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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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의 분열[편집]

1[편집]

그지음 앞탑골 백 초시의 집에서는 운옥이가 남겨놓은 짤막한 편지 한 장을 둘러싸고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옥이가 갔다!」

누구 보다도 제일 놀란 것은 영민이었다.

「운옥이가 가서는 아니 된다! 운옥을 찾아야 한다!」

영민은 운옥의 편지를 구겨 쥔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러나 나무 다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영민의 자유롭지 못한 몸은 기가차서 토방을 내려 서다가 그만 비틀비틀 쓰러지고 말았다.

「얘야, 영민아!」

어머니는 아들을 안아 일으키며

「어딜 간줄 알구 찾아 나간단 말이냐?……더구나 너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냐?」

「어머니, 빨리 운옥을 좀 찾아다 주세요! 운옥을, 운옥을 잃어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여보, 당신이 좀 나가 찾아 보우.」

침통한 얼굴을 백 초시는 지었다.

얘야 서울 「 , 애기야. 애 아범을 데리구 안방으로 들어 가 있거라.」

어머니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우고 토방 마루에 서서 울고 있는 유경에게 그 한 마디를 남겨두고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동천이 훤하니 밝아 오는 이른 새벽이다.

「몸조심 하셔야지……」

「아, 유경이!」

유경은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거두고 영민의 몸을 부축하면서

「저, 저 방으루……」

이런 경우에는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유경의 짧은 인생과 빈약한 어휘로서는 좀처럼 적당한 한 마디를 골라 낼 수가 없었다.

「아, 유경이!」

영민은 정에 격하여 유경의 두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유경이, 고맙소! 유경이가 이처럼 내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소.」

「어서 안으로 들어 가셔요.」

유경은 영민을 부축하여 안방으로 들어 갔다.

「으, 음―」

백 초시는 깊은 신음과 함께 훤하니 밝아 오는 동편 하늘을 바라보며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경이.」

안방으로 들어간 영민은 방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유경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유경은 오늘의 백 영민을 끝없이 오해할 것이요.」

「………」

유경은 대답이 없다.

「유경이!」

영민은 한번 더 유경의 이름을 정답게 불렀다.

「………」

유경은 오두머니 앉아서 자꾸만 운다. 옛날 같았으면 울고만 앉았을 유경이가 결코 아니언만 그만큼 유경의 인생이 넓이를 갖게 되었다.

「유경이, 용서하시요! 유경을, 작으나마 나의 전 인격을 바쳐서 사랑해 온 유경을 이처럼 울리게 한 오늘의 나를 용서하시오.」

영민은 엄숙한 표정으로 머리를 한번 숙이고 나서 그러나 유경을 이처럼 「 슬프게 한 것이 결코 나의 본의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명확히 말해 두겠소. 오늘날 이러한 혼란을 일으키게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행방이 묘연하던 운옥이가 나의 눈앞에 나타나면서 부터였소.」

거기서 영민은 과거 한 달 동안에 있어서 운옥이와 함께 지내온 이야기를 쭉 설명하였다.

2[편집]

「유경에게 나는 나의 현재의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 하겠소.」

「영민씨, 잠깐만……」

그때까지 잠자코 앉았던 유경이가 비로소 눈물 젖은 얼굴을 후딱 들면서 영민의 말을 가볍게 막았다.

「저어, 영민씨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제 생각부터 말해 보겠어요. 영민 씨의 심경을 끝까지 들은후에 제 생각을 이야기 해도 무방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의 영민씨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민씨가 자율적(自律的)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그 괴로운 마음을 한층 더 괴롭히게 될 것 같아요. 그뿐만 아니라 영민씨의 심경 여하에 따라서 제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를 것 같애서 제가 먼저 말하겠어요.」

유경의 인생이 약간 너그러워진 것 같이 보이긴 하였으나 그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유경이, 무슨 말이든지 해요.」

영민은 유경의 얼굴을 일종 헤아릴 수 없는 의구(疑懼)의 념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하룻밤 동안 나는 자지 않고 생각해 보았어요. 영민씨를…… 그처럼 그립고 그처럼 보고 싶던 영민씨를 만나는 이 순간에 있어서 아무런 잡음이 없는 좀 더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애정으로 영민씨를 대하지 못하는 것만이 유경이에게는 한이예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한 사람의 욕망일 따름이지, 나 이외의 그 누구를 원망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예요.」

유경이의 논조가 아주 맑다. 하루 밤 사이에 그 혹독한 고민으로부터 다시금 자기 자신을 수습할 수 있는 유경이가 된 것이다.

「잘 알겠소.」

영민도 떠들지 않고 유경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지나간 일 년 동안의 「 一[ ] 그 첩첩히 쌓인 수많은 이야기! 나는 영민씨를 만나기만 하면 一[일]년이고 二[이]년이고 아니, 일생을 두고 그 태산같은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끄집에 내어 밤 가는 줄 모르게 서로 즐기고 서로 비판하고……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사정이 이렇듯 되고 보니 그럴 수도 없고……」

「용서하시요. 그러나 나 역시 그것을 한없이 꿈꾸고 있었지요.」

「영민씨, 고맙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마당에 있어서는 애틋한 이야기로서만 시간을 보낼수는 없게 되었어요.」

「잘 알겠소. 나도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소.」

「이 자리에 있어서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한 가지를 솔직히 말하겠어요.」

「유경이, 조금도 사양 말고 말해 주시요.」

「제가 지금 정확하게 알고 있는것―그것은 제가 영민씨를 얼마나 깊이 사모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영민씨가 저를 어떻게 열심히 사랑하여 주었던가!

―하는 그것 뿐이예요.」

「그렇소. 그것만 유경이가 알아 준다면 나는 지극히 행복하지요!」

「영민씨!」

하고 그때 유경은 전신의 힘을 주어 영민의 이름을 불렀다.

「할 이야기는 태산같지만 모두 그만 두겠어요. 그리구 어제 하룻밤 사이에 얻은 제 생각의 결론만을 한 마디로 간단히 말해 두겠어요.」

「유경이, 무슨 말이든지……」

「이모저모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날이 밝는 대로 서울로 올라 가겠어요. 그리고 좀 더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잘 생각해 보겠어요.」

영민은 불현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3[편집]

「정확하게 말하면 오 유경이가 사랑한 것은 탑골동 백 초시 어른의 아드님이 아니었어요.」

「………」

「오 유경이가 사모한 것은 오직 백 영민이라는 한 사람의 사나이었어요.」

「………」

「그리고 백 영민을 사모한 오 유경의 마음에는 바늘 끝만 한 틈사리라도 있을 수 없었어요 오 유경에게 . 있었어 백 영민은 인생의 전부였어요. 일시적 오해로 말미암아 약간의 혼란을 이르키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정의 의혹이었고 애정의 분열(分裂)은 아니었어요. 오 유경의 이러한 절대적인 애정의 성립은 어디까지나 백 영민의 또한 그러한 절대적인 애정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어요. 그러한 조건이 없었다면, 또는 그러한 조건이 믿기워 지지 않았었다면 오 유경의 애정은 처음부터 성립을 보지 못했을 꺼야요. 이 점이 허 운옥이라는 한 여인의 애정과는 전연 성질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差異點)이야요.」

유경은 이야기를 그쳤다.

그러나 영민은 대답이 없다. 유경은 다시 말을 이어

「백 초시 어른의 아드님에게는 허 운옥이라는 한 사람의 여인이 있어야 할지는 몰라도 오 유경이가 상대로 한 백 영민이라는 사나이에게는 그러한 존재가 있을 수 없어요. 허 운옥을 택하느냐, 오 유경을 택하느냐 하는 그러한 형식적인 선택 문제가 아니야요. 백 영민이라는 한 사람의 남성이 지닌 애정의 분열을 문제 삼는 거야요. 그러한 선택의 대상이 되는것 부터가 벌써 오 유경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니까요.」

「유경이!」

영민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유경이의 이야기는 잘 알아 듣겠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해 둘 것은 유경이에 대한 나의 애정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다는 것이요. 그것은 기성 사실이지요. 그러나 현재의 나의 심경으로서는 허 운옥이라는 한 여인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소. 그것이 나의 본의가 아니요. 본의는 아니지만 운옥의 존재를 전연 무시하고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을 나는 갖지 못할 것 같아요. 만일 유경이가 나를 버릴 때, 나는 실연의 고민으로 말미암아 죽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해서 운옥이라는 여인을 전연 잊어 버리고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나의 솔직한 심경이요.」

「영민씨의 그 괴로운 마음 잘 알 것 같아요. 저 역시 영민씨 옆을 떠나서 과연 평온한 삶을 누릴런지 어떨른지는 문제야요. 그러나 현재의 나로서는 한시 바삐 영민씨의 옆을 떠날 수 밖에 없어요.」

「알겠소. 그러나 한 가지 더 이야기해 둘 것은, 유경은 애정의 분열이라고 하였지만, 그리고 그것이 애정의 분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애정의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 쉽사리 분석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요는 시간의 해결을 바랄 뿐이야요.」

금동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며

「아가씨, 금동이 젖 주세요.」

옥순이가 금동일 안고 들어 왔다.

유경은 얼른 금동을 받아 안으며

「오냐, 오냐, 울지 마. 젖 줄께 울지 마.」

유경은 비스듬히 돌아 앉으며 금동이에게 젖을 물렸다.

「………」

영민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돌아 앉은 유경이의 자태를 무섭게 바라보고 있을 즈음에 찌쿵하고 대문 소리가 들리며 어머니의 기겁을 한 목소리가 튀어 나와

「얘야, 큰 일 났구나! 운옥이가…… 운옥이가…」

「아니, 운옥이가 어떻게 됐단 말이요?」

사랑방 문이 벅차게 열리며 백 초시가 뛰쳐 나왔다.

「운옥이가…… 운옥이가 사람을……사람을 죽였대요!」

「옛?」

영민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방문을 탁 열어 제켰다.

「아이구머니, 이 일을……이 일을……준길이를 죽였구나! 준길이를……

운옥이가…… 아이구머니, 이 일을……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어머니는 와들와들 몸을 떨면서 미친사람처럼 뜰안을 삥삥 돌고 있었다.

애정의 위치날이 밝았다. 백 초시 일가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고난(苦難)의 하룻밤은 밝았다.

五[오]년 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백 초시의 민며느리 허운옥이가 돌연 탑골동에 바람처럼 나타나서 준길이를 죽이고 어디론가 다시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무서운 소문이 뒷탑골에서 앞탑골로 쫘악 퍼져 넘어왔다. 마을 전체가 들썩들썩하리만큼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약 十[십]리 밖에 떨어져 있는 제재소로부터 소장이 두 사람의 하인 순사를 대동하고 백 초시의 집을 찾은 것은 거의 중낮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그때 백 초시는 사랑방에서 홋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누워 있었다.

「허 운옥이 어디 있어?…… 허 운옥을 내 놔!」

순사 하인이 사랑방으로 선뜻 들어 서면서 하는 한마디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짐작못했던 백 초시는 아니었다. 백 초시는 조용히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좀 들어 와 앉으시오.」

그러나 그러한 백 초시의 인사에는 눈도 거들떠 보지 않고

「허 운옥을 숨겨 두었지? 어디 숨겼어?……」

순사는 구두를 신은채 방안에 우뚝 서서 조용히 일어나 앉은 백 초시를 머리 위에서 무섭게 노려 보았다.

「운옥을 숨겨 둔 일은 없소.」

「무엇이?」

순사는 버티고 선채 꿱하고 소리를 치면서

「박 준길을 죽이고 이리로 뛰어 와서 숨어 있지 않나?」

「운옥이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도 나는 모르고 운옥이가 숨었다는 것도 나는 전혀 모르오.」

그때 소장과 함께 문 밖에 서 있던 안경을 쓴 순사가

「바른대로 말을 하시오. 바른대로 말을 하는 것이 결국에 있어서 당신에게 이익이 될테니까요.」

하고 약간 정중한 말을 썼다.

「바른대로 말을 하였소.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당신네 손으로 운옥을 찾아 내 가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을 것이요.」

「이마ㆍ난또ㆍ있다?(인제 뭐라고 했소?) ─」

말 소리가 낯익어 백 초시는 후딱 머리를 들었다. 지나간 겨울 영민을 싸움터로 끌어 내간 까다 소장, 지원을 안 시킨다고 주재소로 불러다가 백 초시를 못 살게 굴던 바로 그 소장이 아닌가.

「빠가야로오!」

백 초시가 단 한 마디 밖에 모르는 이 외마디 소리가 이번에는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는 못하고 뱃속에서만 꾸르락 꾸르락 소리를 냈다.

이윽고 소장과 안경잡이는 서로 눈짓을 하고 대문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서면서 가택 수색을 시작하였다.

구두발 소리에 안방에서 영민이가 탁 문을 열었다.

「아, 안따와?(아, 당신은?) ─」

소장은 눈이 둥그래지며, 순간 의혹에 찬 표정으로 방안을 휘이 둘러 보았다. 지나간 겨울 자기 손으로 출정을 시킨 백 영민이가 거기 앉아 있지 않는가.

「누구십니까?」

영민은 일어로 그렇게 묻고 소경 독특한 표정을 지으며 불쑥 턱을 내 밀었다.

「소장 나리요.」

안경잡이 한일 순사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아, 소장이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영민은 두 손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절룩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도오ㆍ시딴ㆍ데쓰?(어떻게 된 일이요?)」

소장은 황급히 물었다.

「곤도ㆍ중요오ㆍ센데 오데ㆍ후 쇼오워ㆍ시대ㆍ죠다이ㆍ사레 따노ㆍ데쓰(이번 회양 전투에서 부상을 받고 제대가 되었습니다.) ─」

「아, 소오까!(아! 그런가!) ─」

2[편집]

영민이가 부상을 당하여 신경 육군병원에서 제대가 된 이야기를 듣고 났을 때 소장은 가벼운 동정의 표정을 지으며

「상이 군인은 명예스러운 몸이요. 낙심을 하지 마시요.」

하고 인삿 말을 한 후에

「당신과 같이 돌아온 허 운옥이가 오늘 새벽 박 준길씨를 권총으로 살해한 사실을 알고 있오?」

「알고 있습니다.」

「언제 알았오?」

「오늘 아침 어머니가 동리 사람한테 듣고와서 알았습니다.」

「허 운옥이가 탁성 야전병원으로 당신을 찾아 갔을 때, 그가 권총을 가지고 있는 줄을 당신은 알았소?」

「몰랐읍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앞을 못 보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허 운옥이가 당신을 찾아 간 목적은 단지 애정관계 뿐이었오?」

「그렇습니다.」

「당신과 허 운옥은 어젯밤 여기에 도착하여서 박 준길씨가 서울서 내려와 있는 줄을 알았오?」

「몰랐습니다.」

실은 도라지탑 앞에서 지나가는 영팔이의 이야기로서 알고 있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집안 사람들에게 듣고 알았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희들이 뜻 밖에 돌아온 사실에 무척 흥분하시어서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할 사이가 없었습니다.」

허 운옥이가 「 오늘 새벽 집을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누구요?」

「아무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와 안방에서 같이 자다가 편지 한 장을 간단히 써 놓고 몰래 나가 버렸습니다.」

「편지를 봅시다.」

「이것입니다.」

영민은 주머니에서 운옥의 편지를 꺼내 소장에게 내 주었다.

「음 ─」

소장은 안경잡이 순사에게 편지를 주어 번역을 시킨다. 소장은 방안에 앉은 어머니와 금동이를 안은 유경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유경이라는 이가 저이요?」

「그렇습니다.」

「음, 삼각이로군!」

하고 나서

「그러면 허 운옥이가 어디로 떠나갔는지, 그건 전연 모른다는 말이요?」

「모릅니다.」

「권총은 당신이 빌려 준 것이 아니요?」

「무슨 말씀을…… 나는 아직 권총을 손에 쥐여 본적이 없습니다. 우리들 二 [이]등병이 만져 볼 수 있는 것은 소총 뿐이지요.」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재미 없소.」

「재미 없어도 하는 수 없는 일이요.」

「제대증(除隊證)을 보이시요.」

영민은 하라는 대로 안 주머니에서 제대증을 꺼내 보였다. 소장은 제대증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나서 도로 내주며

「박 준길씨와 허 운옥이가 과거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 당신은 알 것이요.」

「잘은 모르지만 지금으로부터 五[오]년 전, 야학에서 돌아오는 운옥을 태극령 고개에서 겁탈행위를 하려다가 운옥의 은장도로 말미아마 눈깔이 하나 못쓰게 된 사실 밖에 모르지요.」

「그후 허 운옥은 박 준길씨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겠지?」

「원한을 품고 있은 것은 준길이 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음 ─」

하고 신음을 하고나서

「허 운옥이가 권총을 소지하고 있는 사실을 당신은 끝끝내 모른다는 말이지?」

「모릅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알겠지?」

「아버지가 그것을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모른다면 당신의 아버지는 알 것이요. 당신의 아버지와 허 운옥은 그동안 비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소오다ㆍ오야 지워ㆍ다다께바ㆍ와 까루! (그렇다, 영감을 졸라대면 알 수 있어) ─」

그 말에 영민은 후다닥 놀래며 부르짖었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르십니다. 아버지는 신병으로 항상 누워 계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십니다! 아버지를……아버지를 다치지 말아 주시요!」

그러나 그 길로 백 초시는 급기야 주재소로 끌리어가는 몸이 되고야 말았다.

3[편집]

영민은 나무 다리를 짚고 필요 이상의 손 발을 더듬어 가며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뒤를 따라 十[십]리 길이나 되는 주재소로 갔다.

가 보니 생각하던 것 보다 공기는 그리 험악하지 않았다. 운옥이가 박 준길을 살해한 그 동기를 주재소에서도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준길이의 처 윤 영실의 증언이 과히 편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운옥이가 소지하고 있는 무기의 출처에 있었다. 창씨를 하지 않고 견뎌 배긴 백 초시의 완고한 민족사상과 야학에서 애국가를 부른 운옥과 그리고 오늘날 박 준길을 살해한 무기와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때, 주재소에서는 백 초시를 좀 힘껏 쥐여 짜 볼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모양이었다.

영민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쇠약해진 건강을 간곡히 이야기 하여 선처해 주기를 신신 당부하고 어머니와 함께 주재소를 나섰을 때, 영민은 정문 밖 행길 가 뻐스 정류장에서 금동이를 업은 옥순이를 데리고 트렁크를 든 유경이의 자태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유경은 어머니 앞으로 달려오며 어머니를 불렀다.

「아버지는……아버지는 무사하실까요?」

「글쎄 너 여기꺼정 뭣 하러 나왔니?」

그러다가 어머니는 심상치 않아 유경의 기색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좀더 오래 「 , 어머니를 모시었음 좋겠지만……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본 결과…… 이런 때 제가 가 버리는 건 정작 안 됐지만……어머니, 제가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집의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하루속히 아버지께서 무사하시도록 힘써 보겠어요. 그래서 오늘로라도 곧 올라 가 봐야겠어요.

아마 집의 아버지한테 잘 말씀 드리면 모르긴 몰라도 무사하게 되실 것 같아요.」

「그래두 얘 네가 가버리면 영민인 어떡허니? 올라 가더래두 며칠 더 묵어서 가야지 않겠니? 영민이가 널 얼마나 생각하구 있는지, 너두 잘 알텐데……」

어머니는 한참 동안 눈을 껌벅거리다가 마침내 치마 귀를 잡아 눈시울을 뻑 씻는다.

「아버지두 저 꼴이 되구, 너 꺼정 가 버리면 집안이 쓸쓸해서 어떻게 산단 말이냐?……금동아!」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옥순이 등에서 금동일 받아 안고 자꾸만 볼을 부빈다.

「금동아, 너꺼정 가 버리믄 어떻거니? 금동아!」

그러면서 어머니는 마치 애원하듯이

「네 맘을 내가 모르기야 하겠니만 그래두 어디 그럴 수야 있니?…… 그렇게 두 너를 좋아하던 영민인데…… 그 영민이가 돌아오자 네가 떠나버리믄…… 아무래두 일단 서울로 올라 가야 할 너지만 그래두 영민이의 몸이라두 좀 추세는걸 보구 가야 네 맘두 편할텐데……」

「어머니!」

유경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 쏟아져 나왔다.

「그런게, 그런게 아니야요, 어머니! 어머니는 잘 못 생각하시구…… 제가, 제가 어서 올라 가야만 이 사건이 무사하게……그래서 그러는 거야요, 어머니!」

「그래두 ─」

「어머니.」

하고 그때, 영민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끝끝내 나무람 하시는 어머니를 부드럽게 막았다.

4[편집]

어머니 유경씨를 나무래서는 「 , 아니 됩니다. 아버지의 일신을 구할려고 하루 바삐 서울로 올라 가보겠다는유경씨를 왜 자꾸만 나무래십니까? 어서 올라 가서 아버지를 구해 낼 좋은 방도를 취하여 달라는 게 좋지 않습니까?」

영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어머니에게 타일렀다.

「그래두 아버지는 아버지구, 너는 너지. 네가 그처럼두 좋아하던 유경인데 너는 왜 또 한사코 유경일 보내려구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두, 누구가 한사코 보내는 건가요?」

「그래두 네가 아버지한테 쫓겨 나가면서 꺼정 좋아하던 색시가 아니냐?

나는 정말루 네 마음을 모르겠다.」

「그럼 어머니, 식두 지나지 않은 남의 집 딸을 그냥 데려다 부리실 작정 이세요? 아이 어머니두 참!」

생각하면 실로 가슴 아픈 이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산을 전연 떠난 감정만으로서 가겠다는 유경을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영민이가 아닌가.

애절한 애정과 순수한 사랑만이 영민의 인생의 전부를 독차지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실로 심오한 깊이를 지닌 고민 속에서 인간 백 영민의 영혼을 구슬프게 울고 있는 것이다.

「유경씨!」

영민은 유경을 불렀다. 유경이, 하고 부르지를 못하고 유경씨라고 엄숙하게 불렀다.

「유경씨!」

「네? ─」

「유경씨는 나의 애정의 전부를 차지한 사람이었소. 그것이 오늘에 와서 약간의 분열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읍니다. 아마 유경씨가 생각하고 있는 정도의 분열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경씨는 장차에 있어서 현재 내가 지니고 있는 유경씨에 대한 애정을 경멸하면서 살아 나가지는 못할 것이요. 전부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의 인생관을 가진 유경씨로서는 현재에 있어서의 나의 애정에 불만을 느낄지 모르나 현재에 있어서의 나의 애정의 가치를 경멸하지는 못할 것이요.」

그리고 영민은 유경의 손을 다정하게 더듬어 잡으며

「유경씨!」

「…………」

「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영민씨의 인생관은 어디까지나 영민씨의 인생관이 지 제 인생관은 될 수가 없어요.」

잘 알겠소 나도 과거에는 「 . 유경씨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전부냐, 무냐의 생각을요.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것만으로 이 광범한 인생 전체를 가치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애요. 애정의 일부분을 점령할 수는 있지만 인생의 전부는 점령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애정 이외에도 인생의 가치를 저울질 할 또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애정의 위치(位置)를 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건 그럴는지 모르지만두 저이들은 지금 형식적인 그것이 아니라, 참다운 결혼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요? 적어도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애정문제가 먼저 해결 돼야만 해요. 애정의 분열을 일으키는 그러한 결혼은 저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 인생에 있어서는 결혼이 제일 중요했었고 제 결혼에 있어서는 애정이 제일 중요시 되었어요. 그 뿐이예요. 여러말 할 것 없지 않아요? 노력하는 사랑을 주장한 것이 누구였어요? 말과 행동에 책임을 가지자고 주장한 것이 누구였어요?」

버스가 왔다.

유경은 어머니의 손에서 금동일 받아 들고 영민을 향하여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금동일 한번 안아 주세요. 금동이의 혈관에 영민씨가 살아 있다고 생각함으로서 제 행복이 성립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예요.」

영민은 묵묵히 금동이를 안았다.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금동이를 안는 순간, 영민은 오주주하니 달려드는 그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몸서림을 전신에 느꼈다.

「이 몸서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고? ─」

자기 자신의 육체 보다 더 한층 살뜰하고 귀중하고 엄숙한 육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였다는 분명한 경험을 영민은 가지는 것이다.

「어머니, 안녕히……」

「오냐. 금동아, 금동아, 금동아!」

버스가 十[십]여 명의 승객을 싣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빠, 안녕히 계세요, 그래!」

금동이를 안고 유경은 운다.

어머니도 운다.

영민은 나무 다리에 전신의 무게를 싣고 금동이의 얼굴도 유경이의 얼굴도 보지 않을 셈으로 머리를 푹 수그린채 언제까지나 부처님인 양 서 있었다.

육체의 소실(消失)을 조상하는 크리스챤이 영구차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