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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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초시의 안신[편집]

1[편집]

봄의 「 노래는 지나갔다! 여름의 노래를! 여름의 노래를!」

유경의 작렬된 정열이 여름의 노래를 갈망하며 사랑의 광상곡 「항가리안· 랍쏘디 ─」를 정신없이 치던 지나간 날의 그 이층 서재 ─

「준혁 오빠, 길이, 길이 행복하세요.」

「유경씨, 내게서 이미 행복은 사라졌읍니다. 유경씨나 길이 행복하세요.」

「행복이란 그리 쉽사리 얻어지는 것 같지 않아요.」

불행한 사람들만이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서글픈 대화를 남겨놓고 불행의 입구(入口)를 향하여 쓸쓸히 헤어진, 지나간 날의 그 이층 서재 ─ 그 서재에는 아직도 「쇼팡」과 「리스트」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 독일제 八十八[팔십팔]건이 주인 아가씨의 고달펐던 청춘의 행로(行路)를 위로나 하는 듯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진고개 입구에 있는 Y악기점에서 일단 가져갔던 이 피아노를 그후 곧 오 창윤 내외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유경을 생각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사다 놓았던 것이다.

깨끗이 정리된 서재 한가운데 새하얀 상보를 씌운 소탁자 위에는 물빛이 아롱진 유리 대접에 과일이 소담스럽게 담기어 있었다. 그 옆에 과자 접시와 찻종지도 단정히 놓여 있었다.

연분홍 유톤 치마에 흰 반회장 저고리를 입은 유경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떨기 향기로운 석란(石蘭)과도 같이 피아노 앞에 청초하다.

「뽕, 뽕, 뽕……」

유경은 금동이의 조갑지같은 손가락으로 백아(白牙)의 건반을 하나씩 하나씩 눌러 본다.

「뽕, 뽕, 뽕……」

금동은 유경의 무릎 위에서 우물쭈물 춤이나 추듯이 우쭐거린다. 뽕뽕 소리가 날 때마다 금동이는 벙긋벙긋 웃는 것이다.

「아이, 귀여!」

유경은 연방 벙긋거리는 금동이의 볼에다 키쓰의 소낙이를 퍼붓는다.

「금동아, 아빠 보구 싶잖어?」

뽕, 뽕, 뽕……

「보구 싶지?……」

유경은 손을 뻗쳐 피아노 위에 세워 놓았던 영민의 사진틀을 내리었다. 그러나 화면에는 영민 혼자만이 아니었다. 유경이도 있었다.

지나간 날, 해조음(海潮音)이 옭 ─ 옭 ─ 들려 오는 아다미 여사에서 유경이가 영민의 눈을 가리우고

「내가 누구 ─ 게?」

「글쎄 거 누굴까?……탄실이?」

「아아냐.」

「오몽네?」

「아아냐.」

「깐돌네?」

「나는 그런 시굴뚜기가 아아냐.」

그러한 애정의 유희를 하며 성현(聖賢)의 숭고함과 대철(大哲)의 위대함을 대담하게 무시하고 오로지 방안의 어둠과 창 밖의 달빛과 무한한 우주와 작열된 육체의 속삭임만을 인식한 그 행복했던 밤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의 바위 부부암에 올라 젊음을 만직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바로 이것이다. 화면의 배경을 이룬바위 위에는 Love(사랑) × 100 = Marriage(결혼)이라고 조개껍질로 씌여진 흰 글자가 어렴풋이 아로새겨져 있다.

뽕, 뽕, 뽕……

입 언저리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유경은

「금동아, 요건 아빠구……」

유경은 금동이의 손가락으로 영민의 얼굴을 꼭 눌렀다.

「요건 엄마구……」

벙글벙글 웃는 얼굴, 사진틀을 긁어 댕길려는 것처럼 너울거리는 금동이의 손길이다.

「금동아, 엄마 맘 고생을 무척 했단다. 공연히, 쓸데없는 맘 고생을……

그리구 엄마는 지금두 아빠에게 맘 고생을 무척 시키고 있단다. 공연히, 쓸데없는 맘 고생을…… 모두 이 엄마가 나빠서 그랬지. 어리석은 엄마이기 때문에…… 철없는 엄마이기 때문에 그 분은 나를 무척 원망하면서 가셨단다. 먼 데루……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싸움터로 떠나 가셨단다……」

그러다가 유경은 돌연 격정에 휩쓸리어 금동이의 몸뚱이를 와락 부여 안았다.

「못볼지도 모른다! 아빠를 못 볼지도 모른다! 그이를, 그이를 영영 만나 보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순간, 금동이를 붙안은 유경의 두 팔꿈치가

「콰아앙 ─」

하고 건반 위에 넋없이 내려 앉았다.

운다. 유경은 우는 것이다.

2[편집]

그즈음 아래층 응접실에는 오 창윤 내외와 준혁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유경이랑 다 함께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나서 오 창윤은 특히 준혁 혼자만을 응접실로 불렀던 것이다.

「오늘 군을 부른 것은 별로 특별한 이야기가 있어서가 아니고 오래간만에 식사나 나눌까 하고……」

한 잔 반주에 기분이 화락해진 오 창윤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준혁은 언제나 겸손하고 조용하다.

「자아, 한 대 피구……」

오 창윤은 해태를 꺼내 자기도 한 꼬치 입에 물며 권했다.

「아니, 전…전 후에 피겠읍니다.」

그러면서 준혁은 얼른 성냥을 그어 오 창윤의 담배에 불을 붙여 드렸다.

오 창윤씨 앞에서 술을 한 두 잔 받았으나 아직까지 준혁은 담배를 피울 줄을 몰랐다.

「괜찮어. 내가 권하는 것이니까.」

「고맙습니다. 후에 피겠읍니다.」

준혁은 한 꼬치를 받아 들기는 했지만 들고만 있었지, 피우지는 않았다.

「군이 그처럼 겸손하면 할 수록 나는 꼭 바늘 방석에 앉은것만 같으네.」

「선생님, 무슨 말씀을……」

준혁은 정색을 하였다.

「군의 선친에게 한 약속을 나는 실행을 못한 사람이야. 용서를 비네.」

「선생님!」

준혁은 후딱 시선을 무릎 위에 떨어뜨리며

「선생님은 어찌하여 너무나, 너무나 황송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야. 내가 그만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

「선생님, 듣기에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그저 다 제 분복이구, 제 팔자지. 인력으론 어쩔 수가 없는것 같애.」

옆에 앉았던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그런 자리를 구해 봤지만 모두 넘구 쳐져서……」

부인은 준혁의 안색을 살피며

「이거 보라구. 아주 마참한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러면서 부인은 여자 사진을 한 장 준혁이 앞에 내 놓았다. 어여쁜 용모를 가진 여자였다. 유경이나 운옥 보다 결코 못지 않은 용모였다.

「대륙무역 사장의 따님인데 용모도 단정하고 이화전문 가삿과라던지 하는 데를 나왔는데 사람된 품이 건실하고, 선생님두 무척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그때 오 창윤이 말을 받아

「그만한 자리가 결코 쉽지 않은 자린데……유경이와는 여학교 때 동무구…… 그러나 문제는 본인에게 달렸으니까 잘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상싶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사모님!」

준혁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서

「선생님과 사모님의 호의는 한없이 고맙습니다. 그러나 모든 점에 있어서 저는 아직 결혼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생활의 기반을 닦고 좀더 공부도 하고……」

준혁은 완곡히 거절을 하였다.

「아이, 공부는 게서 더 해선 무얼하게…… 그처럼 얌전한 규수가 또 있을라구……」

그러는 부인을 오 창윤은 막으며

「강권할 것은 못 되는 문제요. 배필이란 원체 뜻이 있어야 되는 것이니까…… 하여튼 군도 그쯤 생각해 두고……에헴 ─」

하고 그때 오 창윤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

「실은 며칠 전, 저 백군의 춘부장한테서 소식이 왔는데 아주 병환이 중하다고…… 일이 이렇듯 되어 놓고 보니 사돈되는 분의 병문안도 할겸 부모네끼리 한번 만나서 통혼 허혼의 술 한 잔이나마 있어야 하겠기에 내가 한번 그 탑골동이란 데를 가 볼까 하구……」

오 창윤은 한지로 만든 봉서에서 두루마리를 끄집어 냈다. 거기에는 모필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순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이제 그것을 한글로 간략하게 소개해 보면 ─

3[편집]

(전략)……그런즉 딸 자식 가진 이와 아들 자식 가진 이는 서로가 남남이면서도 남남이 아니오며 먼 듯 하면서도 또한 가까운 듯도 합니다. 듣자 하니 불초 돈아 (豚兒)가 가헌(家憲)을 저바리고 귀댁의 무남독녀, 금 주구도 사지 못할 귀한 따님을 희롱한 죄 적다 못하거늘 드디어 이에 신명의 벌을 받아 희롱의 열매까지를 맺었다 하니 따님의 옥같은 몸을 훼상한 죄 또한 비길데 없을까 합니다. 하물며 따님의 불행한 신세를 돌보지 않고 가련한 유아(幼兒)조차 거둡지 않은채 만 리 이역 천리 타향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니 그 죄 천대에 살것이며 그 벌 만대에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쇠운이 찾아와 기울어져 가는 가운이로되 일찌기 사람을 해치고 가문을 망치게 한 조상을 모시지 못한 문벌이어늘 오늘날 불초 돈아가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송곳방석 이외의 자리를 감히 차지하지 못할 것이오며 하늘을 우러러 감히 천일(天日)을 볼 수 없는 신세입니다.…… (중략) ……그러한 죄인을 자식으로 가진 이 몸으로서 하로바삐 귀댁에 나아가 백배사례, 벌을 기다림이 온당하오나 돈아가 출정한 이후 심신이 극도로 쇠약하여 와병(臥病)에 인사를 절(絶)했으니 보람없는 아비 역시 죄인인가 합니다. 더우기 돈아의 죄를 관용하여 돈독한 돌봄과 다액의 금자까지 대여하신 혜덕태산같고 대양같이 송구무쌍한 바입니다. 이 아비도 원하고 제 어미도 원하는 바 한가지 지극한 소원은 비록 정당치 못한 혈통관계오나 이미 전생의 인연 있어 맺어진 연분이오니 일 차 상봉(相逢)의 기회를 얻어 전후지책을 강구함이 어버이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하오며 간절히 원하는 마음, 또 한가지로는 하루 바삐 따님의 행방을 더듬어 주시어 六十[육십] 평생 소원이던 손자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죽고 싶사오니 이 또한 필부(匹夫)의 속된 욕망인가 합니다. 돈아의 운명은 이미 천심(天心)에 맡겼으니 인간이 알 배 아니로되 하늘이 무심하여 다시 내 눈 앞에 살아 돌아 오지 못하는 경우에 있어서 백씨 가문의 대를 이을 오직 하나의 인물이 귀댁의 따님의 소생이오니 필부 속부(俗婦)의 소원을 가소(可笑)타 마시고 널리 하찰하시기 바라오며……(후략) ─

「훌륭하신 분 같습니다.」

준혁은 두루마리에서 눈을 들었다.

「사리가 지당하고 논지가 밝은 분이야.」

오 창윤은 담배를 몇 모금 맛나게 마신 후에

「그래서 이왕 가는 길이니 금동이를 데리구 갈까하구……」

그때 부인이 나서며

「아 글쎄 준혁이두 좀 생각해 보라구. 영감두 분수가 있지 혼례식두 안 올린 유경이가 애를 업구 가 보시우. 동리 사람들이 손가락질은 안 하겠수.

신식엔 체면두 없으랬나?」

누구가 글쎄 체면이 「 없다는 거요? 허지만 사세가 이만저만 하구 보니 하는 말이 아니요? 거 노인의 말씀처럼 六十[육십] 평생 간절한 소원을 눈 감기 전에 한 번 풀어 드리는 것도 좋은 일이요.」

「그래두 난 유경인 못 보내겠수. 금동이만 데리구 가시우.」

「아따 이 양반 봐? 내 가슴에서 젖이 난다는 말이요?」

「그래두 난 싫수. 무남독녀의 딸을 두었다가 그런꼴 남한테 보이기 싫수.

「글쎄 괜찮다니까! 무남독녀 외딸은 별수 있나? 부모 말 안 듣다간 그런 꼴 좀 봐야 하는 거야.」

「그래두 난 싫수. 그렇게두 보구 싶거든 와서 보시래구려.」

「아따, 이 양반아! 와병에 인사절(臥病人事絶)이라구 안 그랬어? 이러니까 무식한게 탈이란 말이야.」

「아이구, 유식들 해서 그 꼴들이유? 두 번만 유식했단 딸 팔아 먹겠구려.」

「그래 본인의 의사는 어떻습니까?」

준혁이가 보다 못해 말을 가로 막았다.

「아, 글쎄 고 맹랑한 것이 같이 간다니까, 말이지!」

「아, 그렇다면 구태어……」

「맹랑한게 아니요. 유경의 생각은 당신보다 깊으오. 체면이구 형식이구가 현재의 유경이에겐 문제가 아니라니까.」

「난 모르겠소! 딸 하나 있는 걸 잡아 먹던 삻아 먹던 맘대로 하시구려!」

부인은 뽀르릉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 허, 허……」

오 창윤은 유쾌히 웃고 나서

「유경이가 무척 군을 기다리고 있을테니 올라 가서 놀다 가게. 잠깐이나마 백씨 댁에 발을 들여 놓게 된 오늘 날, 모르긴 모르지만 유경이로서는 군에게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과히 좁게 생각하지 말고 너그러이 대해 주게. 그리고 아까 그 혼담은 부랴부랴 하자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잘 생각해 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