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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3권/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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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여 입을 열어 말하라

[편집]

영민씨!

마음 괴롭게 생각 마십시오. 제게도 바람(希望[희망])이 있었을는지 모르오나 바람만을 가지고 영민씨를 사모한 것은 아니올시다. 혜경이를 길이길이 사랑하여 주십시오. 혜경이는 저를 죽음의 위기로부터 구원을 베풀어 주 신 은인이 올시다.

혜경이!

마음 괴롭게 생각 마시고 영민씨를 길이 행복되게 하여 주시오. 못 올 길을 온 제 불찰을 널리 용서해 주시고 금동일 잘 길러 훌륭한 사람 만들어 주시요.

어머님, 아버님!

제 외로운 몸을 거두어 남부럽지 않게 길러 주신 어머님 아버님을 길이 모시지 못한 불초 소녀를 깊이깊이 꾸지람 하소서. 불초 운옥은 가오니 소녀가 간 곳을 찾지 마시옵고 장생불사 천녀수를 누리시와 백씨 가문에 번영이 있사옵기를 길이 비오며……

「운옥 올림」

새벽이 가까울 무렵, 어머니가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서 운옥은 간단한 유서 한 장을 써서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아 두고 보따리를 끌러 버선짝 속에서 아버지의 유물인 권총만을 알맹이로 꺼내 허리춤에 찔렀다. 그리고는 샛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아가 뒷문을 방싯 열고 이 유서 깊은 청기와 집을 운옥은 나섰다.

태극령 고개 넘어 먼 동이 훤하게 트기 시작할 무렵, 동리 밖 우물 가에 외로이 선 수양버들 사이로 달빛이 새여 드는 좁다란 비탈 길을 도라지탑을 향하여 운옥은 뛰어 올라 갔다.

「한 방은 나라를 위하여, 한 방은 남편을 위하여, 한 방은 너 자신을 위하여 써라.」

하신 아버지의 유언을 운옥은 생각한다.

고마우신 아버지다. 오늘의 이 곤경을 위하여 아버지의 이 귀중한 유물은 운옥을 영원히 구할 수가 있었다. 조국을 위하여 운옥은 이미 한 알을 썼다.

「남어지 두 알!」

그렇다. 그것은 분명 남편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이 밤이 새기전에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허 운옥의 파란 많던 일생을 고요히 청산해 줄 것이다.

「가자! 아버지의 곁으로! 빨리 가자! 아버지의 곁으로!」

운옥은 꿈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죽는다는 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이 두 방의 탄환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운옥은 사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이다.

아무런 고달픔도 아무런 외로움도 없는 구원의 세계 속으로 운옥은 지금 뛰어 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운옥의 앞에는 지금 천국으로 향하여 무한한 길이를 가지고 길게 뻗친 한 줄기 광명의 백도(白道)가 찬연한 광채 속에 놓여 있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 옆으로 가는 길이다!」

운옥의 황홀한 영혼은 길게 뻗친 그 찬연한 백도 위의 길손이 된 자신을 무한히 기뻐하였다.

사랑도 갔다. 고달픔도 갔다. 폭풍우의 역사도 이미 갔다. 아버지의 무덤을 향하여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운옥의 의식 세계에는 오직 하나 발뿌리에 걷어 채우는 효명(曉明) 속의 희미한 달빛이 있을 따름이다.

역사여, 가거라! 폭풍의 어지러운 역사여, 가거라! 이윽고 안식의 역사는 운옥을 찾아온다!

잔월(殘月)이 비낀 태극령 고개를 넘어 일로 아버지의 분묘를 향하여 지름길을 달리고 있을 때 돌연

「누구야?……」

하는 고함 소리가 운옥의 코 앞에서 꿈결처럼 들렸다. 그것은 수수밭과 논 사이를 빠져 나온 한 줄기 논뚝 길에서였다.

운옥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은 누구인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미친 듯이 뛰어 가는 거야?」

뒷탑골서 신작로로 나오는 좁다란 논뚝길이 운옥의 눈 앞에 희미하니 가로놓여 있었다. 그 논뚝길과 지름 길의 십자로에서 운옥은 흰 그림자 하나와 검은 그림자 하나를 코 앞에서 만났다.

「왜 대답이 없어? 대답을 해, 대답을……」

「…………」

검은 그림자가 먼저 성큼성큼 운옥의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은 누구예요?」

운옥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누구긴 누구야? 사람이지.」

어디서 듣던 목소리 같다.

「나두 사람인데요.」

「무엇이?……」

검은 그림자가 쑥 얼굴을 운옥의 코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양편에서 다 똑같이

「앗!」

하고 고함을 쳤다.

너무나 의외의 얼굴을 두 사람은 상대자에게서 발견 하였던 것이니, 지새는 달빛에 희미하게 쳐다보인 그 얼굴은 분명히 애꾸눈이가 아닌가.

「아, 운옥이?……너 여기서 잘 만났다!」

분명히 그것은 박 준길이었다. 아침 차를 탈 셈으로 새벽 길을 떠난 박 준길이의 내외, 흰 그림자는 분명히 윤 영실이가 아닌가

「윤 선생!」

운옥은 무슨 도움이 될까하고 윤 영실을 찾았다.

「아, 운옥이가 아냐?」

「윤 선생!」

운옥은 또 한번 윤 영실을 찾았다.

「윤 선생이 무슨 상관이야?……박 준길이면 그만이다!」

준길은 꽉 운옥의 팔을 나꿔잡았다.

「윤 선생!」

「운옥이!」

「잔 말들 말아!」

궤엑하고 준길은 고함을 쳤다.

「잘 만났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흥!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도망쳤지? 흥, 그러나 오늘 밤은 잘 안 될껄!」

「놓아요!」

운옥은 준길이의 손을 무섭게 뿌리쳤다.

「이번엔 잘 안 될걸. 오늘 밤의 경주는 확실히 내 편히 유리해. 흥, 설마 이 애꾸눈을 잊어 먹지야 않았겠지?」

「놓아요!」

「안 될껄.」

「어떡헐 테야요?」

「가자, 주재소로 가자!」

「길을 비켜요!」

운옥은 모든 것을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여보오!」

그때 윤 영실이가 준길이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저리 비켜!」

준길은 꿰엑 고함을 쳤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여러 가지로 가엾은 사람인데……」

「이거 왜 귀찮게 굴어? 잠자코 못 있으면 너두 한목에 묶어 간다!」

「그래두 내가 가르친 학생이구……또 어렸을 적부터 가엾은 신센데……」

「아니, 넌 이년에게 금을 먹었단 말이냐, 은을 먹었다는 말이냐?―」

그러자 마자

「철썩!」

하고 손등으로 아내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갈겼다.

「으아―」

영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가자, 주재소로 가자!」

준길은 운옥의 목덜미를 독수리처럼 긁어 쥐었다.

「…………」

「아직두 한 눈이 남았다. 또 한번 찔러 보지?」

자기가 배앝은 그 무심중의 한 마디는 돌연 박 준길의 잠자고 있던 야욕으로 하여금 지나간 날의 그 도라지탑 앞에서의 불타오르던 기억을 새롭히게 하였다. 운옥에게 향하는 준길의 야욕은 자기 아내의 존재를 차츰차츰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준길은 마침내 독수리처럼 긁어 잡았던 운옥의 목덜미를 잡아 채면서 한 손으로는 운옥의 허리를 받아 안았다. 五[오]년 전의 달래던 운옥의 가냘펐던 허리 보다는 좀더 풍요감(豊饒感)을 준길은 손길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만한 허리를 자기 아내의 눈 앞에서 발견하지 않으면 아니 된 오늘의 불운을 준길은 무한히 뉘우치며 운옥이 지금이 아니라도 「 , 좋아. 내 말 한 마디만 들어 주겠다는 대답을 하면 돼!」

영실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준길은 운옥의 귀밑에 재빨리 속삭이었다. 어스름 달빛, 야음(夜陰)이 준길이의 야성을 대담하게 하였다. 아니, 영실이만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준길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아, 빨리 주재소로 가자!」

그 소리를 준길은 크게 하고

「운옥이, 한번만, 한번만……」

을 낮은 소리로 하였다.

四[사], 五[오]간 밖 수수밭 옆에 쭈구리고 앉은 영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운 채다. 준길이에게 얻어 맞은 볼이 아파서 그러고 있는지,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을 보지 않으려고 그러고 있는지, 어떤 것인지를 준길은 모른다.

준길은 힐끗힐끗 아내 편을 돌아다 보면서, 이리 비키고 저리 비키는 운옥의 입술을 야수처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놓세요!」

운옥은 맹수에게 붙잡힌 토끼새끼처럼 필사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못 놓겠다! 내 요구를 들어 주든가, 주재소로 가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 다고!」

무서운 기세로 확확 달아 오는 야욕의 불길, 한 손으로는 운옥의 목을 꽉 끼어 안고 한손으로는 운옥의 몽글거리는 몽둥이를 미친 듯이 애무하였다.

「빨리 놓아 주세요!」

「못 놓겠다!」

「윤 선생님!」

운옥은 고함을 쳤다.

「소용없어! 영실은 언제든지 내 명령에 복종할 줄만 아는 사람이야. 자아, 운옥이, 운옥이!」

준길은 마침내 한 손으로 운옥의 끌채를 움켜 잡고 한 손으로는 운옥의 잔허리를 무섭게 끌어 댕겼다.

「아아, 아버지!」

운옥은 눈을 감고 마침내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았다.

그 순간, 운옥의 희미한 청각은 분명히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오냐, 운옥아, 아버지는 항상 네 옆에 살아 있다! 운옥아, 탄식을 버리고 네 허리춤을 더듬어 보아라!」

운옥의 희미해 가던 의식이 펄떡 정신을 차렸다. 운옥은 만신의 힘을 다하여 준길의 몸뚱이를 떠밀면서 아버지의 유물을 허리춤에서 쑥 빼들자

「탕―」

그 순간, 준길은

「으악―」

하고 부르짖으며 한 걸음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쓰러질 줄 알았던 준길의 몸둥이는 쓰러지질 않고 그냥 서 있지 않는가!

「빗맞았구나!」

그렇다. 총알은 준길이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뒤이어 또 한방

「탕―」

「으, 음……」

준길이의 몽뚱이가 앞으로 갑자기 꼬꾸라지면서 땅 위에 펄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멀리 등 뒤에서 뭐라고 아우성을 치던 윤영실의 소리도 인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운옥은 꿈결처럼 산비탈 길을 꾸불꾸불 돌아서 우거진 솔밭을 께어 나갔다. 아버지의 묘는 바로 그 솔밭을 께어 나간 조그만 언덕 위에 있었다

「아, 버, 지, 잇―」

운옥은 흐트러진 옷자락을 거둘 겨를도 없이 아버지의 묘 앞에 힘없이 엎드려졌다.

「아버지, 아버지!」

운옥은 무섭게 울어댔다. 길다란히 자란 잔디 풀을 잡아 뜯으며 운옥은 그칠 줄 모르는 울음을 언제까지나 울고 있었다. 이 설움 저 설움, 운옥의 설움은 실로 한두 가지의 설움이 아니었다.

「아버지 운옥도 아버지 품안으로 가렵니다! 아버지의 품안만이 운옥을 따사롭게 안아 주는 오로지 하나의 보금자리 올시다!」

이윽고 운옥은 몸을 일으켜 묘 위에 멋없이 자란 키다리 풀들을 돌아가면서 가지런히 꺾고 나서 다시금 무덤 앞에 조용히 꿇어 앉았다.

아주 맑은 운옥의 심경이었다 . 눈을 감으니 여전히 한 줄기 끝없이 뻗친 찬란한 백도가 운옥이 앞에 길게 놓여 있었다. 그 무한히 뻗은 백도 맨 끝 수평선 위에서 자기를 부르는 아버지의 영롱한 영혼이 고요히 서 계셨다.

처음에는 한 점 조그만 티끌같던 그 영롱한 영혼은 이윽고 운옥의 망막 속에서 팔락팔락 죽지를 움직이며 허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날아 올라 가기 시작하였다.

「오오, 어여쁜 나비!」

흰 나비로 변한 아버지의 영혼은 운옥을 향하여

「이리 온! 이리 온!」

을 속삭이며 자꾸만 자꾸만창공으로 날아 올라간다. 팔락팔락, 팔락팔락, 흰 나비의 자태가 이윽고 보일락 말락 하게 되었을 순간, 운옥은

「아버지, 같이 가세요!」

하고 당황히 부르짖으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끄집어 내기가 바쁘게 거꾸로 총 뿌리를 가슴 한복판에다대고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 댕겼다.

「채칵―」

또 한번

「채칵―」

운옥은 후딱 눈을 뜨며 손에 쥔 권총을 들여다 보았다.

「아, 총알이 없다!」

그렇다. 준길을 향하여 두 발의 탄환이 발사되었던 사실을 운옥은 비로소 깨닫고 발딱 몸을 일으켰다. 운옥은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 보아도 운옥의 생명을 끊어 버릴만한 도구가 거기에서 발견되지는 않았다.

「까옥, 까옥―」

운옥은 후딱 하늘을 우러렀다. 먼 동이 터오는 훤한 창공을 배경으로 하고 가마귀 한 마리가 운옥의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까옥, 까옥―」

운옥은 돌연 그 어떤 불길을 전신에 느끼며 컴컴한 솔밭을 향하여 서너 걸음 달음질을 치다가 다시금 휙 발걸음을 돌렸다.

무덤 옆에 커다란 돌 하나가 박혀 있었다. 운옥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돌뿌리를 빼 내고 그 속에 쥐었던 권총을 쓸어 넣은 후에 다시 돌을 묻어 놓았다.

「아버지,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그 한 마디를 묘 앞에 남겨 놓고 운옥은 솔밭을 향하여 달음질을 쳤다.

이윽고 솔밭을 께어 다간 운옥의 눈 앞에는 옥토가 즐비한 무연한 탑골동 평야가 훤하니 밝아 오는 효명 속에서 무한히 전개되어 있었다. 그 효명 속을 운옥은 달린다, 자꾸만 달린다.

점점 작아져 가는 운옥의 희끄무레한 그림자 앞에는 빛을 잃은 잔월(殘月) 이 무대장치의 그것인 양 애조(哀調)롭게 비끼고 멀리 수평선에서 불어오는 아침 바람 속에서 암 사슴인 양 쉬임없이 달리는 운옥의 치맛자락이 찢어질 것 처럼 무섭게 나부낀다. 운옥은 달린다. 자꾸만 달린다.

그러나 아아, 무의무탁(無依無托)의 여인이여, 그대 어디로 가려는고?……

구겨진 이력서를 눈물로서 적시고 폭풍의 역사를 피로서 아로사긴 수난의 여인 허 운옥의 캄캄한 앞길을 하늘이여, 뜻이 있거든 등불을 켜 인도하라!

암흑과 절망, 폭풍과 파도 속에서 인제는 완전히 마음의 등불을 잃어버린 허 운옥의 앞날을 촌극이라도 예측한다면 하늘이여, 입을 열어 그것을 말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