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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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창조설[편집]

1[편집]

여기는 청량리 밖, 二[이]년 전 겨울 운옥이가 파출부로서 장 일수의 간호를 하여 주던 바로 그 뜰 아랫방이다.

준혁은 먼 친척인 주인 노파에게 그럴듯한 사정을 꾸며 이야기하고 당분간 운옥이의 몸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노파는 마치 시집 갔던 딸이나 온 듯이 운옥을 반겨 마지하며 준혁을 위하여 조반 상에다 약주까지 받쳐서 들여 왔다.

「오랫만에 왔는데 찬이 변변치 않아서……」

「할머니, 미안합니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운옥과 준혁은 인사를 하였다.

「무관할 줄 알구 겸상을 봤는데……」

이 노파는 그전부터 이 얌전한 간호원이 암만해도 준혁이의 배필이 될 것만 같은 눈치여서 일부러 마음 먹고 겸상을 채렸다.

「괜찮습니다. 아주머니!」

「글쎄 어떨까 허구……」

이윽고 두 사람은 조반 상을 끼고 마주 앉았다.

「자아, 시장할텐데 운옥씨 어서……」

「네, 선생님 어서……」

운옥은 두 손으로 공손히 약주를 따랐다.

「선생님, 그 후에도 약주를 많이 잡수셨나요?」

선생님, 약주 많이 잡수지 마시고 몸 건강하시와 세상에 인술을 베푸시기 바라오며 운옥은 갑니다…… ── 매화 한분과 함께 그러한 의미의 편지를 남겨 놓고 사라졌던 운옥이가 지금 손수 약주를 따라 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답이 없이 준혁은

「운옥씨!」

하고 아까 보다는 어지간히 진정된 음성으로 불렀다.

「네 ──」

운옥은 여러가지 의미에 있어서 준혁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산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비해서 운옥씨에게는 몇 갑절이나 괴로웠을 것이요. 운옥씨를 괴롭힌 그 여러 사람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운옥 씨에게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 같읍니다.」

「……………」

「오늘날 운옥씨가 걸어 온 고달픈 과거를 나도 바람 결에 들었고 또 아까 신형에게서도 듣고 깜짝 놀랐읍니다.」

준혁은 따라 놓은 약주 한잔을 조용히 들이킨 후에

「운옥씨를 그처럼 괴롭힌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내가 현재 운옥씨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읍니다.」

「선생님, 어서 식기 전에 진지 드시지요.」

「운옥씨가 떠나간 후, 약 一[일]년 동안을 나는 글자 그대로 캄캄한 하루 하루를 절망과 함께 맞이하였읍니다 . 아무리 찾아도 운옥씨는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운옥씨에 대한 나의 성의가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나에게 대한 운옥씨의 애정이 익(熱[열])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선생님!」

하고 그때 운옥은 수저를 가만히 놓고

「제게는 그때 말씀 드리지 못한 그 어떤 사정이 있었답니다.」

「나도 그것을 후일에 이르러서야 알았읍니다. 백형을 만나서 알았읍니다.

백형이 유경씨의 행방을 찾아 헤매고 있을 무렵, 나는 또 나대로 운옥씨의 행적을 더듬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종시 나는 운옥씨를 찾아 내지 못했읍니다. 아니, 운옥씨는 종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선생님, 용서하세요. 제가……이 변변치 못한 제가 선생님을 괴롭히게 한 것을 용서하여 주세요.」

운옥은 가만히 머리를 숙이며 지나간 날의 김 준혁 박사의 정열을 생각한다.

2[편집]

조반 상을 물리치고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묵묵히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준혁은 후딱 얼굴을 들며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읍니다. 죽을 수 있는 방도를 이것 저것 생각해 보았읍니다. 운옥씨가 온통 나라는 존재를 망각하고 백형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를 못했읍니다. 아니, 죽지를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과연 운옥씨를 사모하는 나의 정열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지요. 죽음으로서 살 길을 찾는다는 말이 내 귀에는 잘 들어 오지가 않아요. 살아서 살 길을 찾는 것이 자기의 인생을 살리는 가장 총명하고 가장 성실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는 길을 찾았읍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운옥씨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던 탓은 아니지요!」

그리고 준혁은 힘찬 어조로

「운옥씨!」

하고 불렀다.

「네 ──」

「삽시다!」

「……………」

「괴로워도 살아 나갑시다! 사노라면 반드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 같은 순정이 없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정조관을 얕잡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으로서 살 길을 찾는다는 것은 관념적으로는 아름답고 소설적으로는 어여쁘지만, 아름답고 어여쁜 것만이 고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준혁의 어조는 점점 더 열을 띠어 갔다.

「운옥씨, 생각을 고칩시다! 어여쁜 것만이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어여쁘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행복을 창조(創造)할 수 있는 인간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아니, 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을 한낱 환경에만 의존(依存)한다는 것은 벌써 낡은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극히 아름답고 예술적이긴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결코 그것 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봉건적인 그러한 한낱 예술가적인 사고방법을 말살합시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냐?……인생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목적은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행복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그 누구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제가 손수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운옥씨의 과거는 한낱 예술품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준혁은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 무릎을 힘 있게 치면서

「운옥씨! 분명히 내 말을 귀담아 들어 두시요! 운옥씨의 행복은 백 초시의 외아들 백 영민이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운옥씨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 있어서의 한개의 허 운옥의 죽음이 그 아무리 주관적으로 감미롭고 객관적으로 아름다워도 그것은 인생의 목적인 생명의 존엄성을 배반한 일개 패배자의 처량한 모습 밖에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운옥씨의 행복은 결코 백 초시의 외아들에게만 있는 것이요, 운옥씨의 행복은 운옥씨가 창조할려고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창조할 수가 있는 것이요! 운옥씨 생명의 계승자(繼承者)인 허 운옥이라는 한개의 생명체(生命體)가 그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류의사(人類意思)의 유린(蹂躪)인 동시에 인류목적(人類目的)의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요! 릴레 경주의 바톤을 받은 선수가 중도에서 그 바톤을 내 던진다는 것은 스포 ─ 츠 정신의 유린인 동시에 스포 ─ 츠 목적의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요. 칠전팔기(七轉八起), 아무리 괴로워도 결승점(決勝點)까지 달려가는데 좀더 깊이를 가진 어여쁨이 있는 것이고 스포 ─ 츠·맨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운옥씨, 삽시다 생명의 결승점 ! , 인생의 고올을 향하여 용감히 살아 나갑시다! ──」

3[편집]

그날 밤 운옥은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피로할 대로 피로한 몸이었으되 밤이 깊을수록 정신은 자꾸만 똑똑해 졌다.

텅 빈인 방이다. 아랫 목엔 장 일수, 윗목엔 허운옥, 환자와 간호원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 미닫이를 사이에 세워놓고 비교적 평온히 지나던 지나간 날의 안일한 생활을 운옥은 회고하는 것이다.

「이 방에 들어 서면 마치 신혼 살림 같아서 아예 인젠 오지 않겠네.」

그런 농담을 하다가 장 일수에게 꾸지람을 듣고 총총히 도망질을 치던 신성호를 생각한다.

그렇다. 그 한 마디가 적어도 표면으로는 극히 평온하던 두 젊은이의 신경을 긁어 쥐기 시작하였다. 보이지 않는 미닫이를 한층 더 굳게 잠그지 않으면 아니 될 만큼 두 사람은 서로 서로를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나의 건강은 이 이상으로 파출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내일부터 운옥씨를 해고하겠읍니다. ──」

「마음이 약하면 큰 일을 못한다구, 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늘 말씀을 하셨답니다. 주무세요. 주무시구 날이 밝으면 마음이 강해질 테니 ──」

그러한 괴로운 대화를 주고 받던 그 한 밤을 운옥은 회상한다.

「참, 장 선생은 지금도 대륙 한 가운데서 총칼 아래를 뛰어 댕기시겠지!」

용궁 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하룻밤의 모험과 전율, 그 무슨 영화에나 나오는 사랑의 아팟출 같은 북경 밤 거리의 황마차의 쾌주(快走) ──

「운옥씨, 나는 운옥씨에게 존경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에게는 운옥 씨의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운옥의 전신을 덮어 누르던 장 일수의 그 야생적인 정열을 회고하는 순간, 운옥은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었다.

「그렇다! 행복을 창조하자! 내 손으로 행복을 만들어 보자!」

주먹으로 무릎을 치면서 외치던 김 준혁 박사의 믿음직한 얼굴이 눈 앞에 운옥은 알알하다.

「운옥의 행복은 백 영민이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운옥씨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요!」

하던, 김 준혁을 생각한다.

자칫하면 영원히 눈 감고 지나갈 뻔한 하나의 광대(廣大)한 세계가 돌연 운옥의 안전에 전개되는 순간이었다. 일편단심, 애정의 좁은 골목 안으로만 기어 들어가던 허 운옥의 발길이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는 순간이다.

「나는 과연 영민씨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나는 지금까지 그이를 얼마만큼 행복하게 하여 주었는가?」

운옥은 마침내 그 점에 생각이 미쳤다. 지금까지 운옥은 그야말로 일편단심으로 영민을 사모하여 왔었다. 허 운옥의 온갖 수난은 오로지 영민을 사모하는 일편단심에서 출발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운옥의 일편단심은 영원의 남편 백 영민에게 과연 무엇을 제공하였는가?…… 허 운옥이가 백 영민에게 그 무엇을 제공하였다면 그것은 오직 불행 밖에 없지 않았느냐? 운옥은 소위 일편단심은 결국에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영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운옥 자신의 행복 추궁에서 더 지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김 준혁 박사가 설파한 것과 마찬가지로 운옥의 생명 속에 잠재해 있는 봉건적인 의식에서 출발한 것밖에 더 무엇이 있다는 말이냐?…… 백초시의 아들이 백 영민이가 아니었었다치더라도 운옥은 그를 영원의 남편으로 모시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4[편집]

운옥은 눈이 번쩍 띠었다.

「내가 진정으로 그이를 위한다면 나는 하루 바삐 그의 존재를 잊어 버려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혜경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와 동시에, 그리고 그리 큰 노력이 없이 운옥의 정열을 차지하여 버린 것은 조국과 생명을 같이 하고 날뛰는 장 일수의 야생적인 모습이었다.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류의 의사를 배반하는 것이다!」

운옥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살자! 살아야 한다!」

오랜 시일을 두고 그 속에서 딩굴고 헤매이던 가시덤불로부터 뛰어나와 좀 더 커다란 희망, 좀더 보람있는 정열 속에서 이 한 몸을 불살려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괴로워도 생명의 결승점, 인생의 고올을 향하여 꾸준히 달려 가 보자!」

아직까지 단 한번도 상상조차 하여 보지 못한 넓은 세계가 외골목 길 속에서 고달피 방황하던 허 운옥의 외로운 몸을 관대한 자비심으로 포옹해 주는 것 같았다.

「내 눈 앞에는 장 선생의 세계가 있지 않는가!」

그 장 일수의 세계 속에서 운옥은 자기의 정열을 불살려 보려는 의욕이 점점 붙기 시작하였다.

「내 어린 시절의 유랑의 고향이던 대륙의 땅에다 이 가냘픈 뼈를 묻어 보자!」

암야행로(暗夜行路)의 험준한 도정으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여명의 아름다운 세계를 향하여 운옥은 걸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조국의 한개 조그만 주춧돌이 되어 그 거룩한 운명 속에 이 한 몸을 바치자…… 아아, 아버지!」

운옥은 아버지를 찾았다. 오랜 시일 잊어버렸던 아버지의 피의 부르짖음을 운옥은 오늘이야 분명히 자기 귀로 듣는 것이다.

도대체 허 운옥으로 하여금 오늘의 이러한 형극의 길을 거닐게 한 애당초의 원인이 아버지의 피의 부르짖음인 애국가에 있지 않았던가.

「장 선생!」

운옥은 마침내 장 일수를 찾았다. 북경 서직문 대가 식료품점 이층 『아지트』에서 경험한 장 일수의 그 대륙적인 굵은 선을 가진 정열, 그 혁명가적인, 야생적인 정열을 운옥은 일종 황홀한 동경을 가지고 회상하였다.

샹하이·도라의 총뿌리 앞에 섰던 장 일수를 구할 수 있다면 자기 한 몸을 고스란이 바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던 허 운옥이가 아니었던가.

방 월령 아니, 하세가와·나미에 ── 그 나미에의 가냘픈 어깨도 조국의 운명을 걸머 질 수 있었거늘 지사 허 상진이의 딸로서의 허 운옥이가 어찌 주춧돌이 되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을 것인가.

「장 선생, 뵙고 싶습니다!」

운옥은 허세없이 장 일수가 그리워 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두번씩이나 죽었던 몸이 아닌가! 장 선생만 그것을 받아 준다면 나는 장 선생과 함께 뼈를 대륙에 묻고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운옥은 가만히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두었다.