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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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신비성[편집]

1[편집]

오랫동안 집안에만 박혀 있던 유경이가 갑자기 두루마기를 줏어 입고 외출을 하였다. 그것은 섣달 그믐이 가까운 어떤 눈오는 날 오후였다.

어딜 갑자기 가느냐고, 걱정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어머니에게

「눈 구경 나가요.」

그말에 어머니는 얼굴을 펴며

「옳지, 좀 나가두 봐야지. 훨훨 좀 싸돌아 다니다 오너라. 곰팡이 쓸을라. ── 왜 양단 두루마기를 입지 않구?」

그러나 그때는 벌써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여학생 적에 입던 검정 세루두루마기다.

아현동 마루턱을 내려 와 서대문 네거리에 유경은 섰다. 눈은 싸락눈 ── 유경이가 제일 좋아하는 눈이다. 세상을 보니 집에서만 썩고 있던 유경이의 마음이 한결 넓어지는 것 같았다.

유경은 하늘을 우러러 싸락눈을 얼굴에 받아 본다. 산뜻 산뜻, 피부 위에서 녹아나는 싸락눈이 감각에 청일(淸逸)하다. 섣달 그믐께, 여유를 잃은 통행인의 조급한 걸음걸이가 유경에게는 부럽다.

「어디를 갈까?」

갈 데가 있어서 나온 유경은 아니다. 이층 난간에서 눈 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여학교 시대에 동무들과 눈 오는 거리를 무턱대고 싸돌아 다니던 생각이 불쑥 났고, 동경서 영민과 함께 산속으로 은좌로 아사쿠사로 역시 무턱대고 싸돌아 다니던 생각이 문득 났다. 이 무턱대고 싸돌아 다닌다는 한개의 관념이 두문불출의 유경의 마음을 이상하게도 황홀하게 유혹을 하였다. 그리고 그 유혹의 맨 끝 마무리를 이루는 최후의 일 점에서 유경은 영민의 환영을 보았던 것이다.

「그이는 손 변호사 사무실에 있지 않은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유경의 발걸음은 마치 그 관철동이 목적지인 것 처럼 광화문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 준혁 병원 앞을 지날 때, 유경은 걸핏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영주의 뒷모양을 보았다.

유경은 준혁을 생각하였다. 요즈음 준혁이가 영주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식을 아버지로부터 한두 번 들은 적이 있는 유경이었다. 그 이상 유경은 영주와 준혁이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고 병원 앞을 지나 종로 네거리에 다달았다.

손 변호사의 사무실은 관철동 광교 다릿목 바로 초입에 있었다. 보오얗게 눈 내리는 다릿목을 유경은 목도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우고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였다. 눈여겨 보는 이가 있었다면 유경이의 행동은 정녕코 정상적이 아니었다. 전부냐, 무냐? ── 를 외치는 유경이가 아닌가. 그 유경이가 손 변호사의 사무실을 마음속 한 구석에서 어이하여 이처럼도 알뜰히 그림 그려 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이를 만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일까?」

그것을 유경 자신도 몰랐다. 의욕과 감정이 보조를 맞추어 주지 않는다.

그러한 균형을 상실한 자기 자신을 유경은 안타까워 하였다. 행동의 거취에 대하여 유경은 완전히 자신을 잃어 버렸다. 가지도 오지도 못했다. 이 순간에 있어서의 오 유경의 유일한 「파이롯트」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개의 우연 밖에 없었다.

유경은 다릿목 전선대 뒤에 몸을 숨기 듯이 하고 손 변호사의 사무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이곳에 서 있는 것일까?──」

유경은 마침내 결심을 하고 전선대 뒤를 떠나서 황금동 쪽으로 걸어갔다.

황금동 네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꺽어져 부청 앞으로 유경은 쓸쓸히 눈길을 걸었다.

「맹랑한 노릇이다!」

유경은 여태껏 이처럼도 맹랑한 행동을 갖어 본 적이 없다.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 유경이었다.

대한문 옆길로 서대문 네거리를 빠져 나갈 셈으로 부청 앞 광장을 유경은 건넜다. 건너 서서 대한문을 지나 골목으로 돌아 서려는데 유경이의 코 앞에서 사나이 하나가 우뚝 막아섰다.

손가방을 들고 우산을 쓰고 재판소에서 돌아오는 영민이었다.

유경은 후딱 머리를 들었다.

「어마 ──?」

2[편집]

탑골동 주재소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나무 다리의 영민을 최후로 본 유경이었다.

「유경이!」

「………」

유경은 가슴이 뭉클하여 대답을 못했다. 유경은 영민이가 무척 반갑기도 했지만 또 어딘가 알 수 없이 무섭기도 하였다. 영민의 손길이 다짜고짜로 자기의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 그만큼 유경은 자기에 대한 영민의 애정의 깊이를 알고 있었다.

영민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유경의 핏기 없는 까칠한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동안 하다가 영민은 외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경의 어깨 위에 앉은 눈을 털어 주었다. 어깨의 눈을 털고 나서

「머리……」

하고 손수건을 가만히 , 유경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유경도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 머리의 눈을 털었다.

눈을 털고 난 손수건은 젖어 있었다. 유경은 공손히 손수건을 접어 영민에게 도로 내 줄려다가 너무 젖어서 그만 자기 주머니에 쓸어 넣고 말았다.

「따라 와요.」

영민은 조용히 유경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유경의 손목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영민의 우산 속으로 끌리어 들어갔다.

부청 앞 광장을 진고개로 향하여 거닐면서 영민은 자동차를 피하느라고 두 번이나 유경의 어깨를 우산 속에서 가만히 껴안았다.

「우산은 왜 안 쓰고 나왔소?」

무척 여위어 보이는 유경의 목덜미를 들여다 보면서 영민은 물었다.

「다리 인젠 괜찮으세요?」

유경은 영민의 상했던 다리를 내려다 보면서 물었다.

한 우산 속에서 두 사람은 또 묵묵히 걸어 가다가

「가방……」

하고 유경은 우산을 잡은 영민의 저편 손에서 배가 통통 부른 가방을 가만히 댕겨 들었다.

「무거운데……」

「무겁긴……」

또 한참 걸어 가다가

「너무 집안에만 들어 앉아 있으면 생각이 좁아 질텐데……」

「아버지가 뭐라구 그러세요?」

「아 ― 니, 뭐라구 그러긴……」

또 좀 걸어 가다가 이번에는 유경이 편에서

「사무실 일, 재미 있어요?」

「재미 있지요. 유경이의 생각을 잊어 버릴 정도로……」

「흐흥 ──」

이번에는 한 서너 걸음 걸어가

「금동인?……」

「젖이 잘 안 나서 연유를 사다 먹여요.」

「아빠가 없어두 애가 자랄까?」

「엄마가 없어두 애는 자란대요.」

이번에는 상당히 오랜 거리를 잠자코 걷다가

「글쎄 감기 걸릴 줄 모르고 우산두 안 쓰고 나와요?……엄마가 됐으니 이젠 여학생 취미는 버려야지.」

「손수건으로 털어 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구요.」

영민은 한 손으로 유경이의 허리를 꼭 껴안아 준다.

「두 사람이 다 우산을 갖구 나옴 어떻게 이처럼 한 우산으로 걸어요?」

3[편집]

진고개 어떤 조그만 중국 요정에서 저녁을 먹으며

「좀더 먹어요.」

「그만 먹을래요.」

유경은 조용히 입을 씻으면서

「제가 영민씨를 이처럼 좋아하고 영민씨가 저를 이처럼 좋아하는데……」

「좋아 하면 됐지, 다른 걸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러면서 영민은 유경의 파리한 모습을 애처럽게 바라보았다.

「좋아는 하지만……서로 서로가 다 똑같이 좋아는 하지만……그래도 영민 씨가 금순 언니를 아니, 운옥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잊어 버리지 못하는 한…… 저희들의 결혼 생활은 암만 생각해두, 행복할것 같지가 않은걸요, 뭐.」

막상 영민을 눈 앞에 만나 놓고 보니 집에서 생각 하더 것과는 딴판으로 유경의 마음이 약해 지는 것이다. 말 끝이 설움에 막혀 자꾸만 떨린다.

「그러나 유경이!」

영민은 열심히 유경을 쳐다보며

「운옥은 불쌍하지만……그렇다고 우리들의 결혼이 반드시 불행할 것이라고는……」

「나도 처음에는 순수한 행복……아무런 것도 단념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행복,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순수한 행복만을 바랬어요. 그러나 요새 와서는 그것이 얼마나 힘 드는 일인지가 차츰차츰 알아졌어요. 그래서 마음을 넓게 먹구 순수하지는 못하지만 현실과 약간의 타협을 해서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 마음에 흡족하지는 못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정도의 행복을 찾아 볼려구도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요. 운옥이의 존재가 불쌍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도 서로가 안타깝게 좋아하는 우리들이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없지 않어요?」

「네, 저두 그렇게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나, 그러나 영민씨의 가슴 한복판에 불행한 운옥씨의 그림자가 항상 떠나지 않는 한……그리구 그것은 또한 제 입장에서두 마찬가지예요 . 나는 운옥씨 아니, 내가 신뢰하고 내가 그처럼 좋아하는 금순 언니의 불행한 삶을 항상 신변에 느끼면서도 영민씨와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인도할 수가 없을건만 같아요. 영민씨에게 인간성이 필요하다면 제게두 고만한 인간성은 필요할것 같아요.」

「후우 ──」

하고, 영민은 긴 한숨을 지었다. 유경이의 말이 똑 맞았다. 운옥이의 불행한 삶이 이 세상에 있는 한, 영민과 유경의 행복한 결혼은 성립되지가 않는 것이다.

유경은 그때 풀기 없는 어조로 다시 뒤를 이어

「그러니까 결국, 서로가 다 안타깝구, 괴롭구, 쓸쓸하지만 지금 곧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예요. 현재로서는 영민씨의 마음이 아무리 견고하게, 저만을 귀여워 해줄 수 있더라도 언제 어느 때 또 운옥씨가 불쑥 영민씨의 눈 앞에 나타날런지 모르니까요. 그때는 영민씨의 마음이 또 격심한 동요를 가지게 될 것이니까요」

유경은 쓸쓸한 미소를 입 가에 지으면서 영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제가 그러한 영민씨를 나쁘다는 건 정녕 아니에요. 아니, 도리어 그러한 영민씨의 인간성을 존경해요.」

4[편집]

「그러나 그것은 결코 유경을 사모하는 애정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마찬가질 꺼야요. 금순 언니가 남성이라면 모르지만 그이가 여성인 이상, 그리고 또 금순 언니가 영민 씨에게서 원하는 것이 영민씨의 애정일진대, 그리고 또 영민씨가 금순 언니의 원하는 바를 어떠한 동기에서든지, 애정으로서든지 인간성으로서든지 수긍을 한다면 결국에 있어서 저희들의 결혼 생활은 시초부터 하나의 커다란 파란을 내포하게 되니까요.」

유경의 감성과 지성이 이상적 조합(調合)을 형성하면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영롱한 논조에 영민은 그만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저희들에게도 단 하나의 희망은 있을것 같아요.」

그말에 영민은 숙였던 머리를 후딱 들며 조급하게 물었다.

「무엇이요! 단 하나의 그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빨리 말해 보아요!」

유경은 그때 영민의 초조한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들여다 보고 앉았다가 하나의 우연이 「 우리를 구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지요.」

「우연이라고요? ──」

「그래요. 우리 두 사람 이외의 그 어떤 외부적(外部的)인 원인이 금순 언니의 삶을 현재의 불행 속에서 구해줄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시간의 흐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러한 우연이 영영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민씨, 그것은 너무도 가혹한 생각이예요! 그런……그런 부질 없는 질문을 해서 저를……저를 또 울리지 마세요!」

유경은 핑 도는 눈시울의 뜨거움을 감출 셈으로 창 밖으로 얼른 얼굴을 돌리며

「눈 그냥 와요. 함박 눈이 됐어요.」

유경은 조용히 걸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제 돌아 가요.」

두 사람은 벙어리가 된채 어둑어둑한 행길로 나서서

「바쁘실텐데, 어서 돌아 가세요.」

「유경이? ──」

「난 좀더 걷겠어요.」

「나두……」

두 사람은 다시금 한 우산 속의 사람이 되어 소복소복 내리는 함박 눈을 밟고 진고개 입구로 빠져 나와 황금동을 향하여 걷는다.

「금동이 울지 않을까?」

「다리 피곤하지 않으세요?」

황금동 네거리까지 와서 영민은

「부청 앞으로 빠져야 되지 않아요.」

「희망이라는 건 참으로 좋은 거야요.」

광교 다릿목까지 와서 유경은

「인제 들어 가세요.」

「………」

영민은 묵묵히 광교 다리를 그대로 지나 종로 네거리까지 와서

「유경이 손이 차요.」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덥대요.」

광화문 네거리에 와서

「기미꼬, 아직두 여관에 있을지두 몰라?」

「기미꼬?」

「건망증? 아다미 여관의 기미꼬를 잊으셨나 봐?」

「아, ── 저 악마의 방!」

「후흣 ──」

동양 극장 앞까지 와서

「통 외출을 않고 서재에 들어 앉아서 수도(修道)를 한다는 양반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뛰어 나왔을까?」

「후흣 ──」

웃음을 깨물며

「아마도 속(俗)된 바람이 불었나 봐요. 광교 다릿목이 그리워져서……」

서대문 네거리까지 와서

「인제 돌아 가세요.」

「우산……」

「니 ― 드·낱! (필요 없어) ──」

헤어질 때 유경은 영민의 젖은 손수건 대신, 가장사리에 레 ― 스가 달린 손수건 하나를 영민의 외투주머니 속에 살그머니 넣어 주었다.

「뒤를 돌아보지 말것!」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두 사람은 눈오는 거리를 남북으로 갈라저 갔다. 마치 돌을 던진 못가의 파문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점점 평온해 져 가는 것 처럼 ── 영민은 四[사], 五[오]간 길이를 묵묵히 걸어 가다가 후딱 뒤를 돌아다 보았다. 뒤를 돌아보지 말자던 유경이가 아현동 마루턱으로 올라가는 골목 어구에 우두커니 서서 이편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유경이의 손길이 나불나불 춤을 춘다. 영민도 가방 쥔 손을 힘껏 쳐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