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8장
행복의 순수론
[편집]1
[편집]법률의 목적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다면 도덕의 그것은 마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다 법의존엄성은 . 형식적으로는 국가 권력에 의존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법을 운용하는 법관에게 있다는 사실을 영민은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백 영민이가 법과를 지망하여 현재 변호사 수업을 하게 된 시초의 동기가 민중으로 하여금 도덕률에 선행(先行)하는 법률적 양심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데 있었다.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백성이라야만 고도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自律的)인 도덕율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약육강식의 험준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수개월 동안 손 학규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의 실제적인 운영을 보아 온 영민으로서는, 적어도 좋은 법관이 될려면 소위 법률적인 양심만을 가지고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법률적 양심과 도덕적 양심을 아울러 지닌 사람이야 좋은 법관, 좋은 운영자가 될 수 있음을 절실히 보았다. 이 법률적 양심이라는 한 마디 가운데는 실로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내포라고 있었던 것이니, 법망에만 걸리지 안는다면 모두가 다 양심적이라는, 소위 최 달근식의 해석이 있을 수 있었고 또한 그런 종류의 법관 내지 변호사가 자기 주위에 수두룩하니 있는 사실을 영민은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배 손 학규 변호사는 절대 그러한 부류의 위인이 아니었다. 법의 정신을 무시하고까지 의뢰인의 입장을 변호하지는 않았다. 영민이가 이 선배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점에 있었다.
손 변호사 역시 영민의 진실성을 자랑하였다. 형사소송의 대가인 손 변호사는 五十[오십]에 가까운 중년배로서 오 창윤과도 면식이 많았으나 오 창윤의 그 명예심에 급급한 생활 태도를 심중 얕잡아 보고 있었다.
「사람이란 돈이 생기면 명예욕도 생기는 모양이야.」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곧잘 바둑 친구가 되어 있었다. 영민이가 손 변호사 사무실에 있게 된 후부터 오 창윤은 한층 더 빈번하게 바둑을 두러 왔다.
「백군은 암만 봐두 착실한 젊은이야.」
바둑을 두면서 그런 말을 오 창윤은 은근히 하였다.
「딸 가진 양반은 눈이 빠르오. 벌써 자기 사위 감으로 눈 여겨 보시는 모양이구려.」
손 학규도 녹녹치가 않다.
「글쎄, 그럴지두 모르지.」
능글능글 오 창윤은 넘겨 버리는 것이었다.
영민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재판소 출입을 하였다. 나무 다리도 인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시력과 청각도 회복되었다.
「분주하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일에 열중하고 있으면 영민은 제일 마음이 편하였다. 운욱도 잊을 수가 있었고 유경도 잊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민은 그러한 오 창윤을 통하여 유경이의 심경을 대충 듣고 있었다.
「어쨌던 이것은 시일이 해결할 문제이니까, 백군도 그쯤 생각하고 유경이를 너무 나무래지 말게.」
그런 말을 오 창윤은 하였다.
「고 심악한 것이 요즘 와서는 곧잘 눈물을 흘려.」
그런 말도 하였다.
「금동이두 잘 자라구……저번엔 그만 감기가 덧처서 폐염이 됐어. 한 이삼일 갔지만 유경이가 밤을 꼬박꼬박 새워 가면서…… 모성애란 이상하거든.」
그런 말도 하였다.
2
[편집]유경은 태반 집에 꼭 박혀 있었다. 누구와 만나기도 싫고 누구와 이야기 하기도 싫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하고도 하루 종일 이야기 한 마디 없이 지나는 날이 많았다. 금동이와 옥순이를 상대로 하루 종일 이층 서재에서 살았다. 수도원의 수녀들처럼 유경은 외계(外界)의 온갖 물체와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색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흰저고리 검정 치마 하나로 유경은 한 가을을 지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를 줄 몰랐고 얼굴에 분을 바를 줄 몰랐다.
「넌 정말 수녀가 되려는구나!」
보다 못해 그런 말을 어머니가 하면 오 창윤은 이렇게 말했다.
「내버려 두소. 유경이 마음은 내가 젤루 잘 알아.」
식욕이 없어서 유경은 매양 수저를 들다 말았다. 그래서 원래는 풍부한 젖이지만 금동에게는 차츰차츰 모자라 갔다.
「너 글쎄 어린 것을 봐서라두 끼니는 제대루 먹어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무어 이것 저것 맛있는 음식을 해 놓으면 유경은 그것을 죄다 옥순이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글쎄 너 정말 어쩌자구 그러느냐?」
어머니는 화를 냈고 화를 낸 다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먹구 싶지 않은 걸 그럼 어떻해요, 어머니.」
글쎄 왜 먹구 「 싶지 않느냐? 그래 이 닭찜이 맛이 없어서 그러니?」
「글쎄 맛은 있지만 먹구 싶지 않은 걸요.」
「맛은 있는데 왜 먹구 싶지 않다는 말이냐?」
「글쎄 어머니, 절 좀 그냥 내버려 두어 주세요?
어머니가 그처럼 옆에서 자꾸만 극성을 하니까?
나두 그만 화가 나지 않어요?…… 누구가 어머니더러 닭찜 해 달랬어요?……」
유경은 홱 수저를 놓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 가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유경은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았다. 점심도 건느고 저녁도 건넜다.
어머니는 그만 유경이가 무서워 졌다. 유경이가 청하는 것 이외에 어머니가 딸의 시중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의 배념으로서는 도저히 이 딸을 기쁘게 하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니요? 괘니 쓸데없는 시중을 들어 가지구……」
오 창윤은 마누라를 도리어 나무랬다.
「그앤 어느 바위 틈에서 나온 앤지?…… 나두 닮지 않구 당신두 닮지 않았소. 아마 당신이 나 몰래 어디서 꾸어 온 아인지두 몰라!」
오 창윤은 그런 말을 하여 마누라의 심로를 덜어주었다.
그러다가도
「어머니, 나 쵸코렛, 사다 주세요.」
하는 때가 있었다. 그래 어머니가 신이 나서 물자가 극히 귀한 때라, 화신이나 삼월이나 정자옥 같은 데로 달려 가서 아는 얼굴을 찾아서는 오 창윤의 부인을 내세워 힘들여 사다주면 유경은 그것을 이층 서재에서 옥순이와 흐물흐물 다 녹여 버리곤 하였다.
쵸코렛을 혀 끝으로 녹여 버리면서 유경은 소금 냄새 그윽히 풍기는 지나간 날의 아다미 해안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활찍 같이 굽은 아담한 해안에서 유경이가 백 영민과 함께 쵸코렛을 나누던 사랑의 추억을 알뜰히 더듬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처녀 오 유경은 모든 긍지(矜持)와 온갖 어여쁨과 그리고 성실(誠實)의 전부를 그이에게 바쳤었다! 추호의 허세도 사소한 포 ─ 즈도 없이 오 유경은 그이에게 二十一[이십일]년 동안의 처녀를 고스란이 바쳤던 것이다! 오늘날, 이 오 유경의 사랑 가운데는 모래알 만한 티도 섞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건만 유경은 마침내 행복을 찾지 못하였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현실과 타협하는 데서만 이루울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행복을 그리워하는 순간에, 그리고 행복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행복을 찾고서 하던 유경이에게는 그러한 종류의 행복을 행복이라고 믿기워지지는 도저히 않았다.
오 유경의 눈물은 거기 있었다.
3
[편집]겨울 철에 접어 들면서부터 까칠한 유경의 얼굴에서 핏기라고는 한점도 찾아 보지 못하리만큼 유경의 몸은 수척해 갔다. 젖이 모자라 금동이는 마침내 양젖을 먹이기 시작하였다.
「이 심악한 년아! 금동이가 불쌍하지 않느냐! ─」
유경이가 무서워서 말을 삼가하던 어머니는 인제는 털어놓고 유경을 욕했다.
「글쎄 밥이 먹혀지지 않는걸 어떻게 해요?」
「네 마음이 너무 꽁해서 그렇지, 애 아범이 그처럼 마음을 돌려 가지구 만나러 왔는데, 그래 뭣 때문에 돌려 보내는 거냐? 돌려 보내 놓구는 그래 밤 낯 울기는 또 왜 우는 거냐? ──」
「울긴 누구가 운단 말이야요?」
유경은 삥하니 화를 낸다.
「누구가 모를 줄 알구 그러느냐? 옥순이 한테 다 들었다, 들었어!」
「옥순아, 이리 좀 와!」
「왜요?」
「너 나 우는것 언제 봤어?」
「…………」
유경이의 기세가 무서워 옥순이는 어머니와 유경의 얼굴을 비들기처럼 도록도록 번갈아 쳐다만 본다.
「찰싹!」
하고 유경의 손길이 갔다.
「너 또 쓸데없는 고자질 할테냐?」
「안 해요, 아가씨!」
「이층에 올라 오지 말어!」
「안 올라 가요.」
「애기 업어 안 줘두 좋아!」
그리고는 홱 돌아 서서 이층으로 뛰어 올라 갔다. 층층대를 거지반 다 뛰어 올라 가서부터 유경은 두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워 버렸다.
「아이유, 성미가 고약두 허지!」
어머니는 유경이가 한층 더 무서워 졌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처럼 힘든 일일까?……」
유경은 창 가에 걸상을 끌어다 놓고 저물어 가는 초겨울의 삭막한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현실과 타협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유경은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고 일종의 단념이기 때문이다.
「단념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행복 ── 그것은 내가 바라는 순수한 행복은 아니다. 나는 아무런 것도 단념하는 것 없이 영민을 사랑하고 싶다. 그것이 되지 않는 오늘날, 지금까지 원하고 바라던 나의 행복은 머나먼 수평선 저 넘어로 아낌없이 던져 버려야만 한다!」
영민의 정열에 일시적이나마 분열이 생겼다는 그 사실이 유경이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타협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전부냐? 그렇지 않으면 무다!」
오 창윤에게서 배운 줄 알았던 유경의 인생이, 그리고 二[이]년 동안의 풍랑 속에서 배운 줄 알았던 유경의 인생이 결국에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유경은 결국 본래의 유경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무를 택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행복이냐, 불행이냐? ──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닌 그런 뜨뜻미지근한 범중(凡衆)의 행복은 싫다!」
그러나 과연 유경은 무를 택함으로서 영민을 단념할 수가 없을 것인가? 영민에 대한 연연한 애정을 단념하고 자기를 살리는 길과 자기를 죽임으로써 순수하지는 못하지만 자기의 연정을 살리는 길과 ── 이 두 갈래 십자로(十字路)에서 오 유경은 울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