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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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변 삼각형의 비극[편집]

1[편집]

제대식(除隊式)이 있은 그날 오후 차로 영민과 운옥은 신경을 떠나 일로 고국 땅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비록 나무 다리는 짚었을 망정 귀와 눈은 그리 부자유 하지 않을 정도로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안과(眼.)에 파편을 끄집어 낸 수술 자리가 벌겋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영민은 명예의 부상을 받은 실명(失明)의 상이군인으로서 일일이 운옥의 손 도움을 받지 않아서는 아니 되었다.

이튿날 저녁, 기차가 봉천을 지나 안동을 향하여 달리고 있을 무렵에 운옥은 자기 트렁크에서 쇠뭉치가 들어 있는 버선짝을 꺼내 영민의 너저분한 옷가지를 싼 보따리 밑에다 살그머니 쓸어 넣으면서

「상이군인의 보따리는 조사하지 않을테니 그리 아시고 풀지 마셔요.」

저번 압록강을 건늘 적에는 사과 광우리 속에 넣어 가지고 온 아버지의 유물이었다. 위험할 것 같아서 혜경이에게라도 맡겨 두고 올까 하였으나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도 아닐 뿐더러 앞길의 운명을 예측할 바 없는 운 옥으로서는 넘다넘다 정녕 못 넘을 최후의 곤경에 부닥치는 날, 이 너무도 삭막한 사바로부터 자기 일신을 적당히 처리하는 데도 이 귀중한 유물은 운 옥이에게 절대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은 뭣 때문에……」

가지고 댕기느냐고, 영민이가 눈으로 물었을 때, 운옥은 입 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영민씨의 친구인 장 선생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음 ──」

영민은 깊은 감격의 신음을 하면서 운옥에게서 얻어 들은 조무장 「용궁」

의, 하룻밤의 모험을 연상하는 것이다.

장 일수의 소식도 반가웠고 나미에의 소식도 처량하였다. 그러나 영민은 그러한 모든 극적인 사건의 전개 보다도 한층 더 마음 속으로 놀란 것은 인간 허 운옥이의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부드럽고 연약한 외면 속에 내포된 힘줄 같은 의지력 ── 마음의 고향인 내 조국을 위하여 마음의 등대인 내 지아비를 위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받쳐 온 일편단심의 여인 허 운옥의 가치를 영민은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 운옥이가 갖지 못한 가치를 유경이가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유경이 갖지 못한 가치를 운옥이는 갖고 있는 것이다.

오 유경의 인생이 오 유경이의 생활도 속에서 실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 운옥의 인생은 역시 허 운옥의 생활도 속에서 밖에 더 형성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모두가 행복을 찾는 길이 저마다 다르다.

오늘의 이 기나긴 이야기로서 형성된 이러한 비극은 오로지 허 운옥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세계에서 뛰쳐 나온 소년 백 영민의 가치 판단이 유치하였던 것과, 또 하나는 이성에의 갈망 보다도 좀더 강렬히 불타오른 이상에 의 갈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영민은 이미 옛날의 영민은 아니었다. 운옥에게 대하여 잠자고 있던 애정이 눈을 떴다.

운옥에게 대하여 눈감고 있던 가치에의 인식이 영민의 게으름을 맹렬히 채찍질 하였다.

「내가 대체 무엇이길래 운옥의 이 거룩한 일편단심을 진흙 발로 문질러 버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

캄캄한 압록강 철교를 건느면서 영민은 운옥이 앞에

「운옥이, 감사하오!」

영민은 마음속으로 여러번 그것을 되풀이 하였다.

2[편집]

그러나 영민은 이윽고 운옥만을 생각하고 있을수 없는 자기 자신의 현실적 위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영민은 신경을 떠나기 직전에 유경이와의 관계를 죄다 운옥이에게 이야기 하였다.

「그러신 줄 이미 다 짐작 했어요.」

그러나 그래서 좋았다는 말이 물론 운옥의 입에서 나올 리는 만무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운옥은 그것이 그르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운옥은 그저 잠자코 영민과 함께 눈물의 하룻밤을 가졌을 따름이다.

이등변(二等邊)삼각형의 정각(頂角)은 언제나 꼭 같은 거리 안에 두 개의 저각(底角)을 가지고 있다. 그 정각에 위치한 백 영민은 한편 쪽 저각에 허운옥을 발견하는 동시에 다른 한쪽 저각에 오 유경을 발견하고 점점 고민의 도가니 속으로 끌리어 들어 가고 있었다.

「유경은, 유경은 어디로 갔나?」

운옥의 일편단심이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동안 희박해 졌던 유경의 이메지가 점점 영민의 감각 속에서 소생하여 갔다.

「그렇다. 유경을 찾아야 한다! 유경을 만나야 한다!」

유경이가 영민을 버렸건 안 버렸건 간에 영민으로서는 유경을 찾아야만 하였다. 전 세계를 편답하여서라도 유경을 찾아 내야만 하였다. 운옥을 발견했기 때문에 유경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다. 유경을 찾아 내고 안 찾아 내고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二[이]등변 삼각형의 정각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똑같은 거리의 두 개의 직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아, 유경이!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운옥이 앞에서 유경을 찾는 것이 죄악 같기도 하였다. 유경을 두고 운옥과 같이 있는 것이 죄악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민으로선 운옥이 앞에서 유경을 찾지 않아선 아니 되었고 유경이 앞에서 운옥을 찾지 않아서도 아니 되었다. 이리 굴러도 二[이]등변 삼각형이요 저리 굴러도 二[이]등변 삼각형이다. 엎어지나 자빠지나 이등변 삼각형의 정각은 언제든지 두 개의 저각과의 사이에 똑같은 거리를 가지는 것이다. 바로 그 정점에 선 백 영민의 비극은 여기서 그의 자태를 선명하게 나타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니, 아무리 세어 보고 재어 보고 하여도 그것은 불행히도 부등변(不等邊) 삼각형은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허느냐? ── 아니다. 어떻거는 것이 아니다. 어떻걸 수가 없는 것이다. 二[이]등변 삼각형의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민의 옆에 운옥은 있어야 하였고 영민의 옆에 유경은 있어야 하였다.

「아아 ──」

영민의 오뇌는 기차 바퀴의 회전과 함께 점점 커지어 갔다.

「괴로우면 누실까요?」

운옥은 가만히 영민의 몸에 손을 댔다.

「아 아니요. 괴롭긴……」

신경을 떠날 때는 어서어서 탑골동으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운옥을 보이겠다고 그처럼 서둘러 대던 영민의 상기된 얼굴빛이 점점 침울해 지는 것 같아서 운옥은 마음이 아프다.

「너무 괴로워 하시지 마세요. 저는 단지 영민씨를 한번만 만나 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그 외에는 아무런 욕망도 없어요. 지금 곧 저는 제 길을 찾아 가도 좋을 것이지만 이처럼 불편하신 몸으로 어떻게 혼자서 탑골동까지…… 그리고 오랫동안 뵈옵지 못한 늙으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한번 뵈옵고…… 그 밖에는, 그 밖에는 아무런 욕망도 제게는 없어요.」

「잘 알겠소. 운옥이의 마음을 잘 알겠소.」

후우 하고 영민은 긴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운옥은 신이 아닌 동시에 운옥은 또한 하나의 기계가 아닐 것이다. 말은 비록 점잖고 조용하였으나 운옥의 마음을 모를 영민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관헌의 눈을 피하는 몸 어떻게 영민씨의 곁에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을 수가 있겠어요?」

「운옥이!」

「조금도 마음 괴롭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그 유경이라는 사람을 길이, 길이……」

운옥은 어이하여 그처럼 말 끝을 못 맺느뇨?…… 그대의 눈에서는 어이하여 그처럼 눈물이 흐르느뇨? ──

「영민씨가 마음 편하시면 저도 마음이 편하고 영민씨가 행복하시면 저도 따라서 행복하지요. 부디 마음 고생 덜으셔서 길이, 길이 행복을……」

「운옥이,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요! 운옥은, 운옥은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내 옆을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운옥이가 내 옆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어떠한 형식의 행복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흥분하시면 몸에 해로우실 텐데……」

운옥은 진심으로 영민의 건강을 걱정하였다.

3[편집]

五[오]년 전의 영민이와는 영민이가 달라 졌다. 이렇다 할 한 사람의 이성의 대상도 없이 五[오]년 전의 영민은 운옥의 순정을 배반 하였었다. 그러나 오늘의 영민은 오 유경이라는, 소생까지 가진 하나의 떳떳한 현실적 대상이 있는 몸이건만 운옥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영민이가 현실적으로 자기의 생을 유지하려거든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 주위에 유경의 행복한 삶을 발견해야만 되는 동시에 운옥의 또한 행복한 삶을 발견해야만 되었다. 그 어느 하나만의 존립(存立)을 영민의 감정으로서, 또한 영민의 가치 판단으로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떻거느냐? ──」

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유경을 취하느냐? 운옥을 취하느냐? ──」

하는, 그러한 취사 선택을 의미하는 속세적인,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에 있어서의 영민의, 정신적이고 또한 육체적인 삶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면 그는 두 사람의 여인을 다 함께 필요로 하였다. 오 유경의 존재를 망각하고는 한시도 그의 생리적인 철학적인 생을 영위할 수가 없는 동시에 허운옥의 존재를 무시하고도 그의 삶은 도저히 유지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 어떤 커다란 운명이 그의 앞 길을 개척해 주지 않는 이상 현재의 영민으로서는 자기 자신의 노력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인생의 함정 속에서 영원히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유경이라는 사람은 혜경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나요?」

벌써부터 품고 오던 하나의 의문을 풀고저 운옥은 영민에게 그것을 물었다.

「아니요.」

운옥의 생각으로선 혜경이가 꼭 유경이었다. 안경을 썼다는 사실도 그러하였거니와 금동이의 성이 오가라고 하던 사실, 서울 시내에 대궐같은 친정이 있다던 사실, 학병 출정의 보도가 있은 날 아침, 자기 보다 못지 않게 당황해 하던 사실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운옥에게는 혜경이가 꼭 유경이로 만 생각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을 명확히 풀어 준 하나의 조그만 사실이 일어났던 것이니, 그것은 일로 평양을 향하여 달리고 있던 밤 열차가 신의주 역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지금 몇시나 됐을까?……」

태엽 틀어 주는 것을 잊어 영민의 닉켈 팔뚝 시계가 멎었을 때였다.

「아, 잠깐 계셔요.」

운옥은 얼른 자기 트렁크를 열고 명주 손수건에 정성 들여 싸 갖고 있던 푸라치나 사각형의 손목 시계를 끄집어 냈다.

「오전 한 시 二十[이십]분이야요.」

「………?」

영민은 대답대신 운옥의 손에서 그 너무나 낯 익은 사각형의 조그만 손목 시계를 받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가 후딱 얼굴을 들어 운옥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시계, 어디서 샀소?」

「산 것이 아니구 동무한테 빌린 거야요.」

「동무…… 그 동무 지금 어디 있소? 이름이 뭣이라고 하였소?」

「서울에 있어요……혜경이라구 불러요…… 저번에 잠깐 이야기 한 바루 그 금동이라는 애의 어머니야요……저를 준길이의 손으로부터 구해 준 그 산모……」

운옥은 거기까지 간신히 말을 잇고 나서는 그만 자기의 그 무서운 의혹이 너무나 분명히 들어 맞은 사실을 눈 앞에 보고

「아아, 혜경이, 혜경이!」

하고, 부르짖으며 두 손으로 탁 얼굴을 가리우고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오오 ──」

영민은 후딱 눈을 감고 시계를 잡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하늘이여, 신이여! 저는 아직껏 하늘을 모욕하고 신을 모독한 일이 없사온데 어찌하여 이처럼도 가혹한 운명의 길을 저로 하여금 걷게 하나이까 ?……이것이 허 운옥의 순정을 배반한 벌이오니까?……이것이 늙으신 부모님의 기갈을 저바린 댓가입니까? ──」

영민은 하늘이 무서워 지고 신이 두려워 졌다. 이 절경에 가까운 기구한 운명의 길을 인간 백 영민은 과연 어떠한 노력으로서 뚫고 나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