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40장
나나
[편집]1
[편집]준혁은 사흘에 한번 닷새에 한번씩 운옥을 찾아 보았다. 신 성호도 가끔 들려서 운옥을 위로하여 주었다.
운옥은 점점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어딘가 마음의 매듭이 한 구멍 뻥 뚫어진 것 같이 보이던 운옥의 허탈한 얼굴에 차츰차츰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선생님, 저도 살 길을 찾을 수가 있을 것같이 생각이 들어요. 제 손으로 제 행복을 찾아 볼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것 같아요.」
운옥은 어떤 날 그런 말을 준혁에게 하였다.
「운옥씨가 그렇게만 생각해 준다면 모든 사람 ── 운옥씨를 둘러 싸고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현재의 운옥씨의 삶을 불우하다고 염려를 하여 주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요.」
김 준혁 박사의 이 한 마디는 실로 그 순간 까지도 허덕이고 있던 운옥의 마음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지시하였다. 자기를 위하여 염려하여 주는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운옥의 눈 앞에 하나씩 하나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김 준혁……신 성호……백 초시 내외 분……혜경이……백 영민……장 일수, 등등 ── 그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운옥은 갑자기 미안해졌다.
「선생님, 정말루, 정말루 좋은 말씀을 하여 주셨읍니다! 운옥은 살아서 여러분의 깊으신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읍니다.」
그 순간 운옥은 「용궁」의 매담 방 월령을 아니, 여간첩 하사가와·나미에를 불현듯 생각하였다. 나미에의 가냘픈 두 어깨가 일본의 운명을 걸머지고 나섰거늘 오늘 날 허 상진의 딸 허 운옥이가 조국의 주춧돌이 못 되라는 법이 있을 리 없었다. 언제까지나 일개 시정인(市井人)의 연연한 애정의 질곡(桎梏) 속에서 한낱 운명의 여인, 불쌍한 운옥으로서 썩어버리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나도 그동안 살 길을 찾아 헤매이던 끝에 내 주위에 있던 여인 하나를 발견했읍니다. 모르긴 모르지만 아마도 그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운옥은 어쩐지 마음의 무게를 약간 덜어 논 것 같았다. 준혁이가 찾는 삶의 대상이 아직까지도 자신이나 아닌가고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선생님, 부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운옥은 한결 기분이 가벼워지면서
「선생님께만 말씀 드리지만 저는……저는 다시 북쪽으로 떠나 보겠읍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그 젊으신 피를 끓게 하던 북쪽 나라, 동생의 뼈가 묻히고 어머님의 영혼이 주무시는 북쪽 나라……거기에는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는 저, 저……」
운옥은 채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잘 압니다. 장 일수 형이 있지요!」
「……네, 에 ──」
운옥씨 잘 생각했읍니다 「 , ! 피가 끓고 열이 용솟음치는 조국애의 권화(權化)인 장형! 운옥씨는 이제야말로 굳세게 살아 나갈 가장 좋은 길을 발견했읍니다! 운옥씨의 앞길을 나는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2
[편집]一九四五[일구사오]년 一[일]월 하순, 니밋츠, 맥아더의 빈번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이 나고 일본 각 도시에 폭격이 시작되고 서울 상공에도 한두 대의 B二十九[이십구]가 떠서 시민들의 마음을 흉흉하게 하던 어떤 일요일 오후였다. 사오 일 동안 호되게 차던 날씨가 탁 풀리면서 봄날처럼 온화한 일기였다.
회기리 쪽에서 청량리 역전 전차 정류장을 향하여 달려오는 버스 안에 나나를 무릎 위에 앉힌 최 달근이가 앉아 있었다. 나나의 손에는 사과 한 개가 쥐여져 있었다.
「아빠, 엄마 한테 매일 갔음 좋겠네.」
「매일?……음, 매일은 갈 수 없구, 인제 추석에나 한번 가 보자.」
「추석이 언젠데?……」
「아직 멀었다.」
엄마 있는데 한번 가 보자고, 나나가 최 달근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꾸만 졸라대는 청을 여태껏 밀어 오던 최 달근이였다. 그러면 최 달근이가 요즈음 와서는 가끔 나나의 엄마를 생각하였고 또 나나의 청이 약간 눈물겨웁기도 해서 인정을 쓰는 셈으로 망우리 강 숙희의 묘를 찾아갔던 최 달근이다.
「아빠, 고아원! 저기 고아원!」
나나는 들창 밖에 흐르는 풍경 속에서 서쪽으로 멀리 솔밭 가운데로 보이는 바락크 하나를 가리켰다.
「아주머니 저기 있어. 금순 아주머니 저기 있어!」
「없다. 그 아주머닌 먼 데로 갔을 꺼다.」
「먼 데가 어딘데?」
「먼 데가 먼 데지. 저어 만주로……」
「아이, 그럼 난 싫어!」
「우리 집에두 아주머니가 있지 않느냐?」
「집에 아주머니는 싫어. 아빠 없을 땐 눈만 흘기는 걸 뭐.」
최 달근의 아내 요시꼬를 나나는 종시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그러한 나나를 처음에는 . 눈을 부릅뜨고 쥐어박아도 보았으나 끝끝내 최 달근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내버려 두고 말았다.
「오바상데·이이노요. 와다시·나 나노·오까아상·낭까니·나리타꾸·나이와! (아주머니가 좋아요. 나는 나나의 엄마는 되구 싶지 않아요.) ──」
요시꼬도 퉁그라 졌다. 그러나 아이를 못 낳는 요시꼬이기 때문에 나나를 귀여워 했으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서 애정의 교류가 원활하지가 못하였다.
「눈을 흘겨?」
「그럼.」
「거짓 말!」
「애개, 누가 거짓 말을 할라구?」
최 달근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다. 요시꼬가 눈을 흘길 것 같지도 않았고 나나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는데 나나가 손을 내저으며
「반자이·반자이! (만세, 만세!) ──」
하고, 고함을 쳤다. 보니, 훈련소로 돌아가는 지원병들의 대오가 지나간다.
「반자이! 다이니뽕·데이고꾸·반자이! (만세! 대일본 제국 만세!) ── 」
하였다.
「거 누구가 알으켜 주던?」
「집의 아주머니가 알으켜 줬지.」
「다이니뽕·대이고꾸가 뭔가?」
「몰라.」
나나는 그때 손벽을 치면서
「갓데 구루조 또·이 사 마시꾸·지 갓데 구니워·데 따까라냐·데 가라다 데즈니·시나로 오까…… (이기고 온다고 용감하게도, 맹세하고 집을 나온 바에야, 공명을 못세우고 죽을까 보냐……) ──」
그러는데 버스가 멎었다. 최 달근이가 나나의 손목을 잡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아, 나리, 어딜 출입했읍니까?」
정류장에 모여 있는 승객 가운데서 박 삼룡의 목소리가 났다.
「아, 박 주사, 오래간만이요. 어딜 가시우?」
「회기리 쪽에 집이 한 채 쓸만한 것이 났다구 해서 보러 가드랬읍니다.
나리, 오랫만인데 어디 들어가서 약주나 한 잔……」
「거 과히 나쁘지 않은 말씀인데……」
나나를 보고
「아 딸 애기 십니까?」
삼룡은 아주 인자스럽게 나나의 머리를 쓸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