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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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 병원[편집]

1[편집]

닷새째 잡히는 날 오후, 운옥은 도보로 탁성 야전병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면회시간은 오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날은 조그만 여인숙에 묵고 이튿날 열 시 경에 야전병원으로 갔다.

영문을 들어선 위병소에서

「면회를 왔는 데요.」」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면회는 누굽니까?」

위병소에는 四[사],五[오]명 하졸들이 잡담을 하고 있다가 일제히 얼굴을 돌려 이 어여뿐 용모를 가진 조선여성을 얼빠진 사람들 처럼 바라 보았다.

「회양 전투에서 부상을 받고 여기에 입원한 학도병인데요.」

후방에 있는 육군 병원과는 달라서 이 야전병원에는 환자를 면회하러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위병소 안에 모여 있던 병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다 호기심에 찬 얼굴을 짓고 있었다. 더구나 이처럼 어여쁘고 깨끗한 용모의 소유자인 경우에 병사들은 필요 이상의 친절을 감히 사양하지 않는 법이다.

「어디서 오셨읍니까?」

쓸데없는 말을 묻는 실없은 병사도 있었다.

「서울서 왔읍니다.」

「헤에?…… 서울서?……」

일동은 눈이 둥그래 졌다.

「회양 부대 소속입니까?」

「네, 제 四[사]중대 소속입니다. 약 열흘 전에 이리로 온 사람인데요.」

「계급은?」

「계급은 잘 모르겠읍니다.」

「조선 학도병입니까?」

「그렇습니다.」

「성명은?」

「백 영민이란 사람입니다.」

「글쎄, 그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읍니다. 다만, 하여튼 이 면회 전표에 기입을 해 주시요.」

그러면서 위병 하나가 전표 한 장을 내 놓았을 때

「누구라고요? 백 무엇이라고요?……」

하며, 사람들의 사이를 뚫고 한 사람의 병사가 앞으로 선뜻 나섰다.

「백 영민이란 사람입니다.」

운옥은 또 한번 되풀이 하였다.

「아, 백 영민―회양 전투에서 눈을 다친 사람 말입니까?」

「네, 네, 바루 그 사람입니다.」

운옥은 반가와서 그 병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루요. 보꾸가ㆍ데가미오ㆍ다이츠ㆍ시딴다(있어. 내가 편지를 대필했어)―」

그 병사는 동료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이번에는 극히 호기심에 찬 얼굴로 운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안따ㆍ소노ㆍ히도노ㆍ옥상ㆍ데쇼?(당신은 그이의 부인이지요?)」

하였다.

「에?……아, 아, 네……」

이 너무나 돌연한 질문에 운옥은 명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그이를 아십니까?」

운옥은 물었다.

「네, 압니다. 그리고 부인의 이름이 오 유경씨라는 것도 잘 압니다.」

「에?―」

운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먼 데서 수고로히 오셨읍니다. 실은 내가 백군의 편지를 대신 써 주었읍니다. 나는 위생병 입니다. 그러나 부인이 이처럼 찾아 올 줄 알았으면 어저께 낸 편지는 공연히 썼읍니다.」

그 위생병의 가슴에는 요시다라는 명표가 붙어 있었다.

백군이 어떻게나 부인을 「 만나 보고 싶어 하는지, 옆에서 보기에두 딱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요시다 위생병은 제 손으로 전표에다 면회인과 피면회인의 성명을

「―오 유경.」

「―백 영민.」

이라고 각각 기입을 한 후에 위병소의 검인을 맡아 가지고

「그러면 부인,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요. 곧 다녀 오겠읍니다.」

한 마디를 남겨 놓고 병실을 향하여 뛰어 들어 갔다.

운옥은 정신없이 그 지나치게 친절한 위생병의 뒷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펄떡 들어

「아, 여보세요, 잠깐만―」

하고 외쳤을 때는 이미 위생병의 자태는 병동(病棟)안으로 사라져 버린 때였다.

2[편집]

일선으로부터 부상병이 날마다 몰려 들었다. 초만원을 이룬 이 병원에는 경상자 만을 남겨 놓고 시일 이 오래 걸릴것 같은 중상자의 응급 수술을 베픈 후에 곧 후방으로 보냈다. 영민도 二[이],三[삼]일 후에는 후방으로 이송될 몸이었다.

넓은 병동에는 어디든지 부상병이 가뜩가뜩 차 있었다. 三[삼]층 병동 옆에 달린 조그만 광까지 병실로 썼다. 영민이가 들어 있는 데는 이 광이었다. 五[오],六[육]명의 부상병이 누워 있었다.

서쪽 들창 가 침대에 영민은 고요히 누워 있었다. 붕대로 두 눈과 귀를 싸매고 있었기 때문에 자는지 깨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수염이 시꺼멓게 자라 있었다.

요시다 위생병이 뛰어 들어 오며 영민을 흔들었다.

「네?」

엄청나게 큰 목소리다.

「멩카이ㆍ데쓰!(면회입니다!)」

요시다 위생병은 영민의 귀에다 입을 대고 역시 엄청나게 큰소리로 고함을 첬다.

「응?…… 뭐라구요?」

영민은 누운채 약간 머리를 들며 손으로 허공을 더듬어 요시다 위생병의 손을 어루만져 보았다.

「면회입니다.」

「뭐요? 면회라고요?……」

그것은 대화하기 보다도 마치 성난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는것 같았다.

「기뻐하시요. 오 유경씨가 찾아 왔읍니다.」

위생병은 또 귀에 입을 대고 고함을 쳤다.

「누, 누구라구요?」

영민은 맹인들의 독특한 습성을 본받아 턱과 귀를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위생병은 대화를 단념하고 영민의 손바닥을 펼져 잡았다. 대화가 길고 까다로와지면 위생병들은 귀먹어리의 손바닥에다 글을 써 보이는 것이다.

「……당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 유경씨가 찾아 왔읍니다―」

손바닥에 씌여진 글은 그러하였다.

「………」

영민은 글이 씌여진 외인편 손바닥을 자기의 오른 손으로 부리나케 만져 보며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써 주십시요.」

하고 고함을 쳤다. 말의 내용은 부탁이었으나 음성은 마치 욕지거리다.

「……서울서 오 유경씨가 당신을 찾아 왔읍니다.」

그 순간, 영민의 전신이 부르르 하고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영민의 손목을 잡은 요시다 위생병의 손 끝이 그것을 명확하게 감득하였다.

「아아―」

뭐라고 형언키 어려운 커다란 감동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영민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당신은……당신은 나를 농락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편지를 대필한 이 위생병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을 법 하였다.

「하여튼 기다려요.」

요시다 위생병은 그렇게 외치며 병실을 뛰어 나갔다. 일동의 시선이 모다 영민에게 쏠려 있었다. 서울서 여기까지 면회를 하러 왔다는 그 한 마디가 부상병들의 향수(鄕愁)의 마음을 감동적으로 자극을 하였다.

요시다 위생병이 다시 위병소로 뛰어 나가서 이러한 감격적인 광경을 세세히 이야기 했을 때 운옥은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가만히 감고 있는 그 두 눈시울에서 눈물이 스스로 흘러 내렸다.

「잘 했다!」

그렇다. 영민의 그 절실한 기원과 행복을 어찌 운옥이 자신의 손으로 파괴할 수가 있으랴. 결과로 보아서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은 것이 영민을 위해서 잘 한것 같았다.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는 불구의 몸인 가엾은 영민의 신세를 생각할 때, 조만간 탄로는 날 것이지만 그러나 일시적이나마 환자의 행복과 기쁨을 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사소한 욕망과 조그만 자존심을 주저치 않고 포기할 수 있는 운옥이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친절한 이 젊은 위생병에게 가벼운 항의를 하려던 운옥의 마음이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어서 들어 가서 환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시요.」

위생병은 손을 이끌듯이 하며 앞장을 섰다. 이 단순한 위생병은 운옥의 눈물을 기쁨에서 용솟음 치는 눈물인 줄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운옥은 얼른 눈물을 거두고 위생병의 뒤를 따랐다.

「그렇다. 그이를 기쁘게 하여 주자! 그이가 기쁘면 나도 기쁠 것이 아닌가!」

운옥은 三[삼]층 병실까지 올라 가는 도중에 오로지 그 한 마디 만을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였다.

3[편집]

코에서 아래 턱까지―그것이 붕대 밖에 나온 영민의 얼굴 모습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부수수 하니 자란 수염, 그 누구의 발자취 소리라도 들어 볼 요량으로 턱과 귀를 약간 문 쪽으로 내밀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운옥은 한 눈에 그것이 영민임을 직각하였다. 운옥은 위생병을 따라 마침내 영민의 침대 앞에서 오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아, 이것이 정말 꿈이뇨, 생시이뇨?― 五[오]년 전, 기러기 소리 구슬프게 태극령 고개를 누비던 밤

「……사랑하는 누나, 고마운 누나― 나를 고매굴고 나를 무척 귀여워 해 준 고마운 누나로 믿고 진심으로 나는 감사하게 생각했었소. 철 없을 적엔 그렇게 믿고 운옥을 따랐고 철이 났을 적엔 그렇게 믿고 운옥을 멀리 한 것이요……운옥의 외로운 신세를 생각하면 가슴이 쪼개질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소. 그래서 나는 운옥을 위하여 여러번 울었소. 운옥의 행복을 위하여 나의 온갖 희망과 이성을 희생하고라도 운옥이와 결혼할 생각도 하여 보았소만 그러나 그렇게 …… 되면 두 사람이 다 같이 불행하게 될것만 같아서 ……」

「잘 알겠읍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만 있으면 구하시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제 힘으로 넉넉히 될 수 있는 일이오니……」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리워 영민의 얼굴이 보이지 않던 옛 기억이 운옥의 가슴에 뭉클하고 새로워 진다. 그리고는 오늘 처음으로 이처럼 눈 앞에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영민이었다.

「귀에다 가까이 입을 대고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까다로운 이야기는 손바닥에 글을 쓰시요.」

위생병은 운옥에게 그런 말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운옥은 자꾸만 눈물이 앞장을 서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을 보살인 양 운옥은 말없이 서 있을 따름이다. 오주주 하니 달려드는 격정의 물결이 운옥의 심신을 사정없이 쳤다.

「오 유경씨가 왔읍니다. 오 유경씨가……」

위생병은 그렇게 외치면서 영민의 몸둥이를 흔들었다.

그 순간, 영민은 마치 감전이나 한 사람 모양으로 후딱 베개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것이……그것이 정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하여도 꼭 속는것만 같습니다.」

그러면서 영민은 두 손을 뻗어 허공중에서 유경의 존재를 열심히 더듬기 시작하였다.

「유경씨가 정말 지금 내 앞에 있읍니까?……있으면 대답을 하여 주시요!

내 손을 잡아 주시요!」

그러나 자기는 유경이가 아니다. 운옥은 대답을 못하고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침대 끝에다 의지를 하였다. 격렬한 현기증이 운옥을 무섭게 습격했기 때문이다.

「아, 옥상, 식카리ㆍ시데ㆍ구다사이!(아, 부인, 정신을 차려 주시오)―」

위생병은 쓰러지려는 운옥의 몸을 조심스럽게 부여 잡았다.

「괜찮습니다. 미안하지만 냉수 한 그릇만……」

「네, 잠깐만 기다리시요!」

위생병이 문을 향하여 뛰어 나가고 있을 즈음에 운옥은 마침내 자기 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영민의 가슴 위에 비틀비틀 쓰러졌다. 운옥은 그 혹심한 타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 정말유 경이가 왔소?」

영민은 와락 운옥의 몸뚱이를 부여잡으며 고함을 쳤다.

그 너무나 극적인 장면에 방안에 누워있던 부상병들이 눈을 둥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