다렸는데……」

준혁은 피아노 앞으로 천천히 걸어 오며 금동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준혁은 감개무량하다.

「접대 보다두 컸죠?」

그러나 준혁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어린애를 들여다만 본다.

너울너울 두 손을 내저으며 준혁을 향하여 벙글벙글 금동이는 웃는다. 자꾸만 웃는다.

「허어 ─」

준혁도 따라 웃었다. 따라 웃으면서 준혁은 약간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 노옴!」

하였다.

그냥 웃는다. 조그만 손길로 들여다 보는 준혁의 얼굴을 잡아나 볼려는 듯이 너울거린다.

「이 노옴, 내가 누군 줄 알구 자꾸만 웃어 주는거야, 응?」

「누구긴 누구야요, 아저씨죠, ─ 그래요!」

유경이의 명랑한 음향이다.

「아저씨? ─ 음, 아저씨!」

준혁의 말은 끝마무리에 가서 약간 신음하는 것같은 「토온」을 띠었다.

「그럼 아저씨죠, 뭐야요?……엄마의 오빠니까 아저씨죠. ─ 안 그래요.」

금동이의 얼굴은 그저 싱글벙글 ─ 금동이의 두 손길은 그저 너울너울 ─

「이 노옴, 무심한 놈 같으니라구! 내가 누군줄 알구?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던들, 내가 조금만 더 무지했었던들 이놈, 너는 이 세상에 생을 누릴 수가 없었을 놈이었다! 이 노옴, 무심하기가 짝이 없는 놈!」

「아저씨, 그런 쓸데없는 말씀 마라시라구, 그래요. 죽은애 나이 세 보는 것처럼 쑥스러운건 없다구, 그래요.」

이 노옴 무심한 놈 「 , ! 내가 웬만하면 너를 안아주지 않겠지만도 네가 너무도 천진난만하기에 안아 주는거야. 잘 기억했다가 어른이 되거든 아저씨의 은혜를 갚어야 하는 거야.」

준혁은 유경이의 손으로부터 금동이를 받아 안았다. 가볍다. 어린애란 이처럼 도 가벼운 것일까?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생리적인 질투의 감정이다.

「이 노옴, 어째서 요처럼 부드럽고 요처럼 연약한 귀여운 육체를 가졌느냐 말이다?……이 노옴, 어째서 요처럼 얄밉고 보기 싫고 오감(惡感)이 전신을 뒤흔들어 버리는 독기(毒氣) 있는 육체를 가졌느냐 말이다?…… 이놈!」

「아저씨, 그런 쓸데없는 말씀은 그만 두기로 합시다, ─ 그래요. ── 자아, 금동아, 이리온! 엄마한테 온!」

유경은 두 손을 내밀었다.

「금동이?……메지로 여대의 영문과 학생 ─ 가장 꿈이 많고 가장 쎈스가 풍부하다는 네 엄마가 왜 하필 고색창연한 금동이란 말이냐?」

「인간생활이 단조롭지가 않아 거리에선 하이힐에 스카 ─ 트만 날리다가도 집에 들어서면 된장찌개라우, ─ 그래요.」

유경은 금동일 받아 안으며

「아저씨의 말 재주가 일 년 동안에 무척 늘었구료, ─ 그래요.」

그렇다. 일 년이란 세월은 오 유경에게만 흐른 것은 아니다. 유경이의 변화가 복잡해진 그만큼 준혁이의 인생도 성장을 했던 것이다.

준혁은 돌아 서다가

「이건 무언고?……」

피아노 위에 세워 놓은 영민과 유경의 부부암의 사진이다.

유경은 얼른 손을 뻗쳐 세워 놓았던 사진틀을 가만히 피아노 위에 엎어 놓으며

「아저씨, 쓸데없는 말 그만 하시구 쓸데없는 물건 보지 마세요, ─ 그래요.」

「그 녀석, 갓난앤 줄만 알았더니 아저씨 등쳐 먹을 만큼 말 재주가 풍만한 걸!」

준혁은 그러면서 과일과 과자가 놓인 소탁자로 걸어 갔다.

「오빠, 나 사과 하나 깎아 주세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누구가 손님이구, 누구가 주인인고?」

준혁은 나이프와 사과를 집었다.

「손이 어디 있어요? 금동이가 내 두 손을 다 점령했으니……」

「손님이 사과를 깎는건 결국 금동이가 주인의 손을 점령한 때문이로군.」

「보세요, 어디 사과 깎을 손이 비었어요?」

「그러나 금동인 내 책임이 아니야.」

「아저씨, 심각한 말씀은 두었다 하시구 좀 명랑한 말씀을 들려 주세요, ─ 그래요.」

준혁은 사과 한 개를 정중히 깎아 금동이를 붙안은 유경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오빠가 깎아 주는 사과, 나 언제 먹어 봤나?」

「엄마, 그런 쓸데없는 회고담은 그만 두세요, ─ 그래.」

유경은 방긋이 웃음을 지으며 준혁이가 깎아 준 사과를 상보 위에 가만히 놓고 금동이를 안은채 자유스럽지 못한 두 손을 놀려 사과 하나를 깎아 준혁이에게 주면서

「오빠, 잡수세요.」

준혁은 사과를 받아 들며

「주인도 사과를 깎을 줄을 알았군요.」

하였다.

옥순이가 홍차를 갖고 들어 왔다.

「옥순아, 금동이 좀 받아 가.」

「네.」

옥순이는 금동이를 받아 들고 두 볼에 입을 갖다대이며 나가 버렸다.

「아이 참, 별이 총총해요.」

유경은 그러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들창 가로 걸어 갔다. 커 ─ 텐을 활짝 제껴 재치고 별이 수없이 반짝이는 밤 하늘과 마주 섰다.

그러나 준혁은 식탁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유경은 하늘을 쳐다 봤고 준혁은 차를 마셨다. 기이한 대조였다.

「오빠, 밤새가 울어요.」

유경은 캄캄한 정원 수목 사이에 밤새 소리를 들었다.

「오빠, 꽃바람이 불어요.」

「…………」

「오빠, 저 새가 무슨 샐까요?」

「그 새더러 이름을 물어 보시요.」

「오빠, 별이 흘렀어요.」

「우리 말로는 별이 장가를 갔다고 합니다.」

「아 또 하나 흘렀다.」

「그건 시집을 가는 거구요.」

「오빠, 이 광대무변한 지구는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

「오빠, 모르세요?」

「그것이 오늘밤 이 자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요?」

「손님을 초대했음 대화의 궁핍을 면해야 될것이 아냐요?」

「사교하려고 온것이 아니니까 대화는 없어도 좋습니다.」

「…………」

「…………」

「…………」

「…………」

「지구의 연령이 얼마나 되었을까? ─」

유경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만 년은 됐을껄 뭐. 아니, 그 보다는 더 됐을 꺼야. 四[사]만 년? 六 [육]만 년?……」

「一[일]백 六十[육십]억 년이라는 설도 있고 二[이]천 五[오]백만 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것은 지질학자(地質學者)와 천문학자(天文學者)에 따라 의견이 다르답니다. 그러나 보통은 一[일]억 년으로 추산을 하지요.」

「인류의 연령은 얼마나 될까? ─」

「…………」

「사람의 가치는? ─」

「…………」

「행복이란? ─」

「…………」

준혁은 들은척 만척 가만히 걸상에서 몸을 일으켜 모자를 쓰고 천천히 뚜벅…… 뚜벅…… 도어를 향하여 말없이 걸어 나갔다.

「오빠, 행복하세요! 길이, 길이!…… 유경은 진심으로 그것을 바래요!」

유경은 두 서너 걸음 준혁의 뒤를 따라 나가면서 외쳤다.

핸들을 잡고 준혁은 조용히 뒤를 돌아다 보며 말했다.

「유경이, 오늘 밤, 유경이가 오빠라는 말을 그처럼 흔히, 그처럼 기를 쓰고 사용하지 않아도 나는 벌써부터 유경이의 오빠가 되어 있으니까 염려 말아요!」

뚜벅 뚜벅 뚜벅 층계를 , , ─ 내려가는 준혁의 구두 소리가 정녕 가볍지는 않았다.

사월 중순, 꽃 바람이 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