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27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인생의 곡예사[편집]

1[편집]

박 준길의 부음(訃音)을 전하는 전보가 왔을 때, 삼룡은 준길이의 직장인 ×경찰서로 보고를 하는 동시에 곧 그것을 춘심이에게 알리고 춘심은 그것을 최 달근에게 알리었다.

지나간 봄, 준길이는 약간의 실책으로 헌병 보조원을 그만 두고 ×경찰서 형사로 전직을 하였기 때문에 직장을 서로 달리하고 있었다. 부고를 받았을 때, 최 달근은 일도 바빴거니와 준길이의 죽음을 그리 신통하게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물어물 말땜을 해서 춘심을 돌려 보냈다. 그래서 준길이와 같은 직장에 있던 형사 한 사람을 동반하고 춘심은 양친과 함께 그날로 서울을 떠났다.

그랬던 것이 이튼날 아침 최 달근이의 헌병대로 오 창윤의 전화가 걸려왔다. 만사를 제외하고 잠깐만 와 달라는 전화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아현동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박 준길을 죽인 범인이 뜻밖에도 허 운옥이라는 말을 듣고 최 달근은 깜짝 놀랐다.

「허 운옥이란 청량리 밖 애린원에서 나나의 어머니 강 숙희의 임종을 보아 준 홍 금순이가 아닌가! 동시에 그것은 백 영민의……」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오 창윤은 유경이가 상경한 것과 아울러 영민이와의 관계를 쭉 이야기하고 나서

「하여튼 군이 잠깐 내려가 보게. 원래 같으면 내가 몸소 내려 가 봐야겠지만두, 지금 생각이 약간 복잡해 졌어. ─ 어쨌든 백 초시 어른 만은 무사히 빼내 주고 오게. 준길이와의 관계두 있을 법하니 겸사겸사로 군이 내려갔다 오는 것이 좋을 것같애.」

그러면서 오 창윤은 봉투에 들은 편지 한 장을 부탁하며 이것을 영민군에게 「 좀 전해 주게 영민이가 없으면 백 초시 어른이라도 무방하니까 ─」

그래서 부리나케 떠나온 최 달근이었다.

허 운옥이 아니, 홍 금순이에게 대해서는 인상이 깊은 최 달근이다. 더구나 홍 금순이의 그 스노ㆍ볼(눈으로 만든 공)의 이야기는 최 달근의 인생관의 중추(中樞)를 항상 협박하는 악몽(惡夢)과도 같이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홍 금순이가 마침내 박 준길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냐!

주재소 앞에서 버스를 내리자, 그 길로 주재소에 들어 가서 백 초시를 데리고 오는 길에 뒷골 윤 영실의 집에 들렸다가 행패를 부리러 갔다는 삼룡의 뒤를 따라 헐레벌떡 달려 온 최 달근이다.

「백군!」

최 달근은 먼저 영민의 손을 잡았다.

「명예의 상이군인으로서 고향에 돌아와 있다는 말은 이미 서울서 들었네.」

그러나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가친을 위한 군의 노력을 감사히 생각할 따름이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극히 사무적인 한 마디를 영민은 배앝았다.

「그러나 내 가친이 군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 운명적인 현실을 나는 슬퍼할 따름이네.」

영민의 마음은 좀처럼 누그러 질 줄을 몰랐다. 그 말에 최 달근은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군의 심경을 몰라 볼 나도 아니지만, 그러나 어쨌든 나는 군의 옛 동창이야. 서울서 터덜터덜 내려 온 나를 언제까지나 이 마당 한복판에 세워 둘 작정인가? 하하하……」

최 달근은 한 걸음 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한 걸음 뜬다는 것이 수월한 노릇이 아니다. 그만큼 최 달근의 인생은 백 영민의 그것 보다 수가 많았다.

영민은 그만 빙그레 웃으면서

「예의를 몰라 보아 미안하게 됐네. 들어가서 밤새도록 술 추념이나 하여 보세.」

2[편집]

이윽고 뜰 아랫방에서 술좌석이 벌어졌다. 이 술좌석이야 말로 흘러간 중학 시절에는 두 사람이 다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기이한 좌석이다. 꼬마ㆍ신랑 백 영민의 인생에 땅개 최 달근이가 이처럼도 깊숙히 뛰어 들어올 줄 정말 계산 밖의 일이 아닌가.

술잔을 들며 최 달근은 오 창윤의 청으로 부랴부랴 서울을 떠난 이야기를 간단히 하고 나서

「오 선생께서 편지 부탁을 받았는데 아까 주재소에서 나오든 길에 백 선생께 드렸네. 잘은 몰라두 오 선생 따님과의 사정이 약간 복잡한 모양이지?」

그리고 술을 한 잔 쭉 들이키고 나서

「음, 그만하면 괜찮아. 암만 해두 자네는 염복자(艶福者)야. 하하하하……」

달근은 선웃음을 쳤다.

「자아, 술이나 들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구……」

영민도 쭉 들이켰다.

「처음에는 좋아 뵈서 게다짝을 얻었더니 요새는 자꾸만 고무신이 그리워 지네!」

「그게 무슨 뜻인가?」

영민은 물었다.

「이야길 하자고 들면 길어. 자네는 나를 오해라고 있지만 내게 비하면 자네의 인생은 아직도 단순해. 자네처럼 공부를 많이 못해서 학식은 모자란다는 것은 사실이네만 확실히 세상은 내가 더 많이 봤어.」

처음에는 뜸뜸히 돌던 술잔이 점점 속도가 빨라져간다.

「하여튼 자네가 싸움터에서 죽지 않고 돌아 온 것만이 기쁘이!」

영민은 그 말에 후딱 머리를 들었다. 속인들은 곧 잘 마음에 없는 말을 하여 상대편을 기쁘게 한다. 최 달근의 말이 필시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영민은 의외였다.

「나를 싸움터로 끌어 낸 사람이 누구게?……」

「나지, 나야!」

「대통령의 다리를 쏜 것이 누구게?……」

「그것도 나야, 땅개야!」

그리고는

「하하하핫……」

하고 한바탕 웃고 나서 자네 고 놈의 「 , 땅개를 모르나?…… 다리가 짤막하고 귀가 축 늘어진 놈!

조선 사람의 흰 바지 저고리를 한사코 물고 늘어지는……」

「………」

영민의 표정이 긴장을 하며 불현듯 최 달근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 순간

「자아, 백군, 다시 한번 축하주를 드세!」

하고, 발개진 얼굴을 갑자기 엄숙하게 가지며 술잔대신에 주발 두껑을 열어 영민에게 쑥 내밀었다.

「축하주는 또 무슨 축하준가?……」

「지나간 겨울, 자네가 출정을 하는 날 나는 이 탑골동에 와 있어도 축하주 한 잔을 못 권했어! 그러나 오늘은 한 잔 권하고 싶네. 죽지 않고 돌아온 군의 생명의 길이를 위하여! 자아, 받게!」

그것은 분명 야유가 아닌 것 같았다. 양심의 소리가 확실히 그 호탕한 허세 가운데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영민은 받아서 주발 두껑에 철철 넘는 술을 쭉 들이키고 나서

「자네도 한 잔!」

최 달근도 주발 두껑을 들면서

「고마우이, 꼬마! 자네의 주량도 그만하면 상당하네. 자아, 그러면 이번엔 친일파 최 달근, 아니 발발이 땅개가 마실 차례다!」

「좔좔좔 부어진 술을 달근은 마치 일본 사무라이들이 하듯이 두 손으로 벌컥벌컥 들어 마셨다.

「아아, 참말로 상쾌하다! 오늘이야말로 친일파 최 땅개가 탈피(脫皮)를 하는 날이다!」

그러면서 최 달근은 그 어떤 형언할 수 없는 흥분으로 말미암아 부르르 몸을 떨었다.

3[편집]

「그러나 하하하…… 땅개가 탈피를 한들 무엇이 된다는 말이야? 기껏해야 새양쥐가 아니면 토끼새낀가! 하하하하…… 동창을 몰라 보는 직업이 이사파에는 있는 것이야. 그것을 모르는 꼬마의 세계는 아직 좁아. 꼬마가 잘 나서 양심적이고 땅개가 못나서 비양심적인가? 소대가리를 까고 돼지 멱을 따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백 영민이가 그처럼 세상에 대해서 관대했을까? 이유 모를 냉대와 흰 눈동자의 멸시 가운데서 자라난 소년 최 달근의 유일한 기원은 권력의 소유였다. 사람 위에 올라 서자! 모든 것을 출세의 사다리로 생각하자 ! 이리하여 나는 양심을 비웃고 정(情)의 발로(發露)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졌다! 내 편에서 비웃어 보자던 양심이 도리어 나의 행복을 비웃기 시작하였다. 굳세자고 부르짖는 나의 입과는 반대로 나의 마음은 자칫하면 약해졌다. 대통령을 쏘아 쓰러치던 그 순간, 나는 실로 예기치 못했던 피의 항의를 받았다. 더구나 그 어떤 진실한 한 여인으로부터 스노ㆍ볼의 진리를 들은 후부터 나의 세계관은 한층 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보모 홍 금순을 준길이의 손으로부터 놓아 주었다. 결과로 보아선 급기야 백 영민을 싸움터로 끌어 냈으나 그것이 역시 준길이의 눈이 무서웠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동창을 몰라보는 직업이 있다는 한 개의 좋은 견본이기도 하였다. 자아, 꼬마! 분명히 내 앞에서 대답을 하라!

군의 그 눈초리는 항상 나의 인격을 무시해왔고 나의 인생관을 비웃어 왔다! 나는 군처럼 많이 배운 훌륭한 사람은 못된다. 그러나 이때까지 나는 군에게 대한 인생의 부채(負債)는 없다. 대답을 하라! 군의 그 비웃는 듯한 눈초리는 대체 나에게서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 눈초리가 나에게 항의하는 바를 솔직히 말해 주게! 군이 동경유학을 하여 거침없이 대학을 나오는 동안에 나는 만주 벌판에서 관동군의 한낱 끄나불이 되어 밥을 찾아 헤매이었다. 출세의 사다리를 찾아 헤매이었다. 군이 부유한 집 무남독녀와 연애삼매(戀愛三昧)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만주 벌판에 흩어져 있는 매춘부들을 줏어 먹었다. 대답을 하라! 그래 그것이 과연 군이 나의 인생을 얕잡아 보는 유일한 이유인가? ─」

최 달근의 항의는 여기서 끝났다.

「백군, 한잔 더 부어 주게. 나는 오늘처럼 입에 댕기는 술을 아직껏 한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

영민은 묵묵히 술을 따랐다. 그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반감을 영민은 전신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독하던 땅개 최 달근의 소년 시절이 한 줄기 동정의 념을 가지고 영민의 가슴을 쳤다.

영민이가 한낱 애정의 세계 속에서 고민하고 헤매고 있을 무렵에 최 달근은 벌써 이 거치러운 세상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최군!」

하고 영민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불렀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하게! 군이 걷는 길이 결코 안이(安易)한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깨달았네!」

「그렇지. 가장 험준한 길 ─ 자칫하면 가장 추악한 구렁지 속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는 인생의 곡예사(曲藝師)야!」

그리고 최 달근은 약간 침착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백군 땅개 「 , 최 달근의 완전한 탈피는 아직도 먼 장래의 일이야!

이 술 좌석 밖에는 나는 다시금 땅개의 껍질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