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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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들에 두 며느리[편집]

1[편집]

「어머니!」

운옥은 억해 오는 설움을 참고 절을 하고나자, 어머니의 품안에 엎드려서 자꾸만 자꾸만 느껴 울었다.

「오냐, 오냐. 울지 말아. 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풍문으로 살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네가 그 먼곳꺼정 찾아 갔을 줄이야……」

어머니도 운다. 동시에 백 초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음 너는 과연 허 선생의 딸이었다!」

백 초시는 눈을 껌벅거리며 담뱃대를 물었다. 영민은 얼른 성냥을 그어 백초시의 담배에 불을 붙여 드리며

「아버지의 병환이 이처럼 중하실 줄은 몰랐읍니다. 저는 인제 제대가 되었읍니다. 아버지 옆에 길이 있어서도 무방하게 되었읍니다.」

「제대라니?……」

거기서 영민은 운옥이와의 지나간 이야기를 쭉 하고 나서

「그러니까 동리 사람들에겐 당분간 제가 눈을 못 보는 불구의 몸이라고 말씀을 하셔야 되겠읍니다.」

「음, 잘 됐다! 잘 됐어!」

백 초시는 여간 기쁘지가 않다.

「내 아들이 죽어서야 될 법한 노릇인가? 하늘은 무심하지 않느니라!」

하였다. 그리고 이번엔 자꾸만 울고 있는 운옥을 향하여

「운옥아.」

「예?」

운옥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수고 했다! 네 고생이야 오작 했겠니? 그러나 오늘날까지 용히 숨어 살았다는 것두 캐 들어 가 보면 하늘이 무심하지 않은 탓이다.」

「모두, 모두가 아버지께서 저를 걱정하여 주신 덕택으로……」

「말이 되나? 모두 돌아 가신 허 선생의 영혼이 너를 보호한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내 아들 영민을 네가 다려다 줄 줄은 몰랐구나!」

운옥에게 대하여 그동안 희박하여 졌던 백 초시의 감정이 다시금 살아 나기 시작하였다.

행복한 일이다 무의미한 . 죽음의 마당으로 끌리어 나갔던 삼대 독자가 돌아 온 것도 꿈같은 일이다. 五[오]년 동안 소식이 두절 되었던 허 상진이의 유자가 돌아 온 것도 정말 꿈같은 일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꿈같이 반갑고 행복된 일이건만 백 초시의 심중에는 오늘의 이 반가움과 이 행복을 고스라니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무거운 연 덩어리 같은 것이 하나 검은 구름처럼 떠돌고 있었다. 오늘의 이 감격적인 행복감을 백 초시의 마음 같아서는 일생을 두고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백 초시는 팔자가 나빴다. 인생은 그만 두고라도 단 三十[삼십]분의 행복도 그는 갖지를 못하였다. 그렇다. 백 초시가 진심으로 행복을 느끼고 기뻐한 것은 五[오]분, 十[십]분의 촌시가 아니었던가. 운옥의 정성이 크면 클수록 백 초시의 불행은 더 빨리 다가 왔다. 하루 이틀을 끌어도 좋을 그러한 팔자 좋은 위치에 백 초시는 서 있지를 못 하였다.

아무리 백씨 가문에 쇠운이 들었다 하더라도 한 아들에 두 며느리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그 두 며느리가 한 집의 지붕을 쓰고 한 솥의 밥을 먹다니, 될 번한 노릇인가? 날이 밝기를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백초시에게는 없었다. 날이 밝아서 동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도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백 초시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백 초시가 눈을 감기 전에는 이런한 패륜(悖倫)을 정시(正視) 할 수는 없었다.

「영민아.」

「예?……」

영민은 얼굴을 들고 아버지의 갑자기 엄숙해진 표정을 쳐다 보았다.

2[편집]

「영민아,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영민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다시

「먼 길에 이처럼 수고로히 돌아 온 너이들을 위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이야기 하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만 사정이 그것을 허하지 않으므로 지금 이야기 한다. 배도 고프고 피로도 하겠지만 인정 없는 아비라 오해 말고 들어 다오.」

「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영민은 어리둥절해 졌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몸과 마음이 다 허약해진 너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결론만을 먼저 말해 두겠다.」

「아버지, 무슨 말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 건강은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쇠약해 지지는 않았읍니다.」

「오냐. 그래야지. ── 영민아!」

「예?」

「유경이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옛?……」

영민은 후닥닥 놀랐다.

「영민아.」

「예? ──」

「진정 해라!」

「………」

「진정해라! 너는 몸과 마음이 다같이 허약해 졌을테니 ──」

「아버지.」

「오냐.」

「정말이십니까?」

「정말이다. 오 선생이 내 병 문안을 올 때, 따님과 같이 왔다가 집에 손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 유경은 순전히 자기의 의견으로서 우리 집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덕을 보았다. 너이 어머니를 따라서 논밭에도 나갔다. 그 뿐이 아니다.」

「아아, 유경이가?」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자유롭지 못한 몸이 비틀비틀 다시금 방바닥에 쓰려졌다.

「영민아!」

어머니는 영민을 쓸어 안았다.

「어머니! 유경을……… 유경을 만나게 하여 주세요! 어머니……」

운옥은 영민이 보다 좀더 빨리 몸을 일으켜 오뚝이처럼 서 있었다. 운옥은 눈을 감고 입을 악 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운옥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운옥의 몸뚱이를 어머니는 영민을 내버려 두고 부여잡았다.

「여보, 당신은 운옥을 다리고 안방으로 들어 가소.」

「운옥아, 들어 가자. 안방으로 들어 가자.」

어머니는 운옥을 부축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들어 가면서 어머니는 뜰 아랫 방을 향하여 고함을 쳤다.

「금동아, 아범이 왔다!」

대답이 없다.

「금동이, 빨리 나오너라. 아범이 왔다!」

「어머니, 누구가 왔어요?」

문이 확 열리면서 유경이가 뛰쳐 나왔다.

「으악 ──」

젖꼭지를 빼았긴 금동이의 울음 소리가 갑자기 터저 나왔다.

「금동이 아범이 왔대두!」

「아이, 엄마아 ──」

그러는데 사랑문이 또 확 열리면서 영민이가 맨발로 뛰처 나오며 부르짖었다.

「유경이! 유, 유경이!」

「아, 영, 영민씨잇!」

나무 다리를 잃어 버린 절름발이 영민이가 광란의 유경을 마침내 붙잡은 것은 뜰안 한가운데에서였다.

「영민씨! 영민씨! 이게, 이게……」

일단 격렬한 포옹 속에 들어 갔던 유경은 다시금 포옹 속에서 몸을 빼면서 영민의 절름발이 다리를 만저 보았다.

「유경이! 유경이!」

영민은 유경이의 몸을 다시금 힘차게 끌어 안으며 유경이의 입술을 미친 듯이 더듬었다.

「유경이, 유경이!」

「다리는……다리는?……」

「유경이, 금동인?……금동인?……」

그렇게 외치면서 영민은 옥순이가 붙안고 나온 금동을 향하여 달려 갔다.

태극령 고개 위에 달빛이 대낮같이 무르익은 달밤, 흰 박꽃이 밤바람에 너울거리는 지붕 저편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붉은 별, 푸른 별, 초록 별, 하얀 별을 열심히 세어 보던 오 유경의 행복은 마침내 이루어 졌다.

3[편집]

분명히 그것은 혜경이의 목소리가 아닌가. 달빛은 대낮 같건만 모습은 똑똑 치 않다. 그러나 분명히 그 음성은 혜경이의 것이다.

그러나 운옥의 입으로부터는 그 너무도 반가운 이름이지만 그 반가운 이름을 아무런 주저없이 부를 수는 없었다. 운옥의 눈 앞에서 벌어진 이 광경이야말로 최후의 한오락 가느다란 희망을 그래도 버리지 않고 있던 허 운옥으로 하여금 자기의 걸어 갈 길을 똑똑히 가르쳐 줄 하나의 결정적인 모멘트를 형성케 하였다.

운옥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우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갔다. 뛰어들어 가면서 운옥은 있는 힘을 다하여

「혜경이잇 ──」

하고, 고함을 첬다.

유경은 후딱 정신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혜경이라고 불러 줄 사람은 금순 언니 단 한 사람뿐이 아닌가!

그때야, 비로소 유경은 어머니와 함게 안방 토방에 서 있던 어떤 여자의 자태를 기억해 냈고 그리고 이 집을 나간 운옥이와 금순 언니가 동일한 인물이 아닌가고 의심하였던 자기의 생각을 유경은 끄집어 낼 수가 있었다.

그 순간, 유경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일종의 몸서림을 전신에 느꼈던 것이니 인제 그 목소리야말로 분명 홍 금순의 그것이 아닌가!

「누구야요?」

유경은 그렇게 외치며 뜰안에 내려 온 달빛을 누비며 안방 토방으로 다람쥐처럼 뛰어 올라 갔다.

유경은 발칵 문을 열었다.

「………」

어머니의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무섭게 느껴 우는 젊은 여자의 자태가 유경의 시야에 확 뛰어 들어왔다.

「누구야요, 당신은?」

유경은 물었다.

그러나 느껴 우는 여인은 좀처럼 얼굴을 들지 않았다.

「운옥이란다. 운옥이야.」

어머니는 대신 대답을 하며

「그 야전병원이라는데꺼정, 그 머나먼 청국(중국) 땅꺼정 영민을 다릴러 갔던 운옥이 란다. 운옥이야.」

그 순간 후딱 운옥은 얼굴을 들었다. 얼굴을 들자마자 벌떡 일어서면서 유경 이룰 꽉 부여 안았다.

「앗, 금순 언니!」

「혜경이!」

「언니, 언니, 금순 언니!」

「혜경이! 혜경이!」

유경은 운옥의 목을 꽉 껴않으며

「언니잇 ──」

눈물이 푹 쏟아져 앞을 볼 수가 없다.

「혜경이잇 ─」

운옥과 유경은 서로서로를 꼭 끼어 안고 언제까지나 그칠 줄 모르는 울음 속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아, 얘들아! 너이들 아는 사이냐?」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다. 놀라지 않을래야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어머니었다.

「아, 여보오!」

어머니는 안방 문을 확 열고 사랑방으로 뛰어 나가면서 영감을 불렀다.

「글쎄, 여보오. 운옥이와 유경이가 서루 아는 사이야요. 아는 사이!」

「응?……」

장죽을 꺼꾸로 들고 백 초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죽을 꺼꾸로 드는 것은 그 어떤 의문에 봉착하였을 경우에 저도 모르게 쓰는 백 초시의 버릇이다.

「서로 안다?」

이 밤이 밝기 전에 밤참 겸 저녁을 먹고 나서―사랑 방에선 백 초시와 영민이가 마주 앉아 있었고 안방에선 어머니와 운 옥이가 나란히 누워 있었고 뜰아랫 방에선 금동일 다린 유경이가 옥순이와 누워 있었다.

옥순이도 잠이 들고 금동이도 쌕색 잠이 들었다. 유경은 무엇 보다도 영민이가 죽지 않고 돌아 온 것을 하늘에 감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의 마음만으로 이 하룻밤을 안일히 지날 수 있는 그러한 행복이 왜 와 주지 않았던가? 영민은 왔다. 그러나 그는 행복을 가지고 오는 대신에 불행을 가지고 온 것이다.

「춘심의 독설이 전연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구나!」

자기가 이 낯설은 시골에 와서 온갖 허세와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백 영민의 사랑과 진실을 하늘 같이 믿음으로서 용솟음 치던 오 유경의 애정의 노력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왔다.

「역시 무엇이 있었구나!」

영민과 그 허씨 딸과의 사이는 아버지가 말하던 그러한 간단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경은 오늘 밤 자기 눈으로 분명히 목격한 것이다.

일선까지 찾아 갔던 금순 언니 아니, 허 운옥의 애달팠던 마음을 상상해 볼 때, 그리고 또 아까 어머니의 무릎 위에 쓰러져서 무섭게 느껴 울던 허운옥을 생각할 때, 유경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앞이 캄캄해 졌다. 지구 한복판에 뻥하니 구멍이 하나 뚫어 진 것 같은 커다란 허무가 유경의 발랄하던 전 정신력을 무자비하게도 박탈하고 말았다.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져 펑하니 젖은 베개 위에 유경은 얼굴을 부비며

「영민씨!」

를 찾고

「금순 언니!」

를 불렀다.

그 허씨 딸이라는 여자가 왜 하필 금순 언니였었느냐고, 운명의 기구함을 저주도 해 보고 운옥이와의 사이에 그러한 복잡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또한 자기에게 진실한 애정의 세계를 보여 준 영민의 무책임한 인간성을 원망도 해 보았다.

옛날의 유경 같으면 영민이의 뺨이라도 한 대 보기 좋게 갈겨준 후에 벌써 이 자리를 떠났을 유경이었지만 옛날의 유경과 오늘의 유경이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차이가 있는 그만큼 복잡하고 타협적인 인생의 성장을 유경은 갖게 된 셈이다. 무서운 고민이 유경의 연약한 신경을 쑤시었다.

「금동아!」

유경의 눈물이 고이 잠든 금동이의 얼굴 위에 툭툭툭툭 떨어 졌다.

창살에 달빛이 비쳐 온다. 너울거리는 박꽃 저편 하늘에서 그처럼도 열심히 세어 보던 고운 별들이건만 오늘 밤은 어이하여 저처럼도 싸늘할까?

그러나 인생의 성장은 성격의 변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격 구현(俱現)의 방법이 다르고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질 따름이다.

유경은 울음을 그쳤다. 오랜 시간을 두고 눈물에 젖어 있을 경우가 아님을 유경은 깨달았다. 그러한 마음의 여유도 있을 리 없거니와 또한 오늘의 이 기나긴 하룻밤을 이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시간적 여유가 유경에게는 없었다. 이 순간부터 개시할 자기의 행동의 순서를 유경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계산하기 시작한다.

우선 오늘 밤이 밝기 전에 영민과 이야기할 조용한 시간을 가질 것, 금순 언니를 만나 볼 것, 그리고 내일 아침 서울로 올라 갈 것 ― 이 세 가지였다.

그러나 금순 언니의 마음은 이미 알 것 같았다. 만나면 서로 부여잡고 아까처럼 우는 것 이외에는 하등사건의 진전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금순 언니가 허 운옥이었다는 이 기구한 운명의 쇠사슬에 억매어 오랜시간을 이 기구성과 비극속에서 배회하는 것은 유경 자신의 행동을 정확하게 결정 짓는 마당에 있어서 많은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홍 금순이에게 대한 자기의 감상(感傷)을 가능한 한도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와 금순 언니와의 관계는 이제부터 유경이가 결정 지려는 행동에 대하여는 하등의 영향이 없으리라고 믿었다. 과거에 있어서 영민이와 관계를 맺은 허운옥이라는 여자가 유경이에게 있어서는 누구이든지 좋았다. 그것이 우연히도 홍 금순이었을 따름이다. 지금에 유경이에게 있어서는 갑이래도 좋았고 을이래도 좋았고 병이라도 좋았다.

그러나 만일 유경이의 기억이 좀더 정확 했었으면 지나간 날, 유경이가 김준혁 병원에 입원했을 때, 경숙이라는 간호원의 입으로부터 한시를 좋아한다는 운옥이라는 간호원이 있다는 말을 연상하고 놀랐을 것이다.

「문제는 백 영민이다!」

유경은 그렇게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 영민이가 자기 있는 데로 건너 와 줄 것만 같아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나 사랑방에서 둥얼둥얼 백 초시와 이야기하고 있는 영민은 좀처럼 건너 올 줄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대한 영민씨의 사랑과 정신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유경은 추호의 사념도 없이 믿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 누구가 대필하였다는 야전병원에서의 영민의 최근의 서면으로 보더라도 확실하였다. 단지 영민에게 마음의 동요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운옥의 출현 때문이라고 유경은 추측하였다.

남녀의 사랑이 그리고 그 사랑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이 쌍방의 순수한 애정과 노력으로서 이루워질줄로만 생각하였던 오 유경의 관념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자연이, 좀 더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온갖 인위적인 사회적 환경을 포함한 대자연이 그 순수한 애정과 노력을 복돋두어 주지 않는 한, 그것은 결국에 있어서 김 준혁 박사의 소위 행복의 그림자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행복의 그림자라도 좋아요. 나 꿈좀 더 꾸어 보겠어요.」

하던, 꿈만 먹고 살던 맥(.)의 동족인 소녀 유경은 이미 아니였다. 소녀 화보 의 주인공들처럼 (小女畵報) 七[칠]색이 찬란한 창공의 무지개 위에 그림 그려 보던 그러한 행복을 현실 속에서 찾아 내기가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를 유경은 깨닫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유경은 행복의 그림자로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유경은 행복 그 자체를 찾지 않아서는 아니 되었다.

순수한 애정과 노력만 있다면 어떠한 가혹한 운명이라도 능히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믿어 왔던 유경의 인생관이 차츰차츰 수정(修正)을 보기 시작하였다.

「전부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

하고 부르짖던 유경의 칼날 같던 성격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하였다.

유경의 총명으로서 오늘의 영민의 곤경을 추측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책임 있는 영민의 한 마디를 분명히 자기 귀로 들어야만 하였다. 한낱 오해로서 갈라지는 거와 같은 그러한 경솔은 다시는 저지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 그처럼 길까?―」

영민을 기다리는 유경의 마음은 실로 일각이 천추와 같이 길었다.

「이 밤이 밝기 전에 나는 나의 행동의 방향을 세워야 한다!」

2[편집]

그즈음 안방에서는 어머니와 운옥이가 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지나간 날의 운옥이의 이야기와 지나간 날의 집안 이야기를 긴 한숨과 함께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노라니 네 고생이 오직했겠니?」

「저야 무슨 고생을……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나요?…… 해보지 못하신 논밭일꺼정 하시누라구……」

「집안은 점점 기우러져 가고 매년 한 패기씩 팔아대지만 그래두 감당하지 못해서 벌써부터 영민에게는 학비를 못 보냈단다. 영민이가 끌려 나간 후 아버지는 저처럼 들어눕는 몸이 되구, 그래서 유경이가 있겠다구 하길래 그럼 같이 있자구 했지, 뭐 별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 뭐.」

무엇인가 어머니는 운옥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쯤 말을 띠워 놓아 두었다.

「곱게 자란 애가 글쎄 논밭엘 다 따라 댕긴단다.」

그 말에는 정말 운옥이도 놀랐다.

「어쩌면……」

운옥은 진심으로 탄복의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그애는 제 생명의 은인이야요. 저를 저 준길이의 손에서 구해 준 고마운 아이예요.」

「그러기에 말이다. 원체 애가 똑똑하더라만 어쩌면 담도 크지! 웬만 해서야 너의 아버지가 그 애를 옆에다 붙이겠니! 너의 아버지는 그저 금동이가 고와서……」

어머니는 자꾸만 말을 잘라 먹는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마음 놓고 운옥에게 털어 놀수는 없었다.

「그저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고 미안만 해서……」

「어머니!」

「오냐.」

「어머니, 조금도 마음 고생 마세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 뵙구 갈 생각이 간절하구……또 부상당한 몸을 혼자 두고 올 수도 없구……이럴 줄을 알았더라면 차라리 저는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만……」

어머니는 이불 깃으로 눈물을 씻으며

「모두 팔자지. 사람의 팔자를 글쎄 누구가 안단 말이야.」

그러다가

「그래 영민이 하구는 이야기를 좀 해 봤니?」

「예―」

「무슨 이야길 하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그 애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던?」

「어떻게라구, 어머니두?」

운옥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영민의 포옹 속에서 질식할 것 같던 찬란한 행복의 일순간을 불현 듯 운옥은 회상한다.

「어머니, 어서 주무셔요.」

「잠이 오야지?……」

「어머니, 금동이 잘 자라나요? 금동이 한텐 저두 정이 퍽 들었어요.」

「글세 말이다. 이런 기구한 일이 어디 또 있겠니?」

「어머니, 어서 정말 주무셔요.」

운옥은 자꾸만 어머니를 재우려 한다. 어머니가 깨어 있으면 운옥은 울 수가 없다. 이미 신경서 떠나 올 때부터 운옥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운옥의 그 희미하던 생각을 이처럼 급속히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 될 비극적인 운명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뜻밖의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내 생명의 은인인 혜경일 줄이야 뉘 알았으랴. 운옥은 운옥이대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었다.

「이 밤이 밝기 전에……이 한밤이 밝기 전에……」

유경이와 똑같은 말을 운옥은 마음으로 수없이 되풀이하였다.

3[편집]

사랑 방에서는 자리에 일어나 앉은 백 초시와 그 앞에 조용히 꿇어 앉은 영민의 두 그림자가 펄럭거리는 등잔 불 밑에서 돌부처처럼 말이 없다.

「사선을 넘어서 다시 살아 돌아 온 네 자태를 볼 때 나는 다시는 네 의견을 막을 용기가 인제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야 말로 모든 것을 내 지각있는 아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 원래에 고단스럽겠다만 하루 이틀의 여유를 두고 생각할 그러한 문제가 아님을 너두 짐작할 것이다.」

몸과 마음이 다 쇠약해진 백 초시였다. 말 소리에도 옛날의 기백을 찾아볼 길이 없다. 천식이 가끔가다 말을 중단시키곤 하였다.

「저두 그 문제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겠지. 그렇구 말구!」

옛날의 영민은 아니로구나, 하였다.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고까지 오 유경을 추궁하던 단순한 아들이 아님을 백 초시는 보았다.

「이 백 봉학이가 아무리 초라하게 된 오늘 날이다마는, 한 집에 두 며느리를 둘 수 있게까지 몰락하여 버리지는 아직 않았다. 탑골동 백 초시는 돈은 비록 없을지라도 탑골동 백 초시의 체면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영민아.」

백 초시는 아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예―」

영민은 공손히 대답을 하였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네 마음대로 골라 다고!」

「…………」

「네 생각을 존중하마.」

「…………」

「가문은 기울어 지고 심신은 쇠약하여 나는 이미 나의 생각하는 바를 세우기가 어려워. 다만 네게 바라는 것은 이 아비의 체면만을 세워 달라는 것뿐이야. 알겠냐?」

「알겠습니다.」

「동리가 부끄럽고 하늘이 부끄러워. 이 밤이 밝기 전에 네 생각을 분명히 말해 다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알겠으면 말을 해 보아라.」

「아버지!」

영민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 놓고 아버지의 수척한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냐, 말을 해 보아라.」

「운옥이가 제 앞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가장 엄숙하고 진지한 번민을 계속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제 인생관에는 실로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저는 새삼스레 발견을 하였습니다. 이 인생관은 물론 제 천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관입니다만……」

「어려운 말은 그만 두고 쉬운 말로 하여라.」

「예, 저는 제 친구들에게 생각이 뚜렷하지 않다는 말을 가끔 들었습니다.」

「생각하는 바가 분명치 않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잘 모르시겠읍니다만 제 친구들 중에서도 신성호라든가 장 일수라든가 하는 사람들은 성격이라든가 생각하는 바가 뚜렷하지만 제게는 뚜렷한 성격, 분명한 생각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래?」

「예,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이 저라는 사람을 잘 깨닫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인식 부족에서 생기는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제게는 실로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듯 하면서 낡은 데가 있고 이지적이면서도 감정적인 데가 있고 의지가 굳세인 듯 하면서도 약한 데가 있습니다. 그러한 선천적인 기초 위에 구축(構築)된 후천적인 도덕이라든가 교양이라든가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든지 보다 더 가치있는 것만을 선택하여 행동하고저 하는 강렬한 가치 판단에의 의욕이 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품을 기초로 하여 현재까지에 형성된 저의 인격의 전부 올시다.」

4[편집]

아버지 예의를 잃어 「 , 버린 점이 있으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약간 어려운 말을 쓰게 된 것은 결코 아버지를 현혹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옵고 이제부터 아버지의 물음에 대하여 대답을 올리고저 하는 제생각의 기초를 이루우는 제 인격 내지 인생관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오니, 꾸지람 마시고 관용하여 주십시오.」

「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데가 많아. 하여튼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쉬운 말로 하나의 인간이 노력을 쌓게 되면, 다시 말하면 생각이 성숙해지고 인생관에 넓이와 깊이를 갖게 되면 외견상 그 사람은 자기의 독특한 인생관을 갖지 못한 사람, 자기의 독특한 성격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서 인정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난 잘 알아 듣지 못하겠다. 밤도 깊었으니 어려운 말은 그만하고 결론을 지어보아라.」

「예―」

영민은 송구하여 머리를 숙이며

「지금까지의 제 말은 모두가 다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하여 드리기 위한 기초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제게 청하신 말씀은 두 여인 가운데 한 여인을 골라 잡으라고 하시었습니다.」

「음, 분명 그 뜻이야.」

「그러하오나 아버지.」

「어서 말을 계속하여라.」

「아버지, 현재의 제 심경으로선 두 여인을 함께 다 제 옆에 두고 싶습니다!」

「응? 무엇이?……」

백 초시는 펄떡 뛰었다.

「다시 한번 말을 해 보아라!」

영민은 무릎 앞에 두 손을 내리어 공손히 짚고 국궁의 자세를 취하면서

「아버지의 격노를 살 것을 소자는 이미 각오하고 있읍니다.」

「그런 쓸데없는 말을 그만두고 분명히 대답을 하라고 하지 않았나?」

「아버지!」

「말을 해!」

현재의 소자의 심경으로선 「 유경을 택하고 싶은 동시에 운옥도 택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이, 이썩어 빠진 놈아!」

백 초시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로 쥐었던 장죽이 저절로 거꾸로 쥐어졌다. 온몸을 부들부들 백 초시는 떨었다.

「네 놈의 그 기나긴 이야기가 그 말을 나에게 들려 주려고 한 준비었드냐?」

「…………」

영민은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이 개새끼 같은 놈아! 두 계집을 다 함께 데리고 살아? 너도 배운 놈이냐? 너도 사람이냐? 즘생이 아닌 이상 배필을 둘씩 가져?……」

「아버지!」

이윽고 영민은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날 보고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 나는 개새끼의 아비는 아니다!」

「아버지, 그러하오나 저는 제 심경을 말씀 드렸을 따름이지, 제 생각을 말씀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생각과 심경이 무엇이 다를꼬?―」

「다름니다. 이러한 현재의 제 심경을 있는 그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데서 저로서는 비로소 저 대로의 그 어떤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똑똑히 말을 해라. 분명히 네 생각을 말 해라.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너는 그것을 결정해야만 되는 것이다!」

「아버지, 그러면 대답하겠습니다.」

「해라!」

「저는 두 여인을 다 택하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저는 아무와도 결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현재에 있어서의 소자의 생각이 올시다.」

「금동이는……」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경이라는 여자는 그러한 문제에는 초월한 사람입니다.」

「음―」

백 초시는 펄썩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