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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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을 열심히 세자[편집]

1[편집]

영실이 어멈은 팔자두 「 좋지. 서울서 사위가 환갑상을 채려 가지구 온다면서?」

「그렇게 말하지요. 늙으막 팔자가 좋으나 봐요. 딸 덕, 사위 덕을 얼마나 보게? 영실이가 시집간 후부터는 그래두 더벅머리들이 배는 곯지 않으니……」

「정말은 영실이가 착실해서 그렇지. 준길이야 뭐 볼 나위 있나? 헌병인지 뭔지가 돼가지구 돈푼이나 벌어 들인다니까 말이지, 알구 보면 망나니 자식이 지 뭐야요. 어렸을 때부터 물 긷는 색시의 물동이에 돌팔매질이나 하구 믿지도 않는 예수를 믿는척 하구 동리 처녀의 치마 귀나 잘 잡구……」

「지금은 헌병은 그만 두고 뭐 순산지 형산지가 됐대요. 걸핏하면 사람 잘 잡아 넣기루 이름 났다는데요.」

「아, 다른건 그만 두고라두 앞탑골 영민일 못봐? 영민이가 병정에 붓 잡혀간 것이 누구 때문이게 그래? 다 그녀석 때문인데……」

태극령 샘터에서 동리 여편네 하나를 상대로 윤 영실이의 남편이 된 박 준길을 시비하는 개똥 할머니였다.

「참, 운옥인 지금 어디 가 있는지, 그것두 모다 준길이 때문이지 뭐야요.」

여편네가 옛말 삼아 운옥을 생각한다.

「운옥이두 애가 얌전했지만 지금 들어 온 서울 색시두 아주 얌전한 애야.」

개똥 할머니는 벌써부터 유경이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요. 대학교를 댕겼다는데 글쎄 논밭에두 다 따라 댕긴다니……」

「글쎄 말이야. 백 초시는 절대루 논밭에 내보내지 않는 다는데 글쎄 그 애가 어머니를 따라서 한사코 나간대지 않아? 일이야 잘 하건 못 하건 간에 서울서 곱게 자랐다는 애가……」

「그 댁두 며느리 복은 있는 댁이야요.」

「있다 마다! 영감 노친네가 그만 홀딱 반해서 금을 주고도 못 살 며느리가 글쎄 제 발로 굴러 들어 왔다구 하면서, 이즘은 운옥의 말은 손톱만치도입 밖에 내지 않는데 뭘.」

결혼식도 없이 어린애를 낳아 가지고 떠들어 온 유경을 처음에는 모두들 흰 눈으로 바라보던 동리 여편네들도 인제는 유경에 대한 인식이 점점 달라져 갔다 백 초시 내외가 . 유경에게 홀딱 반해 버린 사실을 동리 사람들은 주저없이 당연한 일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니, 거기에는 실로 온갖 허세를 저바리고 땅위 하늘아래 둘도 없는 내 진실한 남편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이 지닐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은, 인간 오 유경의 눈물 겨운 노력이 숨어 있었다.

「무엇이던지 못 하리! 무엇이던지 못하리!」

영민에게 준 자기의 가혹했던 학대를 뉘우치며 미친듯이 부르짖은 자기의 이 한 마디를 오 유경은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노력 없는 사랑은 가치가 없읍니다. 유경이, 노력하는 인간이 됩시다.

네?」

영민의 그 진실한 한 마디를 유경은 오늘날처럼 절실하게 느껴 본 적은 없다.

「영민씨, 좋은 말을 알으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경이도 노력하는 사람이 되려 하오니 영민씨, 제발 몸조심하셔서, 무사히 돌아 오소서!」

이른 아침 태극령 고개 넘어로 동천이 붉어 온다.

지나간 날, 운옥이가 항상 그러고 앉았던 바로 그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유경은 아침 밥을 잦히는 것이다. 곱게 자란 대갓집 딸이라 사양을 하여 어머니는 부엌 출입을 한사코 만류했으나 유경인 유경이 대로 또 한사코 부엌에 나왔다.

「옛날 같으면 하인두 부리구 살았건만……」

이 어진 어머니는 미안한 김에 옛날 살던 타령만 되풀이하였다.

2[편집]

밥 짓는 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 두 번 태워 보고 나서는 제법 끈기 있는 밥을 유경은 지었다. 서울 집처럼 식찬이 복잡하지 않아 요리 솜씨에 궁핍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된장 고추장을 적당히 풀어서 푸성귀를 끊이면 되었다.

부엌 문 밖 토방에서 약탕관이 보글보글 끓어 오른다. 삼귀용탕(蔘歸葺湯)의 향그러운 냄새가 맑은 아침 공기 속에서 풍치있게 흘렀다. 오 창윤이가 서울서 지어 보낸 보신탕이다.

「옥순아.」

「네? ──」

「약탕관 넘지 않나 잘 지키구 봐라.」

「네.」

옥순이가 약탕관 옆에서 땅콩을 까고 있다. 금동일 업고 송아지를 몰고 나갔던 어머니가 송아지는 풀밭에 매어 두고 채마 밭에서 오이와 옥수수를 한 광우리 따 갖고 들어 왔다.

「아이 할머니, 오늘두 또 옥수술 먹겠네요!」

시골 살림은 옥순이가 제일 기쁘다.

「여기선 강냉이라구 그런단다.」

「아이, 강냉이! 정말 맛 있어!」

홀랑 일어서는 바람에 치맛자락에 한아름 까 놓았던 땅콩이 와르르

「아이머니나, 이를 어쩌나?……」

「하하하, 옥순인 강냉이만 보면 그저 죽지. 매일이라두 먹으려므나.」

「아이, 좋아요! 아가씨, 매일 먹어두 괜찮으시대요.」

「아이, 옥순이두. 너무 까불면 못 써.」

그러면서 유경은 어머니 손에서 광우리를 받았다.

「아이머니나?…… 훠잇! 닭의 새끼들이 강남콩을 물고 가네요! 훠잇, 훠잇 ──」

옥순은 신이 나서 닭을 쫓는다.

꼬꼬닥, 꼬꼬닥, 죽지를 반쯤 펴고 오양간 안으로 쫓겨 들어 가는 닭의 떼를 옥순은 손짓으로 한번 때려 주며

「요놈의 닭들, 요담 두고 봐라! 남 어껀어껀 까논 강남콩을……」

「하, 하, 하, 하……」

어머니도 웃고 유경이도 웃었다.

「야아, 그런데 강남콩이 뭐냐?」

어머니가 묻는다.

「여기선 땅콩이라구 그러지만 서울선 강남콩이라 하는 데요.」

「그래? 거 같은 조선 사람끼리두 모를 말이 많구나.」

손주를 업고 있는 것만 해도 무한한 행복인데 옥순이의 재롱이 더한층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다.

「금동이, 젖 좀 먹어야겠다.」

「네.」

유경은 금동일 받아 젖꼭지를 물리고 어머니는 광우리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 갔다.

이윽고 유경은 약을 짜 가지고 사랑방으로 들어 갔다.

「약 잡수셔요.」

자리에 누워 있던 백 초시가 갱신을 하며

「오냐.」

백 초시는 약을 쭉 들이키고 나서

「너 여기 와서 얼굴이 좀 못쓰게 된것 같구나. 몸이 고단하지나 않느냐?」

「아니요.」

화장을 잊어 버린 유경의 얼굴이 거센 햇볕에 보라색처럼 타 있었다. 도리어 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은 얼굴이건만 백 초시의 배념으로선 고된 시골 살림에 무척 까칠해 보였다.

「어디 금동일 한번 안아 볼까?」

「오줌 받으심 어떻거실려구……」

「어디 이리 좀 오너라.」

백 초시는 자리에 일어나 앉으며 두 손을 벌렸다.

「금동아 할아버지께서 오라신다. 기쁘지?」

유경은 금동일 백 초시의 손 위에 가만히 올려 놓았다.

「어디 한번 웃어 보자. 쯧쯧쯧, 쯧쯧쯧……」

그러나 금동이는 웃으라는 웃음은 웃지않고 너울거리는 두 손이 백 초시 영감의 수염을 잡아 댕겼다.

「아이, 저 금동이 봐?」

「어, 허허허, 이놈 봐라? 내가 너를 웃겨 보자는 것이 도리어 네가 나를 웃기는 구나! 어, 허허허……」

백 초시에게도 지극히 평화스러운 아침이 되었다.

3[편집]

그날 저녁, 어머니는 금동일 업고 옥순일 데리고 이웃에 마실을 갔다. 유경은 뜰 아랫방…… 옛날 운옥이가 쓰던 토방에 멍석을 깔고 모기 쑥을 피우면서 옥수수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앞채 지붕 마루에 핀 하얀 박꽃이 소복한 여인처럼 저녁 바람 속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박꽃이 너울거리는 저편 밤 하늘에 잔 별들이 총총하다.

「이상한 인연이다.」

한때는 아버지의 정열을 독차지 하였던 춘심이 아니, 박 분이가 이 탑골동 태생인 것도 이상한 인연이지만 그 박 분이의 오빠인 박 준길이가 애국가를 부르고 돌아 오는 길에 운옥을 겁탈하려다가 도리어 운옥의 은장도로 말미암아 애꾸눈이 되었다고 ── 옛말처럼 이야기 하는 영민의 어머니의 말을 듣던 순간, 유경은 후딱 금순 언니를 생각 하였다.

「금순 언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때 금순 언니를 붙들려고 하던 그 헌병 보조원은 분명히 애꾸눈이었다!」

그렇다. 그때의 그 애꾸눈이가 바로 춘심이의 오빠 박 준길이었던 것을 유경은 주저없이 단정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집을 나간 허 운옥과 자기를 진심으로 간호해 준홍 금순이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단정해도 좋을 또 몇 가지의 기억을 유경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향이 평안도 어느 시골이라는 말을 금순 언니는 하였었고 그때 부른 그 애국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장가처럼 알으켜 준 노래라 하였었고, 아니 그 보다도 좀더 정확한 기억은 금동이를 낳은 이튿날 아침, 학도병이 출정하게 되었다는 보도가 신문에 발표 되었을 때, 금순 언니는 자기 보다 못지 않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사실, 결혼한 적이 있느냐고 유경이가 물어 보았을 때 결혼을 했었는지 않 했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한 사실, 그리고 지나간 정월 二十[이십]일 아침 고향 사람 하나가 학도병으로 출정한다고 하면서 부랴부랴 경성역으로 달려 가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홍 금순이가 바로 허 운옥이 그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게 된 어제 오늘의 오 유경이었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이 대체 이 지구 위에 존재할 수가 있을 것인가?

─」

눈으로는 좀체로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가혹한 운명의 쳇바퀴 안에서 맴돌고 또 맴도는 한 마리 조그만 개미의 운명을 유경은 생각한다.

「언니, 금순 언니! 내 짧은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내 존경하고 사랑하는 금순 언니! 언니가 정말로 이 집을 나간 허 운옥이라는 사람입니까? 언니, 입을 열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내 귀에 똑똑히 타일러 주세요, 언니는, 절대로 절대로 허 운옥이가 아니죠? ── 언니는 절대로 허 운옥이여서는 아니 돼요!」

이미 그것을 단정해 버린 유경이었으나 그것을 끝끝내 유경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믿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것은 유경을 아니, 유경을 둘러 싸고 있는 뭇 인간을 파멸의 구렁지로 몰아넣는 무서운 계기를 형성할는지 몰랐다. 그래서 운옥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을 유경은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금순 언니를 직접 만나서 금순 언니의 입으로부터 이 비극의 사실을 확인 받는 순간까지 유경은 아무런 것도 믿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입을 악물고 유경은 매일 매일을 노력하는 것이다. 이 커다란 비극을 너무도 무서워 하였기 때문에 유경은 온전한 사고력을 갖지 못한 처지를 부러워 하였다.

「비극은 아직 닥쳐 오지 않았다. 나는 미리부터 비극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4[편집]

「그렇다. 비극 정체가 나를 찾아 오는 그 순간까지 나는 열심히 영민을 생각하면 그만이다. 열심히 사랑하자! 열심히 노력하자! 불길이 나를 찾기 전에 행복을 노래하자! ── 아아, 박꽃이 너울거리는구나, 하늘의 별을 유심히 세자!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어린애들은 별을 셀 때 왜 자기도 함께 셀까요?…… 그이가 뭐라고 하던가?……무척 까다로운 설명을 했었는데…… 옳지, 옳아! 그이는 굵다란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경씨, 하고 정답게 부르며, 그것은 결국 자연의 어여쁨을 감상하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캄캄한 하늘에 무수히 나타난 별들, 푸른 별, 붉은 별, 하얀 별, 초록 별들을 어린애들은 즐겨 세지만 그 별을 세는 주체인 자기를 무시하고 별만을 세라면 단 스물도 세기 전에 실증이 날 것이요.

그러니까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나 넷, 별 다섯 나 다섯, 별 여섯 나……」

유경이가 신이 나서 별을 세고 있을 때, 마중을 나갔던 어머니와 옥순이가 허벙지벙 대문을 들어섰다.

「아가씨, 서울 댁에서 편지가 왔어요.」

옥순이가 유경이에게 편지 한 장을 내주었다.

「아까 저녁 무렵에 온 거라구 재 넘어 놀러 갔던 막동이가 가져 오던데.」

어머니의 말이다.

「네 ──」

방으로 들어 가서 등잔을 켜고 들여다 보니 아버지의 글씨다. 봉투를 떼었다. 편지에는 백 초시 내외분의 문안을 하고 서울 집 사정을 간단히 전한 후에

「……그런즉 과히 걱정 말고 동봉한 백군의 편지를 부모님에게 알리되 과장하여 노인네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하여라. 야전병원에서 곧 후방으로 이송될 것 같다고 하니 회답을 내도 저편에서 받아 보지 못할것 같아서 후일 다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

야전병원이라는 말에 유경은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았다. 종시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하였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손이 떨린다. 떨리는 손으로 이번엔 탁성 야전병원에서 위생병의 대필로 된 일어 편지를 유경은 읽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오 창윤씨에게 온 편지로서, 회양성 전투에서 불행히 명예에 부상을 받고 탁성 야전병원에 입원하여 있다는 사실과 수류탄에 맞아 눈과 다리를 약간 다쳤으나 절대로 염려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과 불일간 후방으로 이송 될것 같으니 회답은 내도 못 받아 볼것 같다는 말과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대필하는 실례를 용서 하라는 말과 이런 사실을 탑골동 양친에게 알리면 필요 이상으로 심로를 할까 염려하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 한 후에 유경인 꼭 서울에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 달라고 예에 의하여 신신 부탁을 한 편지였다.

「눈과 다리를 다쳤다? 불구의 몸이나 되지 않을까?……」

유경은 탁 편지를 접어 놓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병상에서 무섭게 신음하는 실명한 영민의 자태가 뼈아프게 유경의 가슴을 쳤다. 오늘날 영민은 이러한 고통의 구렁지로 쓸어넣은 온갖 책임이 꼭 자기에게 있는것 같아서 유경은 글자 그대로 안절부절을 못하는 것이다.

「야, 무슨 편지냐?」

어머니가 금동일 추켜 올리면서 물었다.

「네, 서울 집에서도 다들 무사하시다구요. 그리고 아버지의 병환이 좀 어떠시냐구요. 약효가 계시기 바란다구, 그저 그런 문안 편지야요.」

유경은 사실을 숨겼다. 서둘러서 보고를 하여 이 어질고 선량한 노인네를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괴롭힐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적당한 기회를 보아 적당한 보고를 유경은 하려는 것이다.

「어머니, 허리 아프실텐데 금동일 내려 놓으세요.」

「음, 젖 좀 먹어야겠다.」

유경은 젖꼭지를 물리며 등잔불을 껐다.

「왜 끄느냐? 켜 놔 두지 않구.」

「불을 켜면 더 더운것 같아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끈 등잔불이다. 유경은 설움에 복받쳐 어둠 속에서 금동이의 조그만 몸둥이를 오그라질 듯이 껴 안았다.

「금, 금동아!」

그러나 금동이는

「으악 ──」

하고 울어대며 어머니의 알뜰안 애정을 무서운 학대로서 받는 것이다.

「오, 금동아, 울지 말아. 아버지한테 가자! 아버지한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