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21장
고향길
[편집]1
[편집]평양서 三十[삼십]리 길을 영민과 운옥은 중간에서 버스를 내렸다. 국수정이라는 곳이다. 거기서 점심겸 겻노리를 먹고 해가 지기를 기다려서 두 사람은 十[십]여 리 길을 걷기로 하였다. 탑골동 근방에선 낮 길을 걸을 수 없는 운옥이었다.
나무 다리를 짚고 어두운 밤중 十[십]여 리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였다.
「피로하시지 않으세요?」
운옥은 영민이 옆에 살뜰히 붙어서 이것저것 손 도움을 허수러이 하지 않았다. 운옥은 보따리를 이고 트렁크를 들고 있었다.
「뭘요. 운옥이 무겁지 않소?」
「아니요.」
어두운 밤길을 두 사람은 한발한발 탑골동을 향하여 걸어갔다. 운옥으로서는 실로 五[오]년만에 걸어 보는 고향 길이였고 영민으로서는 자칫했으면 다시는 걸어 보지 못 했을 고향 길이였다. 두 사람이 다 한길같이 감개무량한 고향 길이다.
「어머님이, 아버님이 얼마나 놀라실까!」
그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나 깨나 운옥이의 생각 뿐이였소.」
「고마우신 아버님 고마우신 어머님!」
이윽고 뒷탑골 동리 밖까지 다달았을 때 운옥은 말소리를 낯추며
「오늘이 무슨 날일까요?」
「왜요?」
「장구 소리가 나요.」
동리 한 가운데서 나는 장구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희미하니 들려 왔다.
「무슨 장구 소릴까?」
영민도 머리를 기우렸다.
두 사람은 사람의 눈을 피하여 뒷탑골 동리 안으로는 들어 서지 않고 동리 밖 기장 발을 삥 돌아 태극령 고개로 올다 섰다. 장구 소리가 이번에는 두 사람의 뒤에서 들려 왔다.
도라지탑 앞에서 영민은 준길이에게 얻어 맞던 소년 시절을 생각하였고 운옥은 준길이의 눈을 찌른 五[오]년 전을 생각하였다.
「도라지의 이야기, 어쩌면 그리도 찬찬이 잘 외이셨나요?」
「운옥이가 그처럼 잘 알으켜 주지 않았소.」
「흐, 응 ──」
운옥은 행복하다.
영민은 도라지탑에서 걸음을 멈추며
「운옥이, 좀 쉬었다 갈까요?」
「그르셔요. 힘 드시지요?」
두 사람은 탑 앞에 박혀 있는 주춧돌 위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달이 뜨기 시작하였다.
「준길이가 쓰러진 데가 어디지요?」
「바루 우리의 이 발뿌리 앞인데요.」
「후우 ──」
하고, 영민은 긴 한숨을 지었다.
「달이 더 떠올라 오기 전에 어서 내려 가야겠어요.」
그러는데 둥얼둥얼 말소리가 들리며 뒷탑골서 태극령으로 올라 오는 허엽스레한 그림자가 달빛 속에서 희미하니 바라보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도라지탑 앞에서 다리 쉬임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려 갔었던들 운옥은 필연코 뒤를 따라 내려 오는 이 검은 그림자에게 발각이 되었을 것이다.
영민과 운옥은 얼른 탑 뒤로 돌아가 자태를 감추었다.
「거 헌병 노릇을 할 때 보다는 사람이 좀 점잖아젔어. 장모의 환갑 상을 다 채려 가지구 오구…… 제법 사람 구실을 할 모양이야.」
「지금은 무슨 형사가 되었다는데……」
「응, 서울서두 제일루 치는 ××경찰에서 아주 뽐을 내는 형사래. 제 얼굴만 보믄 모두들 부들부들 떤다구 하지 않아?」
「외눈깔이니까 떨지, 잘나서 떠니?」
「아무렇던 잘 얻어 먹었데. 평양 아주머니의 수심가두 그럴듯 하지만 거준길이 녀석이 장구를 제법 잘 치거든.」
「어렸을 적부터 바람잡인데……」
하나는 분명히 이태 전 까지도 백 초시네 소작인이던 영팔이의 목소리였으나 하나는 똑똑하지가 않았다.
「준길이가 왔다지 않아요?」
운옥은 가슴이 서늘하였다.
「음, 빨리 내려 갑시다.」
「네.」
2
[편집]준길이의 처가 윤 영실의 집에서는 거의 흩어져 가는 술좌석이 그냥 벌어지고 있었다.
「작은 박 주사 거 언제 다 장구를 배왔소?」
동리 청년 하나가 아첨을 한다. 돌아 서선 준길이 자식이지만 마주 앉아선 작은 박 주사였다.
「원체 재간동이니 할 수 있나?」
준길은 희쭉거리면서 만족한 얼굴로
「자네들도 서울 한 번 올라 오게. 내 명월관 한턱하리.」
「명월관이 어떻게 생겼오?」
장안의 잘난 기생은 「 다 모인 데가 명월관이야. 이 박 준길이의 말 한마디면 모두 다 슬슬 기거든.」
「왜 헌병은 그만 됐소?」
「그걸 누가 오래 하고 있어?」
그러나 기실은 무슨 실수가 있어서 쫓겨났다는 소문을 동리 청년들은 바람결에 듣고 있었다. 준길은 얼른 말머리를 돌리며
「허허, 오 창윤 영감의 딸이 탑골동에 왔다구? 춘심이 년두 그렇구. 그놈의 영감은 이 탈골동 하구 기어코 해 보자는 판인가? 영민이 자식이 운옥을 기어코 내쫓더니만 그런 장난을 하누라구 그랬군! 엉큼한 자식이!」
그러다가 이번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 년두 똥이 목구멍꺼정 찬 년이지, 쨩꼬리의 총알 막이로 나간 자식을 믿구 이 탑골동꺼정 따라 와? 맥힌 년 같으니라구……」
「작은 박 주사두 그 여잘 아실텐데요?」
「누구가 그런 년을 다 알아 둬? 서울 장안에 쐬구 쐰 것이 어여쁜 아가씬데 그까짓 년까지 손이 뻗처져?」
「그래두 작은 박 주사의 사둔 벌이 된다는 집안 식군데……」
「사둔은 또 무슨 썩어 빠진 사둔이야? 서울 장안에서두 손 꼽히는 춘심인데 그래 그런 영감 쟁이에게 꽃다운 몸을 영영 맡겨? 흥, 될 번한 노릇인가? 안되지, 안돼!」
「하하하, 그렇구 말구요. 분이두 정말 출세를 했는데!」
청년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는 동안에 주석은 한 사람 두 사람 흩어져 갔다.
「자 이만들 실례 합시다. 작은 박 주사두 내일 아침 차로 떠나실래면 일찍 주무셔야지요.」
평양서 아침 차를 탈려면 三十[삼십]리 길이니 새벽 캄캄한 무렵에 탑골동을 떠나야 하였다.
그즈음 앞탑골동 백 초시의 집에는 대문이 잠겨 있었다. 금동이에게 젖을 물린 유경이는 옥순이와 함께 뜰아랫 방에서 자고 있었고, 어머니는 사랑방에서 백 초시의 어깨를 주물르면서 부상을 당하고 야전병원에 누워 있다는 아들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아버지……」
「………?」
어디선가 아버지를 부르는 낮으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백 초시 내외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굴까?………」
목소리는 분명히 사랑문 밖에서 들리지 않는가.
「누구야? ──」
어머니가 탁 사랑문을 열었다.
「어머니!」
바람과 함께 휙 뛰쳐 들어 온 나무 다리의 사나이, 그것은 틀림 없는 자기 아들 영민이가 아닌가!
「아, 영, 영민이가 아니가?」
와락 달려드는 어머니와
「아니, 이게……이게 웬 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백 초시
「오오, 영, 영민아, 영민아?」
아들의 상처 받은 다리를 백 초시 내외는 어루만지고 쓸어보며 그저
「영민아, 영민아!」
를 꿈결처럼 외치고 있었다.
영민은 어머니의 여윈 어깨를 잠깐동안 어루만지고 있다가 이윽고 몸을 가다듬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절을 하고 나서
「아버지, 한 장의 소식도 올리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 와서 이처럼 놀라시게 하였읍니다.」
영민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 나서
「실은 편지를 내어서 아니 될 사정이 있어서……」
「어머니!」
「오냐.」
「아버지.」
「어서 말을 해 보라.」
「동리 사람들에게 알리면 재미 없으니 너무 놀라시지 마시고……실은 운 옥이와 같이 왔읍니다.」
「누구와 같이 왔다구?……」
백 초시 내외는 자기네 귀를 의심하였다.
「운옥이와 같이 왔읍니다.」
「오오, 운옥이?……」
두 늙은이는 이 겹쳐지는 놀라움에 글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 졌다.
영민은 운옥이가 야전병원까지 찾아 왔었다는 이야기를 간단히 보고하고 이윽고 운옥을 가만히 불러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